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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 카즈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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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85129><colcolor=#ffffff> 오다 카즈마사
小田 和正| Oda Kazumasa
파일:小田和正.jpg
본명 오다 카즈마사 ([ruby(小田, ruby=おだ)] [ruby(和正, ruby=かずまさ)])
출생 1947년 9월 20일 ([age(1947-09-20)]세)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가나자와구
국적 [[틀:깃발|]][[틀:깃발|]][[연합군 점령하 일본|
연합군 점령하 일본
]]→
학력 도호쿠대학 (공학부[1] / 졸업)
와세다대학 대학원 (이학 연구과 / 석사)
데뷔 1970년 ~ 현재
소속사 FAR EAST CLUB INC.[2]

1. 개요2. 이력
2.1. 오프코스(オフコース, Off Course)2.2. 솔로 활동
3. 목소리에 대하여4. 에피소드5. 레코드 및 판매 기록6. 음반
6.1. 싱글6.2. 앨범6.3. 베스트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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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싱어송라이터. 쿠와타 케이스케와 함께 일본 음악계에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끼친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 뮤지션. 비록 오다 카즈마사가 Mr.Children이나, 양대 산맥을 이루는 쿠와타 케이스케가 이끄는 사잔 올 스타즈 등에 비해 음반 판매량은 훨씬 적을 지 모르나, 일본 가요계 내에서 이 사람이 끼치는 영향력 자체는 그들보다 더 컸으면 컸지, 절대 뒤지지 않는다. 일본 가요계 후배들이 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우리나라 가수들이 조용필에게 깍듯한 그것과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방송보다는 공연 위주로 활동하는 사람이 저 정도 음반 판매량을 보유하고 있는 것도 어마어마한 일.

2. 이력

2.1. 오프코스(オフコース, Off Course)

파일:attachment/off_course.png

이 팀을 한국 밴드에 대입을 하자면, 일본의 들국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3]

오프 코스의 주축인 또 다른 멤버 스즈키 야스히로와는 중학교 입학 시험을 치르기 위해 다닌 학원에서 처음 만나게 되는데, 당시에는 음악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었던 오다에게 스즈키는 그를 음악의 세계로 끌어들였다. 스즈키의 말에 의하면 당시 꽤 오랫동안 기타를 치며 음악을 하던 스즈키를 오다는 얼마 안 지나 뛰어 넘어버렸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다는 스즈키를 그의 '음악적 스승'으로써는 인정하고 있다. 이것이 훗날 전설의 밴드가 되는 '오프 코스'의 시작이었다.
1969년 토호쿠대학 재학 시절, 아마추어 음악 생활을 끝맺기 위해 '디 오프코스'[4] 명의로 야마하 뮤직 콘테스트에 토호쿠 지역 예선으로 출전했으며, '군중 속으로'란 제목의 노래를 불렀다. 도쿄가 아닌 지역 예선으로 출전한 이유는 도쿄라면 레벨이 높을 것이라 생각하여 지방에서 출전하는 게 승산이 있을 거라 생각한 이유에서였는데 지역 예선도 레벨이 굉장히 높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예선 1위로 통과하여 전국 대회에 진출. 라이벌 상대는 작곡가 겸 가수인 자이츠 카즈오와 ' 날개를 주세요'로 유명한 '붉은 새'였다고 한다. 자면서도 할 수 있을 정도로 맹렬히 연습했으나 '붉은 새'가 1위를 차지하고 오프코스는 2위로 밀려나게 되었는데 우승을 하면 음악 활동을 그만 두려 했지만 2위를 하니 오기가 생겨 프로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한다. 대학원에 진학한 후에는 각자의 길을 가게 된 멤버도 있어, 몇 번의 멤버 교체를 걸쳐 1972년 기타리스트 스즈키 야스히로와 함께 'Off Course'로 메이저 데뷔를 한다.

