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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44:33

오재원/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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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재원의 선수 경력을 정리한 문서.

2. 아마추어 경력

서울학동초등학교, 서울 경원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이 아닌 경기도 성남시의 야탑고로 스카우트됐다. 2002년 야탑고는 큰 위기를 겪는데 그렇지 않아도 선수층이 얇은 팀에서 8명이나 춘천고로 전학하여 팀원이 총 13명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 3학년은 주전 포수이자 주장이었던 이중훈(동의대 진학)과 오재원뿐이었다. 봉황대기에서 야탑고는 돌풍을 일으키는데 16강전에서 노경은-박경수의 성남고를 꺾고 8강에 진출했으나 김재호의 중앙고에게 9회말 끝내기 역전패를 당하며 오재원은 서러운 눈물을 동대문야구장에 쏟아내었다. 그 후 김재호와 오재원은 두산베어스에서 다시 보게 되고 두산의 든든한 키스톤이 되어주었다.

야탑고를 졸업한 2003년에 두산 베어스의 2차 9순위 지명을 받았으나 낮은 계약금을 제시받았고 오재원 또한 훗날 술회하기를 "지금(프로 선수 시절)만큼 잘할 자신이 없었다. 프로에 갔다가 도태되는 게 두려웠다."고 하면서 경희대 체육학과(2003학번)에 진학, 2007년 졸업과 함께 두산 베어스에 입단하였다.[1][2]

3. 프로 경력

3.1. 두산 베어스

" 감독님, 저는 운동하려고 왔지 도망치려고 온 게 아닙니다 "
동기들은 고된 훈련을 피해 도망쳤는데 너는 왜 도망치지 않냐는 질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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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U-18 야구 국가대표팀 시절
▲ 오재원 두산 응원가
오재원을 대표하는 말이 있다. 바로 "우리 팀일때는 최고의 허슬 플레이어, 상대팀일 때는 두들겨패고 싶은 선수." 이 말이 그의 야구장에서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특유의 허슬 플레이와 세레머니로 두산 팬들에게는 많은 사랑을 받는 선수인 반면, 경기 중 선후배 가리지 않고 입으로 식빵을 굽는다든가, 잦은 비매너 플레이, 그리고 그에 대한 되지도 않는 언론 플레이 등을 하는 경우가 많아 타 팀 팬들에게는 나지완, 진갑용 등을 제친 독보적 비호감이다.[3] 이 때문인지 대표적인 별명은 오식빵, 우리혐.[4][5][6] 다만, 국가대표일 때는 이런 비호감 이미지가 희석되고 팀에 투지를 부여하는 허슬 플레이어로 사랑받기도 한다. 특히 프리미어12 당시 오재원의 플레이를 놓고 야갤에서는 두산 팬들이 오재원을 좋아하는 이유를 알겠다는 반응들이 올라오기도 했다. 이래저래 야구팬들에게는 애증의 존재. 2015년 프리미어 12 준결승(한국 VS 일본) 9회 도쿄돔에서 선두타자 안타로 국민열사 "오열사"로 등극. 도쿄대첩.

3.1.1. 2007~2009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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풋풋했던 시절

주로 대주자로 기용되거나 1군과 2군을 왔다갔다 하기를 반복하였다. 2009년에는 손가락 부상과 이원석의 영입, 손시헌의 군 제대까지 겹치면서 내야에 들어오기가 더더욱 힘들어졌다. 2007년엔 등번호로 48번을 쓰다가 2008년 7번으로 바꿨다. 참고로 이때까지는 2루수보단 3루수와 1루수로 더 자주 출장했고, 심지어 데뷔 첫 해에는 좌익수 대수비로 투입되기도 했다.

3.1.2. 2010~2012 시즌

파일:20101005SPOH.jpg
2010년 시즌에는 등번호 53번으로 번호를 바꿨다.

