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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초명 | 윤재춘(尹在春) |
이명 | 윤재정(尹在正) |
본관 | 해남 윤씨[1] |
출생 | 1922년 6월 17일 |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항촌리[2] 580번지[3] | |
사망 | 1988년 4월 6일 |
전라남도 여수시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44호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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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정치인.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독립유공자 윤양하는 첫째 작은아버지이다.
2. 생애
1922년 6월 17일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항촌리 580번지에서 아버지 윤돈(尹燉, 1897. 12. 12 ~ 1976. 1. 25)과 어머니 장수 황씨(長水 黃氏, 1895. 11. 3 ~ 1964. 1. 9)[4] 사이의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36년 4월 광주서중학교에 입학한 뒤 광주학생항일운동에 대한 사실을 들으면서 민족의식을 길러 나갔고, 1941년 니혼대학 전문부에 유학했다가 같은 해 12월 중퇴하고 귀국했다.귀국 후 유몽룡(劉夢龍)· 강한수(姜漢秀) 등이 조직한 항일비밀결사 무등회(無等會)에 가입하였다. 회원들은 식민지정책 반대· 일본어 사용 금지· 학병 지원제도 반대·일본 상품 불매운동 등을 결의하고 고향 또는 직장 등에서 회원으로 활동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런데 담양군 무정국민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주만우(朱萬尤)가 담양군에서 활동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면서 무등회의 조직이 노출되었고, 이에 1942년 1월 윤장 또한 체포되었다. 이후 수개월간 구류되었다가 그해 12월 기소유예로 불기소처분을 받고 석방되었다.
그러나 1945년 5월 모교인 광주서중학교에서 일본인 교사에 아부하는 학생에 대한 집단구타사건이 일어나 주동학생이 구속되었고, 전교생이 동맹휴학을 단행했다. 이때 일본 경찰은 그 배후조종에 무등회가 관련있다고 보고 무등회원들을 재차 체포해 그해 7월 다시 구류되었다. 이후 9개월간 심한 고문을 받고 1944년 5월에 구류집행정지로 다시 석방되었다. 출옥 후에도 요시찰인으로 광주부 대화숙(大和塾)에 수용되어 감시를 받다가 8.15 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 조선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재무부 세관국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했다. 공무원을 퇴직한 뒤에는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전라남도 강진군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민주당 양병일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198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에 서훈되었고, 1988년 4월 6일 전라남도 여수시에서 별세했다. 그의 유해는 1988년 4월 9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에 안장되었다. 1990년 12월 26일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3. 선거 이력
연도 | 선거종류 | 소속정당 | 득표수(득표율) | 당선여부 | 비고 |
1960 | 제5대 국회의원 선거 (전남 강진군)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6,816표 (15.4%) | 낙선 (3위) |
[1]
참봉공파(參奉公派) 27세 재(在) 항렬.
[2]
인근의 만덕리·지석리와 함께
해남 윤씨 집성촌이다.
[3]
1915년 작성된 지적원도에 따르면, 이 지번의 필지는 1915년 당시 윤장의 조부 윤정식(尹廷植, 1873. 7. 3 ~ 1949. 1. 9)의 소유였다. 이후 1970년 6월 15일 윤장과 16촌 지간의 족형(族兄) 윤형현(尹馨鉉, 1916. 11. 28 ~ 1992. 5. 16)에게로 소유권이 이전되었다가 1995년 5월 23일 윤형현의 아내
원주 이씨 이경임(1919. 6. 25 ~ 2013. 4. 9)에게로 소유권이 이전되었다. 2011년 5월 19일에는 윤형현의 장손녀 윤채연(尹棌姸, 1974. 12. 22 ~ )에게로 소유권이 이전되어 현재에 이른다.
[4]
황용주(黃庸周)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