약 1973년부터 77년까지는 사실 록그룹이라기 보다는 포크송 듀오에 가까웠다. 음악들이 쎄시봉 느낌이 상당히 난다고 할까. 사실 이 듀오 시절에는 거의 무명 수준이었다 봐도 좋다. 1976년부터 세션으로 자리잡던 드러머 오오 지로, 베이시스트 시미즈 히토시, 그리고 서브 기타리스트 마츠오 카즈히코가 1978년도부터 밴드의 정식멤버가 되었고, 이때부터 그들의 음악스타일이 포크에서 록으로 갈아타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의 이 5인조 밴드의 호흡은 그야말로 미래에도 다시 없을 환상의 호흡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다의 호소력 짙은 보컬, 스즈키의 시원한 기타 연주, 마츠오의 미친 존재감을 선보이는 하모니카 연주[5]와 보조 기타 연주, 시미즈의 감칠맛 나는 베이스, 그리고 지로의 강렬한 사운드의 드럼까지, 그말로 이 시절의 오프코스는 진수성찬이었다.

1979년도에 그 유명한 '愛を止めないで(사랑을 멈추지 마요)'가 수록된 정규앨범 'Three And Two[6]' 부터 상당한 인기를 얻기 시작하더니, 같은 해 12월 낸 싱글 'さよなら(안녕)'로 그야말로 대박을 쳤다. 2000년대를 대표하는 일본 발라드가 사잔 올 스타즈 TSUNAMI라면, 1980년대의 일본의 대표 발라드는 이 노래라 봐도 무방하다.[7] 오리콘 1위는 못했으나, 무려 4개월 넘게 월간차트 10위 안에 들었던 곡이다. 이후 1980년도에 낸 'Yes-No', 1981년도에 낸 '言葉にできない(말로 표현 할 수 없어)[8], 'I Love You', 1982년도에 낸 'Yes-Yes-Yes'를 포함해 그들이 내는 싱글, 정규 앨범은 하나같이 히트를 쳤으며[9], 하는 공연마다 거의 매진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오프코스는 명실상부 1980년대 초반을 대표하는 밴드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대단한 인기를 이끌었던 오프 코스 역시 주 축이 되었던 오다와 기타리스트 스즈키가 사이가 틀어지면서 조금씩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10] 왜 밴드들은 하나같이 이럴까? 사실 앨범 내에서 반반씩이었던 오다와 스즈키의 곡 분배에서 이 그룹이 5인조가 되면서부터 오다의 곡의 비율이 늘어나기 시작했으며, 스즈키가 이에 대한 불만이 없지 않아 있었을 것이라는 건 짐작이 가능하다.[11] 그리고 5인조가 되면서부터 오다와 스즈키는 의견 불일치로 인한 충돌도 종종 있었고, 스즈키는 이 때문인지 그룹 내에서 상당한 위화감이 있었다고 한다. 이 외에도 5인조 개편 이전의 포크송 스타일의 음악을 추구하던 스즈키[12]와 계속 새로운 음악을 시도하려고 했던 오다의 음악적인 견해 차이까지 겹쳐서 결국 1982년도 6월 30일[13][14]에 있었던 그 전설의 라이브, 무도관에서의 라이브[15]를 끝으로 5인조로서의 활동은 사실상 끝이었고, 결국 1983년에 스즈키는 소속사와의 계약이 만료 되자마자 팀을 탈퇴하고 말았다.

계약 만료 후 스즈키를 제외한 나머지 멤버들은 약 1년간 활동을 중단하고, 해체를 심각하게 고려하던 중이었으나[16], 1984년에 새 소속사와 계약 후 4인조로 활동을 재개했다. 이때부터 그들의 음악은 여러 부분에서 굉장히 실험적인 도전을 하였고 대중들 역시 그들이 도전을 어느 정도 인정해 주어, 그들은 예전과 다름없는 인기를 구가하였다. 그리고 1987년에는 미국 진출을 위한 영어 노래들만을 실은 음반 'Back Street of Tokyo'를 발매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스트 앨범에 수록된 노래들만 보면 1970년대 후반~80년대 초반 노래들이 압도적으로 많고 이 당시 노래들의 비중은 다소 적은 것이 사실. 정규 앨범들 또한 주간 1위를 하긴 했었으나 대부분 단발성이었다. 절정에 달했던 이 밴드의 호흡은 1982년을 거쳐 스즈키가 탈퇴한 후 그 시너지가 많이 떨어졌다고 봐도 무방하다.[17] 영국 밴드 Hot Space 이후 4~5년간 저조했던 것과 대응되는 시기라고 보면 된다. 그나마 베스트 앨범에 계속 실리는 건 1988년에 낸 그들의 마지막을 암시하는 노래였던 '君住む街へ(네가 있는 거리에)'.