드디어 포텐셜이 폭발할 기미를 보이며 연일 맹타를 휘두르며 부진한 고영민을 대신해 두산 테이블 세터진을 이끌었다. 특히 2010 시즌부터 마우스피스를 착용하고 경기에 나서는데, 원래 악관절이 약했는데 이를 꽉 물 수 있어 성적이 좋게 나온다고 한다. 결코 욕하지 말라느니 그런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아시안 게임을 놓쳐서 군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데뷔 이래 무려 4시즌 동안 홈런이 없다가 드디어 2011년 4월 5일 경기에서 자신의 프로 데뷔 첫 홈런을 기록했다. 그리고 같은 달 17일 오승환에게서 홈런을 쳤다 두산 베어스 갤러리에서는 홈런을 치면 탕수육을 준다는 쿠폰 짤도 만들었다.[7]. 재미있는 사실은 4월 중순에는[8] 한때 팀내 홈런 공동 1위 타자였다. 하지만 오재원이 홈런을 쳤던 경기들은 다 석패했던 경기였다.

2011년 5월 26일 잠실시리즈에서 1경기 4도루의 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6월 17일 한화 원정 시리즈 첫 경기에서 동점 투런 홈런을 때렸다. 2011년 7월 8일 삼성 라이온즈와의 대구 경기에서 가턱으로부터 개인 통산 네번째 홈런이자 생애 첫 장외 홈런을 뽑아냈다.

2011년 10월 2일 LG전에서 유원상의 볼이 오재원의 머리뒷쪽으로 날라가면서 오재원의 배트를 맞춰 오재원이 헬멧을 벗고 식빵거리면서 유원상에게 걸어가는중에 1루수비를 하고 있던 이택근이 총알같이 뛰어와서 오재원을 밀치면서 벤치 클리어링이 일어났다.

총 46도루로 2011시즌 도루왕을 차지했다. sWAR 3.55로 2루수 중 1위를 차지했으나, 타격 성적에서 안치홍에게 밀려서 골든글러브 수상에는 실패했다.

2012년 시즌 종료 후 벌크업을 시작 했는데, 갑자기 10kg가 넘게 몸무게가 늘어난지라 팬들의 걱정이 많았다. 본인은 미들급에서 붙고 싶다고 한다.

3.1.3. 2013 시즌

파일:2013101404068_0.jpg
등번호를 53번에서 97번으로 변경하였다.

3월 30일 삼성 라이온즈와의 개막전 1회초 2사 만루 상황에서 선발 배영수를 상대로 시즌 1호 홈런이자 1호 만루홈런을 쳐냈다.

6월 이후 전 국가대표 이익수를 떠오르게 하는 일명 우중루수 내야 시프트를 선보이며 안타성 타구를 몇개씩이나 걷어내, 팀의 승리에 크게 기여하였다. 오재원의 이 시프트는 번트를 잘 대지 않고 발이 느린 선수들을 겨냥한 것으로, 6월 29일 NC전에서는 이호준의 안타성 타구를 걷어냈고 # 7월 5일 삼성전에서는 채태인의 안타성 타구를 잡아 빠르게 송구함으로써 오버런 한 2루주자 박한이를 잡아냈으며 #, 7월 6일 삼성전에서는 박한이의 안타성 타구를 또 한번 잡아내어 선행 주자 채태인을 2루에서 아웃시키며 이닝을 종료시킨 바 있다. # 이러한 시프트는 고영민, 정근우의 장점만을 흡수하려 노력한 결과로, 수비시에는 본인이 나름대로 타자들의 성향을 분석해 위치를 선정한다고 한다. 그 위치에 서 있으면 안타를 다 잡아낼 수 있을 것 같다나.

그러나 7월 이후 부진함에도 자꾸 기용되어서 두산 베어스 갤러리에서 김진욱 감독의 양아들이라는 뜻에서 김재원으로 불리며 까이고있다. 게다가 8월 25일 잠실 한화전에서 9회말 뇌주루로 팀의 패배를 가져와서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하지만 결국 포스트시즌에서 꽤 괜찮은 활약, 준플레이오프와 플레이오프에서 괜찮은 활약을 하여 팀의 5년만의 한국시리즈 진출에 어느 정도 보탬이 됐다. 한국시리즈에서도 3차전에서 3:1에서 3:2로 추격하는 2루타와 베이스런닝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홈으로 들어오는 과정에서 햄스트링 부상이 발생했다.

