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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3:52:03

이종열/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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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1. LG 트윈스
1.1.1. 1991~1998 시즌1.1.2. 1999 시즌1.1.3. 2000~2006 시즌1.1.4. 2007 시즌1.1.5. 2008 시즌1.1.6. 2009 시즌1.1.7. 총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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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 LG 트윈스 선수 이종열의 선수시절을 담은 문서.

1.1. LG 트윈스

1.1.1. 1991~1998 시즌

91년 장충고를 졸업하고 바로 LG에 입단했다. 당시로서는 고졸 선수가 프로로 직행하는 일이 흔치 않았기 때문에 나름 이슈가 되기도 했는데, 하필 이종열과 함께 LG에 입단한 선수가 동대문상고의 우승 주역이자 당시 청소년대표팀 주장이었던 이우수였기에 비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입단 초만 해도 존재감 없는 그저 그런 내야수였지만, 그나마 수비에 강점을 보였기 때문에 백업 2루수, 3루수로 자신의 입지를 굳혀 나가다가 주전 유격수였던 윤찬의 부진을 틈타 본격적인 레귤러 멤버로 입지를 굳히기 시작한다.[1]

여담이지만 입단 당시 이종열보다 훨씬 주목을 받았던 이우수가 프로에서 성공하지 못한 이유 중 하나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는데, 본 포지션인 유격수를 포기하고 2, 3루 백업을 서며 잡초처럼 자신의 입지를 넓혀나갔던 이종열과는 달리, 프로에 와서도 전문 유격수로 길러지던 이우수는 나중에 데뷔한 유지현의 맹활약 속에 완전히 자리를 잃게 된다.[2]

문제는 타격이었는데, 주전 3루수가 되고 나서도 2할 5푼도 힘든 수준이었다. 게다가 94년에는 해태에서 이적한 한대화까지 등장하며 주전에서 밀려났다.[3] 스스로 위기감을 느낀 이종열은 1995년 시즌을 앞두고 김용달 코치의 조언에 따라 스위치 히터로 변신하는 모험을 선택한다. 그가 스위치 히터를 선택한 건 단순히 타격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2번 타자로서 작전수행능력을 극대화하기 위해서였다고 보는 쪽이 맞을 것이다.

이렇게 우직하게 내야 전 포지션을 넘나들며 붙은 별명이 '변신 괴물'. 끊임없는 노력과 변화로 다양한 활용도를 자랑하게 된 그에게 썩 어울리는 별명이다. LG 암흑기 시절에는 외야수를 본 적도 있다. 이렇게 해서 투수, 포수를 제외한 7포지션 플레이어 타이틀 획득!

1.1.2. 1999 시즌

커리어하이 시즌은 1999년. 이주전 3루수와 2루수를 오가면서 타율 0.291, 9홈런, 55타점으로 생애 첫 세 자릿수 안타를 치는 등 타격에서도 일취월장한 모습을 보이며 커리어하이를 기록하였다. 특히 이 시즌 기록한 WAR 3.69는 아직까지도 깨지지 않는 LG의 단일 시즌 2루수 WAR 1위이다. 참고로 이 시즌 OPS .805을 기록하며 LG 2루수들 중 유일한 OPS .800을 넘겨본 선수가 되었다. 시즌 말미에는 기존 2루수였던 신국환이 부진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포지션을 2루로 옮겨 수비 활용도 역시 여전함을 증명하기도 했다.[4]

1.1.3. 2000~2006 시즌

이러한 성과가 결실을 맺으며 2002년에는 생애 처음으로 올스타전에 출장하는 영광도 누렸고, 이후 감독추천으로 2005, 2007년에도 올스타에 뽑힌다. 또한 2002년 4년 13억, 2006년 3년 9억 6,000만원에 계약하며 LG에서 FA 계약도 두 차례나 이뤄냈다.

99년 이후 타격이 하락세에 접어들자 팬들 사이에서 철밥통이라고 까이기도 했는데[5],

90년대 LG 트윈스의 전성기 시절 신바람 야구를 뒷받침하는 유틸리티 백업으로 활약하던 그가[6] 2000년대 중후반 은퇴 직전에 테이블 세터나 클린업 트리오로까지 나서는 장면은 올드팬들에게 10년 사이 LG가 얼마나 약해졌는지 보여주는 씁쓸한 모습이기도 했다.

1.1.4. 2007 시즌

2007 시즌에는 타율 0.285, 4홈런 53타점의 쏠쏠한 활약을 펼쳤고, 주장을 맡아 후배들에게 리더십을 보여주며 박수를 받는다. 8월 29일 잠실에서 열린 롯데전에 한 이닝에 양타석에서 안타를 치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이 기록은 지금까지도 국내에서 이종열이 유일하다.

1.1.5. 2008 시즌

2008 시즌에 타율 0.232의 부진한 성적을 냈다.

1.1.6. 2009 시즌

2009 시즌엔 삼성에서 돌아온 베테랑 박종호를 비롯해 박용근, 김태완 등에게 밀리면서 거의 2군에만 머무르게 된다. 결국 2009 시즌 종료 후 은퇴를 결정했고 2010년 홈 개막전에서 은퇴식을 치렀다.