이렇게 10년 넘게 국민적 인기를 구가하던 그들이었으나, 안타깝게도 이들은 오래가지 못하고 1988년에 마지막 정규앨범 'Still a Long Way to Go'를 내고 해체를 선언하고야 말았다.

이후 오다와 스즈키는 솔로 활동으로 커리어를 쌓았고, 오다는 이후 한 음악활동들이 족족 성공하면서 일본의 국민가수로 자리 잡았다. 오다와 스즈키를 제외한 나머지 멤버는 90년대 중반 들어 비틀즈 카피밴드로 재결성을 해서 활동을 하기도 했으나, 어째서인지 오다와 스즈키를 포함한 완전체로는 해체 3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번도 재결성이 된 적이 없다. 오다와 스즈키 역시 그 시절 노래들을 부르면서도 재결성은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재결성 언급을 아예 안 하는 오다와는 달리, 스즈키는 재결성에 어느 정도는 관심이 있는 듯 한지 가끔 라디오나 TV에 나와서 재결성에 관해서 진지하게 얘기를 하곤 한다. 실제로도 오다와 스즈키는 갈등이 어느 정도 해소가 되었는지 서로 가끔씩 편지를 주고받고 한다고 한다. 스즈키는 이미 약 30년 전 오프코스 해체 직후 낸 자서전에서 '오다에 관한 악감정은 이제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2017년에는 드디어 비록 영상 통화의 형식이긴 하였으나 오다와 스즈키가 방송에서 함께 라이브를 펼치기도 하였다! 오프 코스 팬들에게는 그야말로 영광의 순간.

해체 이후에도 재결합이 가장 많이 언급되는 밴드 중 하나이다. 그 증거로 매년 6월 30일만 되면 오프 코스의 팬들이 무도관에 모여 합창 라이브를 개최한다. 심지어 2017년[18]에는 6월 30일에 5명의 멤버를 무도관에서 한자리에 모이게 하려는 팬들의 시도까지 있었다! 그러나 팬들의 염원과는 다르게 주축인 오다와 스즈키가 거의 가능성이 없다고 못을 박아놓은 상태라 슬프지만 현재 재결합의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고 보는 것이 맞다. 멤버들이 전원 살아있음에도 재결합이 힘든 현실 2019년은 오프 코스의 결성 50주년이 되는 해이므로 팬들은 50주년 재결합을 기대하고 있는 중...이었으나 현재까지도 아무런 소식이 없다.

해체된지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베스트 앨범이 나올 때마다 잘 팔려나가는 것은 그만큼 이들이 오랫동안 사랑받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2019년에 <OFF COURSE Classics>라는 커버 모음집이 발매되었는데, 여기에 카미시라이시 모네, 성시경 등 꽤나 쟁쟁한 가수들이 참여하였다.

2.2. 솔로 활동

오브코스 시절부터 솔로 활동을 시작했으나 89년 그룹의 해산 이후 솔로로서의 활동이 본격화.

파일:attachment/oh_yeah.png
1991년 일본 트렌디 드라마의 전설적인 작품으로 유명한 도쿄 러브스토리의 주제곡 'ラブ・ストーリーは突然に( 러브스토리는 갑자기)'가 270만장이 넘는 폭발적인 판매량과 함께 91년 연간 순위 1위를 달성하며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그 전까지의 드라마 주제곡은 드라마 속에서는 사용되는 일이 없었으며, 삽입이 되어도 목소리는 빠진 브금으로 흘러나오는 식으로만 사용되었으나 이 곡은 드라마의 진행 도중에 흘러나오는 방식으로, 이후 같은 방법을 사용한 곡들이 드라마의 주제곡으로 차용됨과 함께 드라마 + 주제가가 함께 히트하는 방식이 널리 쓰이게 되었다.