하지만 이 부상으로 인해 더는 한국시리즈 출장은 하지 못했고, 3차전이 2013 시즌 마지막 출장이 되었다. 그리고 그 사이 팀은 3승 1패에서 3연패라는 말도 안되는 대역전패로 준우승을 했다. 입대를 앞둔 오재원의 부상은 팀이나 본인이나 많이 아쉬움에 남을 듯 하다. 대구에서 삼성에게 마지막 경기를 내주고 삼성이 안방에서 우승 행가레와 불꽃놀이 축제를 만끽할 때 덕아웃에서 허탈해하는 오재원의 모습이 잡혔다.

3.1.4. 2014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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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 2015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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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대첩 9회 초에 타석에서 큼지막한 타구를 날린 후 배트 플립 하는 모습
홍성흔의 뒤를 이어 주장이 되었다. 처음에는 의욕적인 인터뷰나, 우승을 목표로 한다는 발언 등 두산 팬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이후 보여준 극도로 한심한 경기력 탓에 이런 말은 전부 들어가버렸다. 오재원 하면 연상되었던 파이팅 넘치는 플레이는 실종되었고, 홍성흔과 더불어 팀 타선에 찬물을 끼얹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나마 장점으로 꼽혔던 2루 수비력 역시 급격히 퇴보하면서, 왜 2군에 보내지 않느냐는 팬들의 질타가 계속되면서 까이고 있다. 특히 6월 2일 KIA 타이거즈전에서 보여준 1루 커버플레이는 태업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정말 한심스러웠다. 심지어 경희대 선배인 홍성흔과 묶여 '쌍경희'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7월 26일 마산 NC전에서 수비를 하던 도중 갑자기 어지럼증과 두통을 호소하며 의식을 잃어버리면서 병원에 후송되었다. 오재원, 어지럼증과 두통으로 병원 진료 예정 # 이 와중에 해설진들이 빨리 서둘렀으면 좋겠다고 언급했지만 의료진의 응급대처가 늦어지면서 팬들의 원성을 샀다. 이 때 제일 빨리 다가가 모자부터 벗기고 뭐라도 하려고 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옆에 있던 1루수 오재일이었고, 제일 급박하게 뛰어다녔던 사람들도 의료진이 아닌 코치진이었다. 코치진이 호흡기 대고 허리띠 풀고 머리에 물 붓고 오재일이 신발 벗기는 동안 의료진이 한 거라고는 들것 가져온 것.. 병원에서 CT 촬영, 혈액검사 등 검사 결과 다행히 큰 이상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8월 9일 LG와의 경기 7회말 2사 1,3루. 여기서 1루주자 김현수가 런다운에 걸리는데 3루 주자 오재원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홈으로 쇄도, 홈에서의 승부에서 태그아웃 판정을 받았으나 오재원이 합의 판정을 요청한다. 처음엔 누가 봐도 아웃인 것처럼 보였으나 중계 화면 확인 결과, 최경철이 공을 오른손에 잡고 왼손 미트로 태그를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며[9] 판정이 번복, 오재원이 도루로 홈인하며 홈스틸로 다시 1점을 얻는데 성공한다.

9월 18일 삼성과의 경기에서 겨우 안타를 치고 1루에서 타임요청도 없었고 베이스를 밟지 않고 보호구를 벗다가 눈치 빠른 채태인에게 아웃당하면서 본헤드급 명장면을 만들어냈다. 이 장면은 경기가 박빙이던 4회 2점을 뽑고 2:2 1사 상황에서 나온 것으로 경기 분위기가 넘어가던 시점에서 나온 아쉬운 장면이었다. 결국 이 경기는 패배하였고 엄청난 까임을.
3.1.5.1. 1차 FA
시즌 종료 후 FA 자격을 얻었는데, 하필 그 시기에 기초군사훈련이 겹쳤다.[10] 덕분에 모든 팀과의 계약 기간 때 시장에 나왔다. 아마 큰 변수가 없는 한 훈련 종료 후 두산과 계약할 가능성이 높아 보이나 두산그룹 관련 논란 등 변수는 존재한다.[11] 그리고 4년 60억 원이라는 패기 넘치는 금액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욕을 엄청나게 얻어먹었는데 오재원은 계약 체결 뒤 했던 인터뷰에서 그런 금액은 요구한 적도 없다고 했다. 심지어 60억을 운운하던 기사는 협상 단계에서 금액 얘기는 꺼내지도 않았던 시점에 나왔던 기사였다고 한다. 구단 측에 확인한 결과 또한 "협상 테이블에서 60억 원이라는 금액은 나온 적조차 없으며, 선수와 구단이 이견을 보였던 것은 인센티브 정도였고 다른 내용의 합의는 쉽게 진행되었다"고 확인사살을 했다. 기사.

