奥村チヨ 오쿠무라 치요 | Chiyo Okumur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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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ruby(金野, ruby=こんの)] [ruby(智代, ruby=ちよ)] (콘노 치요) |
출생 | 1947년 2월 18일 ([age(1947-02-18)]세) |
연합군 점령하 일본 치바현 노다시[1] | |
국적 | [[틀:깃발| | ]][[틀:깃발| ]][[연합군 점령하 일본| ]] →
신체 | 158cm, 40kg, B형 |
직업 | 가수 |
학력 | 니나가와 학원 고등학교 |
데뷔 | 1965년 3월 「あなたがいなくても」[2] |
활동시기 | 1965년 ~ 2018년 |
레이블 | 일본 컬럼비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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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가수이다. 일본 치바현의 노다시에서 태어났지만 오사카부 이케다시에서 성장했다.남편도 일본의 전 작곡자이자 원래 가수인 하마 케이스케이다.
2. 약력
야마구치현 출신의 어머니에 치바현 노다시에서 태어나 3세부터 오사카부 이케다시에서 자란다. 오쿠무라 치요는 원래 패션 디자이너가 되려고 했었다. 그런데 니나가와 학원 고등학교 재학 중에 아는 사람이 응모한 오디션에 합격하여 오노약품의 드링크제 '리키 호루모'의 CM송 "어제, 오늘, 내일"을 노래를 불러 호평을 받고 졸업 후 1965년에 도시바 레코드 에서 "당신이 없어도 / 내 사랑"으로 데뷔한다. 일본식 실비 바르탕 으로 팔리기 시작, 고혹적인 매력과 응석 분위기의 노래로 이목을 모은다.왼쪽부터 마유즈미 준, 오가와 토모코, 오쿠무라 치요 |
1969년 - 1970년에 발표해 51만장을 판매한 "사랑의 노예"를 처음에 "사랑 차질"과 "사랑 도둑"의 '사랑 3 부작'이 널리 고평을 얻고, 인기 가수의 지위를 확립한다. 요염한 분위기가 한층 관능적가 처음으로 NHK 홍백가합전 출연하지만 "사랑의 노예"의 가사의 일부가 NHK의 내부 규칙에 저촉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사랑 도둑"을 불렀다.
1971년 12월 25일에 발매의 자신의 이미지를 탈피한 '종착역'도 판매량이 40만장으로 호평을 얻었다. 본인의 가수 은퇴도 불사 강한 희망에서 실현한 곡으로 작곡 한 하마 케이스케 도 작곡가로 올라섰다. 1971년에 발매한 「흐르는 강물처럼」은 후년에 미소라 히바리 가 부른 곡과 동명 다른 곡이다.
1974년 당시 결혼식 모습 |
1980년 빅터 레코드에서 "적어도 안녕은 ..."을 발표하고 가수 활동을 재개. 디너쇼 등 무대를 중심으로 마이 페이스 인 활동을 계속한다. 1993년, 때마침 1960년대 붐을 타고 "사랑의 노예"가 다시 충돌합니다. 개성적인 가창 스타일과 시대를 앞서 취할 패션으로 화제가 되고 젊은 세대의 팬을 많이 받았다. 현재도 가수 활동을 계속하고 있으며, 도시바 EMI 에서 「GOLDEN ☆ BEST 오쿠 무라 치요」등의 신보과 구작이 발매 되고있다.
2008년 3월 7일 후지 TV 에서 방송 된 "팔리지 않으면 다행이다 ... 금요일 고백 SP! 대 장렬한 인생"에 따르면, 대표 곡 '사랑의 노예 '가 남성에 종속적인 가사 였기 때문에, 오쿠무라 자신 이 노래를 주저한다. 또한 이 곡의 이미지에서 당시 집 주변까지 따라 다니는 팬들이 많이 출현 한 것으로부터 고생했다고 한다.
2016년 11월에는 12년 만에 신곡 'Be With You - 당신을 만난 -'를 발표했다. 신곡 발매를 기념하여 2017년 1월에는 아사쿠사 소리 요로 건물에서 자신의 첫 매장 · 라이브도 하였다.
2018년 1월 6일, 2018년 내내 예능 활동에서 은퇴한다고 발표되며 12월 31일에서 은퇴했다.
3. 홍백가합전
1969년 제 20 회 홍백가합전 - 사랑 도둑 恋泥棒 |
1970년 제 21 회 홍백가합전 - 거짓말이라도 좋으니까 嘘でもいいから |
1971년 제 22 회 홍백가합전 - 종착역 終着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