이후론 히트 메이커로써의 위치를 확고히 다지며 곡들이 차례로 히트. 초로의 나이임에도 나이가 믿어지지않는 섬세하고 감정적인 목소리로 현재까지 끊임없는 활동을 하며 젊은 세대와 중장년층 세대를 아울러 국민적으로 폭 넓은 인기를 얻고 있다. 일본에서는 이 사람을 국보급, 인간 문화재로 지정해야 한다는 말이 나돌 만큼 그야말로 살아있는 전설이 되었다.

CM의 타이업이나 타 아티스트들에게 악곡을 제공, 콜라보레이션하는 일도 하고 있다. 많은 가수들이 오다의 곡을 리메이크 하고있다. 동방신기가 리메이크한 ' 言葉にできない'도 유명하다. 라이브 시 환갑이 넘은 영감님이 청춘의 감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른 가수들의 트리뷰트에서 'lalala 말로 할 수 없어요' 부분에서 어떻게든 감정을 넣으려 테크닉적으로든 감정적으로든 시도하지만 원곡의 감성을 아무도 따라오질 못한다.

라이브 시 눈물 흘리는 사람이 속출하는 곡[19]. 기술이 다가 아니라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

미디어에 불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오브코스 시절부터 음악 방송을 비롯한 방송 매체의 출연 자체를 극히 꺼렸으나 오다가 메인으로 출연하여 제작되는 음악방송인 TBS 테레비의 ' 크리스마스의 약속'은 커다란 반향을 불러와 2001년부터 매년 방송되고 있다.

2007년에 싱글 こころ(마음)로 오리콘 싱글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한 최고령 아티스트가 되었지만 1년 만에 아키모토 쥰코에게 그 자리를 내줬다.[20]

3. 목소리에 대하여

남성이지만 가성을 전혀 쓰지않고 여성의 음역대까지 낼 수 있는 맑고 청아한 목소리가 가장 큰 특징이다. 오브코스 활동 초기에는 보컬이 여성이라고 착각했다는 사람이 꽤 있었다고. 평소 때는 노래할 때보다 상당히 저음의 목소리라 커다란 갭을 느끼는 사람이 많은데 "어떻게 하면 고음으로 노래를 부를 수 있나"라는 질문에 "나는 그저 샤우트하고 있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고음의 늘어짐과 목소리의 질량이 그의 천성적인 매력이다. 음의 흔들림( 비브라토)과 음정의 명확함도 목소리의 아름다움을 높혀주고 있다. 그리고 오다의 나이는 이미 만으로도 70이 넘었다. 철저한 자기관리 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축복 받은 성대라고 할 밖에.[21]

4. 에피소드

5. 레코드 및 판매 기록

6. 음반

6.1. 싱글

발매일 제목 순위 판매량 비고
1986.11.01 1985 15위 42,390장
1988.03.05 僕の贈りもの 37위 14,080장
1989.10.18 Little Toky 3위 220,340장
1989.12.01 君にMerry Xmas 6위 160,330장
1990.02.21 恋は大騒ぎ 5위 96,410장
1991.02.06 Oh!Yeah!/「ラブ・ストーリーは突然に」 1위 2,587,840장
1991.11.20 あなたを見つめて 6위 208,800장
1992.01.25 いつかどこかで 5위 359,910장
1993.03.05 緑の日々 19위 91,030장
1993.09.22 風の坂道 9위 90,930장
1994.07.16 真夏の恋 10위 168,580장
1995.01.25 so long my love 10위 88,490장
1995.11.22 君との思い出 23위 79,230장
1997.05.21 遠い海辺 24위 27,220장
1997.07.24 伝えたいことがあるんだ 8위 280,080장
1997.08.29 緑の街 7위 223,670장
1999.10.21 こんな日だったね 23위 27,510장
2000.03.23 woh woh 18위 51,560장
2001.03.07 風の街 22위 32,450장
2002.02.27 キラキラ 3위 280,080장
2004.02.25 まっ白 4위 84,467장
2005.05.25 たしかなこと 8위 62,007장
2007.04.25 ダイジョウブ 6위 76,738장
2007.08.15 こころ 1위 113,803장
2008.11.05 今日も どこかで 4위 52,407장
2009.02.25 さよならは 言わない 5위 44,352장
2010.11.17 グッバイ 15위 25,463장