2015년 12월 30일 계약 기간 4년에 계약금 12억 원, 연봉 5억 5,000만 원, 인센티브 4억 원 등 총액 38억 원에 FA 계약을 맺고 두산 베어스에 잔류하였다. 거품 끼고 과열된 FA 시장을 감안한다면 서로 양보한 합리적인 계약이란 평가가 많다.

3.1.6. 2016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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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7. 2017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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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8. 2018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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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격 부문에서만큼은 2014년도를 능가할 만한 성적을 기록했다. 특히 15홈런 81타점은 중심타선에 들어도 손색없을 정도의 좋은 성적이자 본인의 커리어 하이 기록이다. 다만 후반기, 특히 9월부터 타격감이 심각하게 떨어지는 바람에 wRC+, WAR, OPS 에서 2014년을 넘지 못하며 아쉽게 끝나버린 시즌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 시즌 이후로는 에이징 커브로 인한 부진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회광반조 시즌이 되었다.

3.1.9. 2019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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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모두의 예상을 깨버리고 2019년 한국시리즈에서 기사회생, 하드캐리를 하며 3번째 우승반지를 손에 넣었다.
3.1.9.1. 2차 FA
4년간 기록
경기 타수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볼넷 삼진 병살타 도루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479 1400 369 66 4 30 197 219 167 336 31 41 0.264 0.343 0.381 0.724
시즌 종료 후 개인 두 번째 FA 자격을 취득했다. 키스톤 콤비인 김재호는 2017년 FA 계약 이후 매 시즌 준수한 활약을 펼치면서 커리어하이를 다시 써내려가고 있는 반면 오재원은 공격과 수비 모두 노쇠화로 인한 하락을 겪으면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때문에 괜찮은 계약을 따내기는 힘들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2020년 1월 22일, 두산과 3년 계약을 맺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계약금 4억, 연봉 3억, 옵션 6억 등 최대 19억원. 이 계약에 대해서는 오재원이 지난 4년 간 기록한 성적, 특히 2019년의 막장 성적을 감안하고 볼 때 상당한 오버페이라는 지적이 많았다.[14][15]

3.1.10. 2020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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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시즌에서는 작년보단 조금 나아졌지만 여전히 최악의 부진을 겪으며 "공격도 안 돼, 수비도 안 돼, 주루도 안 돼, 덕아웃 리더도 안 돼"라는 멸칭을 들었지만, 준플레이오프에서 기사회생, 시리즈 MVP를 수상하며 "준플레이오프는 돼" 라는 표현을 얻었다.

3.1.11. 2021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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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부터 지속되는 노쇠화, 에이징 커브로 인한 부상과 부진에 시달리며 보상선수 이적생 박계범, 강승호에게 제대로 밀려 시즌 내내 고전했고, 8월 말 2군으로 내려간 후 단 한 번도 1군으로 올라오지 못하며 그대로 시즌을 마감했다. 결국 포스트시즌에서도 부름을 받지 못하며 2019년을 능가하는 커리어 최악의 시즌이 되고 말았다.

3.1.12. 2022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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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FA 계약의 마지막 시즌이자 부활의 의지를 가지고 시작한 시즌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저조한 성적으로 부진한 모습만 보이다 5월 1일 1군에서 말소되었고 그대로 시즌을 마감, 결국 9월 28일 은퇴를 선언했다.

