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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2-01-22 23:48:37

이수정


1. 개요2. 실존 인물
2.1. 조선 초기의 문신2.2. 조선 후기의 문신2.3. 조선 후기의 의사2.4. 조선 말기의 성서 번역가2.5. 독립운동가2.6. 대한민국의 전 문화부장관2.7. 대한민국의 범죄심리학 교수2.8. 가수 엘수정2.9. 러블리즈의 멤버 이수정(1992)2.10. 1993년생 가수 CHAI2.11. 대한민국의 2001년생 농구선수2.12. 전직 레이싱모델, 방송인2.13. 중국 오대십국시대의 인물
2.13.1. 참고 문헌
2.14. 기타 인물
3. 가상 인물

1. 개요

성씨가 , 이름이 수정인 인물의 목록.

대한민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여성 인명이다. 가끔 이 이름을 가진 남성도 볼 수 있다.

2. 실존 인물

2.1. 조선 초기의 문신

李守貞, 1477년 ~ 1504년.

1477년 당시 사간원 대사간 이세좌(李世佐)의 아들로 태어났다. 1501년( 연산군 7)에 생원시의 장원이 되었으며 #, 같은 해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을 지냈다. #

1503년(연산군 9) 5월 10일 홍문관 부수찬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아버지 이세좌 및 형들(이수원·이수의·이수형)과 함께 참형 효수를 당하였다. # 연산군일기를 보면 형벌 구형이 (笞) 40대에서 출발하여 (杖) 80대가 되더니 결국 참형까지 올라가게 되는 과정이 묘사되고 있다. # #

가족 관계로 아내 가이(加伊)가 있었는데, 남편의 형 집행 이후 장숙용(張淑容, 장녹수)의 노비 신세가 되었다. 아들로 이준경(李浚慶)이 있다.

2.2. 조선 후기의 문신

李守貞, 1709년 ~ 1795년.

는 '계고'(季固)이고 '경담'은 이다. 1762년(영조 38) 천거를 통해 목릉 참봉이 되었다. 사옹원 주부를 거쳐 영춘현의 현감이 되었는데, 이때 선정을 베풀어 현의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웠다. 문집인 『경담집』의 저자이다. #

2.3. 조선 후기의 의사

李壽鼎, 생몰년 미상.

여주의 선비로 점 보는 데 정통한 한편 천연두의 치료까지 겸하여 사대부 집안에서 효과를 본 사람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 1737년(영조 13)에 의약동참(議藥同參)[1]이 되었으며 부사용(副司勇)이 되었다. # #

1737년 이후로는 기록에서 등장하지 않는다.

2.4. 조선 말기의 성서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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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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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명의 독립운동가가 존재한다.

2.6. 대한민국의 전 문화부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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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대한민국의 범죄심리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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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가수 엘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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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러블리즈의 멤버 이수정(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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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 1993년생 가수 CH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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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 대한민국의 2001년생 농구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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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 전직 레이싱모델, 방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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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 중국 오대십국시대의 인물

李守貞/Li Shouzhen, 생년 미상 ~ 949년.

오대십국시대의 호국 절도사로, 후진 석중귀 밑에 있다가 거란에 투항하였으며 이후 거란을 배반하여 후한에 귀부한 전적이 있다. 이후 두중위(杜重威)의 사망 소식을 접한 후 또 다시 역모를 꾸몄다. 역사서 《 치평요람》에 따르면 승려인 총륜(摠倫)의 말을 믿고, 항상 자신이 천자가 될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다녔다고 한다. 거란과도 자주 내통하였으며, 군사를 정비하는 데에 밤낮을 쏟았다고 한다.

조사관(趙思綰)이 장안을 점거하고 자신에게 어의를 올리자 하중(지금의 산서성 윈청시이다.)에서 스스로 '진왕'을 칭하고 장수 왕계훈(王繼勳)에게 동관(퉁관)을 점령하도록 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후한 은제가 백문가(白文珂)와 왕준(王峻)을 보내어 이수정을 토벌케 하였는데, 뜻대로 되지 않자 곽위를 서면군전초위안무사로 삼고 총괄 지휘를 맡겼다.

같은 시기에 다른 지역에서도 조사관과 왕경숭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 둘은 모두 이수정을 주군으로 섬기고 있었다. 곽위는 이 점을 이용하여 이수정이 있는 하중을 먼저 치기로 하였고, 도시를 포위하였다. 이수정은 포위망을 돌파하려 하는 한편 남당에 구원을 요청하였는데, 남당은 원군을 보냈으나 정작 군사들이 싸움을 싫어하였으며 하중이 남당의 영토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관계로 근처도 못 가보고 철군하였다.[2]

결국 이수정은 붙잡혔고 남당에서는 이수정의 사면을 요청하였으나 조정은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 이수정은 후진을 배신한 뒤 거란을 배신하고 다시 후한을 배신한 셈이므로 만약 여기서 사면되고 남당에 귀부했다고 해도 어떻게 됐을지는 뻔한 일.

물론 잦은 배반과 별개로 사람은 좋았다고 평가된다. 은혜를 베풀기 좋아하였으며 반란을 일으킬 때에도 군사와 축성 등에 밤낮을 쏟을 만큼 철두철미했다고.

여담으로 곽위는 이수정의 반란 사건을 통해 명망을 얻고 당대의 유망한 정치 권력자로 떠올랐으며 이후 950년 군사를 일으켜 은제를 죽이고 후주를 개창한다.[3]

2.13.1. 참고 문헌

2.14. 기타 인물

3. 가상 인물


[1] 일종의 어의이다. [2] 지금의 장쑤성 롄윈강시에 해당하는 곳까지밖에 도달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3] 그런데 곽위는 이때 자식이 모두 살해된 관계로 양자 시영(柴榮)에게 제위를 잇게 하였고, 따라서 후주의 황족은 시(柴)씨 가문이 되었다. [4] 정6품의 잡직으로, 임금의 명령을 전달하는 일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