6.2. 앨범

발매일 제목 순위 판매량 비고
1986.12.03 K.ODA - -
1988.03.05 BETWEEN THE WORD & THE HEART 3위 -
1990.05.09 Far East Cafe 1위 312,660장
1992.01.25 sometime somewhere 1위 650,610장
1993.10.27 MY HOME TOWN 2위 174,940장
2000.04.19 個人主義 4위 292,790장
2005.06.15 そうかな 1위 581,465장
2011.04.20 どーも 1위 261,606장
2014.07.02 小田日和 3위 186,620장 메이테츠의 CM송이 수록되어 있다.
2022.06.15 early summer 2022 - - 메자마시 테레비에서 2018.04〜2019.03까지 사용한 OP송인 会いに行く가 수록되어 있다.

6.3. 베스트 앨범

발매일 제목 순위 판매량 비고
1991.05.18 Oh!Yeah! 1위 1,221,730장
1997.11.21 伝えたいことがあるんだ 7위 223,670장
1996.02.01 LOOKING BACK 1위 597,350장 셀프 커버 앨범
2001.05.16 LOOKING BACK 2 1위 607,150장 셀프 커버 앨범
2002.04.24 自己ベスト[26] 1위 2,604,872장
2007.11.28 自己ベスト-2 1위 616,235장
2016.07.02 あの日 あの時 1위 438,219장[27]