1.1.7. 총평

통산 성적은 타율 0.247, 1175안타, 52홈런, 131도루.

화려한 기록을 남긴 스타 플레이어는 아니었지만 주전과 백업을 오가며 내야에서 생기는 공백을 언제든지 메울 수 있는 준수한 선수였다. 시즌 초반에는 팀 내 쟁쟁한 스타 플레이어들에게 밀려 보이지 않다가 후반으로 가면 2군행이나 부상 등으로 사라진 그 스타 플레이어들을 대신해 내야 어딘가에서 꼭 활약을 보였다. 이러한 면에서 LG 팬들 사이에선 LG 내야의 구멍들을 막아준 소금과도 같은 선수로서 기억되고 있다. 2018시즌 종료 시점에서 그가 역대 LG 야수들 중 누적 WAR 12.65로 17위를 기록했다는 점이 그 가치를 증명한다. 커리어의 상당 부분을 수비 백업 전문으로 뛰면서 누적된 공헌도가 이 정도까지 쌓인 사례는 흔치 않다.[7]

더불어 1991년부터 2009년까지 19년간 오로지 LG에서만 뛰다가 은퇴했는데, 장기간 한 팀에서만 하는 선수 생활은 21년의 송진우에 이어 두 번째고, 야수로는 으뜸이다.[8]

2011년 경, LG에 서동욱이 등장해 이종열의 뒤를 잇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9] 이종열이 내야의 어느 포지션을 봐도 평균 이상의 수비를 해줬던 점에 비해 서동욱은 수비고 타격이고 유틸리티 플레이어라고 보기에는 여러 모로 어중간했다. 결국 서동욱은 이후 넥센을 거쳐 KIA로 트레이드 된 후에야 리그 상위권 유틸리티 플레이어로 거듭나게 된다.

여담으로 선수 시절이던 1990년대부터 따로 개인 노트북을 구매한 뒤[10] 전력분석 등 야구 관련 데이터를 수집해 저장해 둔 뒤 항상 들고 다니며 공부했고, 컴퓨터를 효과적으로 다루기 위해 컴퓨터 학원에 다니기도 했다고 한다. # 이러한 노력은 해설, 지도자와 프런트 경력에 영향을 끼쳤다.
[1] 그리고 윤찬은 폭주기관차 사건이라는 희대의 본헤드 주루 플레이를 일으키면서 감독의 눈 밖에 나버린다. [2] 물론 신문기사에서도 나왔지만 이우수가 실패한 결정적 사유는 바로 멘탈 문제였다. 재활훈련 때도 너무 힘들다며 중간에 포기하는 일이 잦았고 놀기 좋아하는 성격 탓도 컸다. [3] 다만 한대화는 당시 절반 정도의 경기에서 지명타자로 출장했고, 이 때는 늘 이종열이 3루수로 출장하는 등 자리가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이종열은 LG의 20세기 마지막 한국시리즈 우승인 1994년 한국시리즈 우승 멤버이다. [4] 빈 3루 자리는 안상준이 맡았다. [5] 물론 이 시기는 LG의 암흑기였으며 터질 듯 터지지 않는 3루수인 김상현 안재만 등이 2군으로 사라지면 그 자리를 이종열이 채워야 했던 팀의 상황이 더 문제였다고 봐야 한다. 심지어 이 시기에 3루를 주로 봤던 안상준은 이종열보다 나을 게 전혀 없는 물방망이였고 2루수 주전으로 키우던 박경수 또한 안 터지긴 매한가지인 데다 유리몸이라 걸핏하면 부상으로 사라졌다. 매년 구멍이 생기던 내야진에 이종열조차 없었다면 가뜩이나 우울한 상황의 LG 내야는 더한 지옥을 봤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6] 2010년대로 빗대면 지석훈과 같은 주전급 백업 역할로 보면 된다. [7] 예를 들어 비슷한 유형의 수비 백업 전문이었던 삼성 김재걸의 누적 WAR는 3.87이다. [8] 팀 후배 박용택이 LG에서만 뛰면서 30대 후반까지도 좋은 성적을 유지하고 있어서 이종열의 기록을 넘어설 가능성으로 기대받고 있었지만, 2020년 시즌을 마지막으로 은퇴했기 때문에 이종열과 동률이다. 무엇보다 박용택에게는 없는 커리어인 한국시리즈 우승 타이틀이 이종열에게는 있다. [9] 2011년 활약이 이종열을 닮았다 해서 트랜스포머2라 불리기도 했다. [10] 1996년 당시 250만 원을 주고 노트북을 구매했다고 하는데, 당시의 물가와 개인용 PC 보급 현황을 생각하면 노트북 컴퓨터는 혁신적인 기기였으며 상당히 고가의 물건이었다. 실제로 국내에서 개인용 PC 보급이 적극적으로 이뤄지고 인터넷 망이 확충되며 IT 강국 소리를 듣게 된 건 1990년대 후반의 일인데, 어찌 보면 시대를 상당히 앞서나간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