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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3 19:51:59

오노노 이모코

小野 妹子

1. 개요2. 생애3. 대중문화에서

1. 개요

일본 아스카 시대 호족이자 정치가. 외무부 장관 같은 위치였다. 어쩐지 일본 꽃꽂이의 시조로도 여겨진다. 여동생을 뜻하는 妹에 여자 이름에 쓰이는 코(子)가 합쳐진 이름 때문에 여자로 착각하기 십상이지만, 엄연히 남자다. [1]

2. 생애

쇼토쿠 태자(이 당시 천황은 고모 되는 스이코 덴노)가 수나라에 파견한 견수사의 리더격인 존재였으며 일본에서는 오오고 중국에서는 이뭐병 취급하는 '해뜨는 나라의 천자로부터 해지는 나라의 천자에게' (日出處天子, 書日沒處天子致)라는 외교적 도발 문서를 나르던 인물. 2, 3차 견수사로 활약했다. 파견 당시는 관위 12계의 5위인 대례였다.

일본서기에 이에 관한 에피소드가 있는데 중국 쪽 기록인 수서에 따르면 수양제[2]가 이 문서를 읽고 "얘, 남만 애새끼들 말하는 게 싸가지가 없다. 앞으로 얘네들 국서 접수하지 마." 하고 홍려경에게 지시했다는 기록이 《수서》에 있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 오노노 이모코가 수나라 사신 배세청과 함께 황제의 국서를 받고 오는 길에 들린 백제에서 분실하여 결국 천황에게 전달이 안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후대 역사학자들이 추정하기를 실은 전달하기 뻘쭘할 정도로 폭언들이 적혀 있어서 오노노 이모코가 일부러 파기하고 전달하지 않았다는 의견도 있다.

사실 의외로 수양제가 왜의 이런 '해 뜨는 땅의 천자, 해 지는 땅의 천자에게 글 보낸다' 운운하는 국서에 크게 의미 안 뒀을 수도 있는 것이 수 양제는 저 국서 받고 이듬해에 왜에 실제로 배세청을 사신으로 보내기는 했다. 사신이라고는 해도 관직이 문림랑 정도의 하급이라 그렇지. 자기 앞에서 웬 동쪽 끝 섬나라에서 “해 뜨는 나라의 천자” 운운하며 들이댄 왜를 수양제가 대단하게 생각했거나 위협적인 존재로 무마할 필요를 느꼈다기보다는 “별 웃긴 놈들 다 보겠네” 수준으로 잘 어르고 치우려 했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수양제 성격이 워낙 불같아서 있을 법하긴 하지만 어쨌든 믿거나 말거나다.

정확히는 일본서기 推古天皇 16年(608) 6월 조에 隋( 수나라)에 갔던 왜의 사절 오노노 이모코(小野臣妹子)가 수양제가 왜왕에게 보내는 국서(返書)를 소지하고 귀국하던 도중 백제에게 이를 강탈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소야신매자가 당에서 보낸 국서를 백제인에게 탈취당함 이를 통해 유추해보면 당시 의 대중국 독자 외교에 대해서 이유야 어찌되었든 백제가 굉장히 불쾌하게 생각 했던걸로 보인다.[3]

국서를 분실했다는 중죄를 범했음에도 잠깐 귀양갔다는 기록이 있을 뿐, 곧 특사로 풀려나고 대덕으로 승진한데다[4] 바로 그 다음 해에 다시 견수사로 파견됐다. 즉 오노노 이모코가 문서를 일부러 파기했든 제대로 가져왔든, 쇼토쿠 태자를 위시한 왜국의 수뇌부가 용서했다는 추측이 가능.

따지고 보면 이쪽도 쇼토쿠 태자가 벌인 짓에 당하고 있는 꼴이《 개그만화 보기 좋은 날》과 별 차이 없는 것 같은 같은 느낌도.

사실 후손이 더 유명한 사람으로 이사람의 후손이 바로 그 유명한 오노노 코마치다.

3. 대중문화에서



[1] 당시에는 코(子)가 남녀를 불문하고 쓰였다. 뒷날 후지와라씨의 시조가 된 나카토미노 카마타리의 본명 역시 '나카토미노 카마코(中臣鎌子)'였고, 동시대의 권력자 집안이었던 소가씨의 수장 역시 '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였다. [2] 바로 그 유명한 폭군 수양제다. [3] 노중국 교수도 당시 '백제의 국서 강탈 사건'을 왜의 독자적인 대중국 외교정책에 대한 백제측의 불만으로 일어난 사건이었다고 평가했다. 노중국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593년부터 603년까지 왜와 백제는 긴밀한 관계를 추구하였으나. 603년 이후 614년 사이에(실제로 일본서기에서도 602년 10월에서 615년 사이에 약 12년 동안 백제의 외교관계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변화가 나타난다는 점, 당시 성덕태자의 관위와 憲法 시행과 朝禮 개정 등의 일련의 정책, 607년 수에 전해진 왜왕의 국서에 ‘日出處天子’라고 했듯이 왜가 독자성을 강조한 점 등을 지적하면서, 국서탈취 사건은 왜가 선진문물을 직접 받아들이기 위해 대수접근을 적극적으로 시도하고 이에 수도 사신을 파견하는 등 호응하는 상황에서 이를 탐탁지 않게 생각한 백제가 양국의 관계를 파악하기 위한 의도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고 평가했다. [4] 참고로 대덕은 관위 12계의 제1위. 관위12계의 승진은 대단히 드문 일이었다. 원래 호족이긴 했지만. [5] 참고로 여기서의 정답은 오노노 코마치이다. 일단 성씨가 같고 오노노 이모코의 후손이 오노노 코마치이니까 아예 틀린셈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