[1] 건축학과 [2] 오다 카즈마사가 설립한 사무소로, 현재는 본인만 소속 되어있다. [3] 비슷한 부분들이 상당히 많다. 두 밴드 모두 추구하는 음악 스타일이 포크 송을 기반한 록 위주의 노래들이었고, 주축이 되었던 두 멤버들이 오랫동안 애증관계(...)였다는 것까지도 공통점이다. [4] 메이저 데뷔 전에는 관사 'the'를 붙였는데, 데뷔 뒤에는 뺐다. [5] 이 하모니카는 오프 코스 최대 히트곡인 '말로 표현할 수 없어'에서 진가를 드러낸다. [6] 상술했듯이 이 앨범 직전의 앨범까지 오프 코스는 말랑말랑한 어쿠스틱 음악 위주로 하는 듀오 그룹이었으나, 이 앨범을 기점으로 음악 스타일이 크게 변한다. 당시 앨범의 첫 트랙을 듣고 놀란 기존의 팬들도 여럿 있었을 정도. [7] 신승훈이 콘서트에서 (물론 일본어 원곡으로) 부른 적이 있어서 국내 팬들 사이에서도 유명하다. [8] 동방신기도 부른 적 있던 그 노래 맞다. [9] 이들은 뮤직 스테이션 같은 프로그램에 단발성 게스트로도 출연한 적이 한번도 없었으며, 사실상 짧은 인터뷰를 제외하면 이들을 TV에서 보는 건 하늘에 별따기만큼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0년부터 1985년까지 내는 정규 앨범마다 주간 1위에다 연간 톱10 안에 항상 들었으며, 1982년에는 오리콘 연간 앨범 판매량 1위를 달성하였던 것은 실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10] 후에 스즈키의 말에 의하면 1980년에 낸 정규앨범 'We Are'과 이듬해에 낸 'Over'를 합치면 We Are Over, 즉 우리는 끝났다라는 얘기가 되는데 이게 말 그대로 해체를 암시하는 제목이었다고 한다. 정작 그 두 앨범은 오프 코스 불후의 명반으로 꼽히는 음반들이라는 걸 생각하면 참 아이러니 하다. 그후 1983년도에 계약이 만료 되자 마자 스즈키는 탈퇴했고, 오다는 팀을 해체할까도 심각하게 고민을 하였으나 어떻게 1988년까지 유지가 되었다. [11] 사실 오프 코스의 전반적인 음악에 대해 아는 사람들은 다 알지만, 오다가 워낙 사기캐라서 그렇지(...) 스즈키는 다른 아티스트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음악적 역량이 결코 부족하지 않다. 오프 코스 당시 그가 작곡한 곡들 중에서도 '일 억번의 밤을 넘어서', '몇 개의 별 아래에서' 등의 곡은 오다의 곡들 만큼이나 팬들에게 사랑받고 있고, 타 가수들에게도 곡을 써서 줄 수 있을 정도로 실력있는 작곡가였으며, 기타리스트로써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실력을 가지고 있다. 어쿠스틱과 일렉트릭 기타를 유연하게 왔다갔다 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였다. 심지어 당시의 라이브를 보면 오다의 보컬보다도 더욱 안정적이었던 것이 스즈키의 기타였으니... 그야말로 존 레논 폴 매카트니가 먼치킨이라 그 재능이 상대적으로 묻혀버린 비틀즈 조지 해리슨과 같은 케이스다. [12] 해체 이후 현재까지도 포크 가수로 활동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가 어떤 음악을 추구했는지 알 수 있다. [13] 이 공연은 무려 10일에 걸친 무도관 공연의 파이널이다. 당시 닛산 스타디움, 도쿄 돔, SSA가 없었던 시절의 무도관의 위상을 생각해보면 이 밴드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실감할 수 있다. 이 6월 30일은 이제 오프 코스 팬들에게는 거의 기념일처럼 지정되어, 현재까지도 6월 30일이 되면 팬들이 무도관에 모여 오프 코스의 재결성을 염원하며 합창 라이브를 개최하곤 한다. [14] 여담이지만 후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 투어의 성공으로 인하여 오프 코스는 7월에 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의 앙코르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으나, 스즈키가 오프 코스로서의 활동을 끝마치고 싶어하는 의사를 강력하게 밝히는 바람에 불발되었다고 한다. [15] 유튜브 등지의 동영상 사이트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그 라이브 맞다. 참고로 이 공연의 막바지에서 드러머를 제외한 멤버 4명이 마이크 하나로 함께 그들의 대표곡인 Yes-No를 함께 웃으며 부르는 모습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물짓게 만든다. [16] 오다는 스즈키 없는 오프 코스는 상상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해산을 희망하였으며, 스즈키 탈퇴 이후 오프 코스는 어딘지 모를 위화감이 느껴졌다고 자서전에서 밝힌 바 있다. [17] 일본 hmv의 평론가 또한 오다 카즈마사라는 뮤지션은 대단하다고 인정하지만, '오프 코스'라는 밴드 내에서 사운드적인 측면에서만 봐도 스즈키의 공적을 무시할 수 없다고 평가하였다. [18] 5인조 마지막 공연일로부터 정확히 35년이 되는 해이다. [19] 라이브 영상을 보면 양 옆의 관객이 모두 눈물을 흘리고 있는 모습이 나타나기도 한다. 1981년도에 나온 노래가 2010년대 이후 영상에서도 화면에 나오는 눈물 흘리는 관객들 중 80년대 이후에 태어났을 법한 젊은 관객들이 꽤나 많다. 30년 가까이 된 노래가 아직까지도 이런 감동을 준다는 것이 대단할 따름. [20] 참고로 아키모토 쥰코의 당시 나이는 61세 7개월(···) 아무리 엔카 가수라고 해도 솔로 가수 한정으로 최고령인 것은 사실이다. [21] 물론 가수가 목을 유지하기 위해선 자기관리는 필수적이나, 오다의 음역대는 젊은 시절에 이미 웬만한 남성 가수들보다 한참 높았는데, 그런 그가 70을 넘어서도 그 음역대를 유지하는 건 철저하고 꾸준한 관리로도 힘들다. 나이들면서 금연까지 해가며 목소리를 잘 유지한 편인 조용필조차도 최근 콘서트에서는 일부 곡들의 키를 낮추어 부르는걸 보면 설명이 된다. [22] 이런 인연 때문인지 오다 카즈마사가 메인 출연하는 크리스마스의 약속에서 매년 단골 게스트로 출연중이다. [23] 사실 이 명반 목록은 여러모로 호불호가 갈린다. 당장 같은 포크계의 전설인 이노우에 요스이조차도 여기에 이름을 못 올렸을 정도니... [24] 11,12번선 상행에서는 기타 버전이, 13,14번선 하행에서는 바이올린 버전이 흘러나온다 [25] 이 앨범은 2002년에 발매한 앨범이다. 즉 15년동안 계속 찾는 사람이 있어서 재판을 찍고 또 찍고 했다는 소리다... [26] 2016년 1월 기준으로 출하량이 3밀리언을 달성했다! [27] 진행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