3.2. 포스트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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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국가대표 경력

4.1. 2014 인천 아시안 게임

4.2. 2015 WBSC 프리미어 12

2015 프리미어 12
파일:Oh_2977.jpg
파일:오재원빠던1.gif
파일: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화이트 로고.svg
경기 선발 타수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도루 삼진 4구 상세
7 1 6 3 0 0 0 1 1 .500 .556 .500 1.056 0 0 2 ##

오열사란 별명을 얻으며 자신에 대한 야구팬들의 여론을 완전히 바꾼 대회. 패색이 짙었던 일본과의 준결승전 9회 선두타자로 나서 기이한 루틴으로 상대의 신경을 은근히 긁다가 결국 안타를 치고 일본 덕아웃을 향해 주먹감자 세레머니를 시전했다. 오재원의 안타를 시작으로 일본을 상대로 그동안 막혀있던 대한민국 타선의 혈이 뚫리며 분위기가 완전히 대한민국으로 기울면서 결국 역전까지 성공하고, 타자 일순으로 2사 만루 상황에 다시 한 번 타석에 들어섰다. 도쿄돔 담장까지 뻗는 거대한 타구를 치고 호쾌한 빠던을 시전해 다시 한 번 일본의 뒷목을 잡게 했다.[16] 이 타구는 정말 아쉽게 중견수 아키야마 쇼고 바로 담장 앞에서 잡혔으나 일본 대표팀의 멘탈을 박살내기에 충분한 장면을 선사했고, 대표팀은 결국 일본을 잡고 결승에 올라 초대 우승 타이틀을 거뒀다.

4.3. 2017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파일: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화이트 로고.svg
경기 타수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도루 삼진 4구 상세
2 3 1 0 0 0 0 1 0.333 0.333 0.333 0.667 0 2 0

정근우가 무릎 부상으로 대표팀에서 낙마하자 대체선수로 출전하였다.

5.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 기록
<rowcolor=#ffffff>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2007 두산 49 58 .259 15 4 0 0 5 10 3 5 .328 .313
2008 117 282 .248 70 10 3 0 28 45 28 24 .305 .305
2009 106 209 .230 48 3 0 0 12 36 12 26 .244 .312
2010 두산 123 384 .276 106 17 3 0 37 59 35
(4위)
33 .336 .332
2011 129 466 .277 129 18 4 6 46 73 46
(1위)
48 .371 .342
2012 77 188 .282 53 7 3 0 17 29 14 17 .351 .338
2013 113 308 .260 80 14 7
(3위)
7 44 54 33
(3위)
55 .419 .367
2014 110 359 .318 114 21 6 5 40 60 33 52 .451 .404
2015 120 411 .280 115 20 2 11 59 60 31
(6위)
51 .418 .356
2016 122 416 .272 113 18 1 5 58 68 13 59 .356 .358
2017 127 334 .237 79 16 1 7 40 43 7 50 .353 .332
2018 132 473 .313 148 24 1 15 81 78 15 43 .463 .369
2019 98 177 .164 29 8 1 3 18 30 6 25 .271 .267
2020 85 155 .232 36 7 1 5 27 25 10 16 .387 .301
2021 45 72 .167 12 3 0 0 5 6 2 6 .208 .228
2022 18 29 .172 5 2 0 0 4 2 1 1 .241 .194
KBO 통산
(16시즌)
1571 4321 .267 1152 192 33 64 521 678 289 511 .371 .341

5.1. 수상



[1] 2003년 드래프트까지는 2라운드 지명권 유효기간이 정해져 있지 않아 프로 구단에서는 낮은 순번에서 고등학교 3학년 선수를 지명해놓고 대학에 진학시켜 대학 4년간의 활약상과 기량을 체크한 뒤 입단을 시킬지 아니면 지명권을 포기할 지 결정하거나, 아니면 5천만원 이하의 낮은 계약금을 제시하였다. 서울고 포수 허도환도 두산의 7순위 지명을 받았지만 단국대로 진학 후 입단했다. 2004년 드래프트부터는 2라운드 지명권의 유효기간이 2년으로 정해졌다. [2] 고졸 선수가 프로에 바로 입단하여 1~2년만에 방출당하는 경우는 현재에도 볼 수 있다. 이 케이스에 해당하는 선수들은 대학야구에서도 뛸 수 없어 20대 초반에 실업자가 되는 셈이다. 고3 선수들과 학부모들이 프로 입단만 고집하기 보다는 대학 진학에도 다시 눈을 돌리게 된 이유다. [3] 국내 야구 갤러리 등에서 KBO 비호감 선수 목록을 뽑을 때 오재원은 이름을 빼놓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야갤러들은 오재원을 혐계의 아주 독보적인 컨셉을 지니고 있고 별명도 화려한지라 우리혐, 혐카시, 귀혐둥이, 혐블리, 國혐이라는 별명으로 부르며 야갤돌 대우를 해주는 상황이다. 물론 야갤돌 광현아 부활해 시절을 생각하면 야갤돌 대우를 정상적인 애정으로 보긴 어렵다. 하지만 꽤 개그력이 충만한 별명이기에 두산 베어스 갤러리에서도 많이 쓰이는 모습을 볼수 있다. 이쪽은 확실히 재미와 애정인 듯. 그리고 그는 도쿄 대첩을 통해 드립을 현실로 바꿔버리는 데 성공했다. 야갤 개념글 한 페이지가 거의 대부분 우리혐 관련 드립으로 가득 들어찰 정도로. [4] 2015년 10월 말경부터 많이 떠오르며 오식빵보다 많이 쓰이는 별명이다. 원조는 우리형이며 그의 바리에이션. [5] 2015 프리미어12 대회의 국가대표가 되고, 한국 야구의 전설이 된 준결승전, 즉 도쿄 대첩에서의 활약이 주목되어 대회의 최고스타가 되고 나서는 국혐(국가대표 우리혐)이나 Be호감(영어 be동사를 이용한 언어유희. 비호감에서 호감이 되었다는 뜻)이라는 별명까지 생겼다. [6] 최근 오재원이 팬서비스 때문에 재평가를 받고, 야구 외적으로 미담이 많다. 그리고 오재원은 야구 외적으로는 까일 거 전혀 없다. 나지완은 국대 언플과 졸렬한 팬 서비스로 엄청난 안티 양성을 했고, 진갑용은 약물+꼰대짓으로 비호감이다. 농구로 치면 김주성과 비슷한 류. 김주성은 스포츠 선수 중 기부를 많이하는 선수 중 한 명이고. [7] 실제로 이 이미지는 MBC 야구 프로그램 야구 읽어주는 남자에도 이 짤방이 사용된 바가 있다. 링크. 이 짤방이 두산 갤러리에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돡갤러들에게 PD가 돡갤러라는 의심을 샀다. 그대로 내보낸 것은 아니고 아다같은 디씨인사이드 용어들은 짤에 있는 글귀는 어느 정도 필터링해서 방송에 내보냈다. 소문에 의하면 PD가 두산 팬이라 카더라. [8] 정확히 말하면 4월말 대전 원정 시리즈 전까지. [9] 이때, 야구공으로 직접 태그하거나 글러브 안에 공이 있었어야 한다. [10] 조교에게 FA 체결 소식이 나오면 알려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11] 오재원은 국대에서의 활약 등으로 상당히 올라간 주가에 힘입어 고액계약을 요구할 확률이 높고 이에 따라 두산이 오재원에게 거금을 물려주고 재계약한다면 구단은 고액 재계약까지 하는 상황에서 신입사원은 마구잡이로 짤라대느냐!라는 반발이 올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네이버 스포츠 관련 댓글에선 이러한 비아냥이 대다수. [12] 시즌 WAR -0.30. 이 수치 하나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 전 구단 35명의 2루수 중 35등이다. [13] 게다가 오재원도 어느덧 30대 중반의 나이에 접어들은지라 노쇠화가 오고 있는 것 아니냐는 사람들의 추측 또한 상당히 많아졌다. 엄밀히 따지면 하락세는 진작에 오고 있었고 2018년이 회광반조 또는 플루크 시즌이였을 뿐이라고 보는게 적절하다. [14] 2019년 한국시리즈 당시 박정원 구단주가 "(저 선수를) 잡아라"라고 프런트에게 직접 지시를 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때문에 두산 팬들은 이 소문이 나왔을때 "무슨 브랜드라도 잡았냐"며 비판했다. [15] 그러나 21~22 시즌 동안 최악의 부진으로 김태형 감독이 2군에다 박아둔 시간이 워낙 많아서 실 수령액은 옵션 6억이 빠진 13억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옵션 수령 실패는 결국 은퇴 후 오재원이 김태형 감독에게 앙심을 품고 불화설 의혹을 만들어대는 원인이 된 듯 하다. [16] 6년 뒤 2021년 일본시리즈에서 무라카미 무네타카가 이러한 똑같은 장면을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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