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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국

이원국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folding [ 펼치기 · 접기 ]
파일:external/66.media.tumblr.com/tumblr_o72v3jpgxR1sqk8veo8_r2_500.png 1965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 MVP

MBC 청룡 등번호 29번
정순명
(1982)
이원국
(1983)
정순명
(1985)
}}} ||
파일:external/pds.joins.com/htm_20160503175322283533.jpg
에르네스토 카를로스 쿡 리
Ernesto Carlos Kuk Lee
한국명 이원국 (李源國) | Won-Kuk Lee
출생 1948년 5월 10일 ([age(1948-05-10)]세)
서울특별시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
[[멕시코|]][[틀:국기|]][[틀:국기|]]
학력 중앙중 - 중앙고 - 고려대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 입단 1966년 아마추어 자유계약 ( 도쿄)
1968년 국제 아마추어 자유계약 ( SF)
소속팀 도쿄 오리온즈 (1966~1967)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산하 마이너 (1968~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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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즈노 자이언츠 (1968~1969) / A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산하 마이너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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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메리 리벨스 (1970) / AA
밀워키 브루어스/ 몬트리올 엑스포스 공동 산하 마이너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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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슨빌 선즈 (1970) / AA
피라타스 데 사비나스 (1972~1973)
사라페로스 데 살티요 (1973)
미네로스 데 코아우일라-아세레로스 데 몽클로바 (1974~1980)
페트롤레로스 데 포사 리카 (1980~1982)
MBC 청룡 (1983)

1. 개요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2.2. 일본에서 미국, 멕시코로 가다2.3. 국내 복귀, 은퇴
3. 연도별 성적4. 은퇴 후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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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원조 풍운아 이원국을 아시나요?(중앙일보 기사)

한국계 멕시코 국적의 전 야구선수. 한국인 최초의 미국 진출 야구 선수. 메이저리거로 불리지 못하는 것은 그가 마이너 리그에서만 뛰었기 때문이다.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중앙중학교 3학년 때부터 주목을 받았다. 그가 중학교 3학년 말 10월에 중앙고등학교 입학 예정자 자격으로 서울시 고교야구 추계연맹전에 선을 보였는데 고교 선수들 모두가 깜짝 놀랐다. 그는 186cm의 큰 키에 80kg이 넘는 덩치로 당시 성인야구 선수들보다 커 타자들을 압도했기 때문이다.

1964년 중앙고에 진학한 이원국은 1학년 때부터 주전 투수로 활약하고 2학년 때는 제 19회 전국지구별초청고교야구대회( 황금사자기)에서 우승, 팀이 그 대회에서 처음으로 패권을 잡는데 공헌했다. 결승에서 그는 부산고를 만나 단 1안타만 내주고 동료인 유격수 이광환, 3루수 정동건 등의 호타호수비에 힘입어 7-0, 완봉승을 거두었다.

당시는 스피드건이 없어 구속을 측정할 수는 없었으나 150km/h 내외의 패스트볼로 성인 투수보다 빨랐다. 이원국과 비슷한 최고의 강속구 투수는 이후 최동원, 선동열, 박찬호 정도로 기억된다.

이광환은 “내가 대구에서 중학교에 다니다가 서울 중앙고로 오니 아주 순둥이 친구가 있더군요. 생기기도 어린애같아 덩치가 너무 커 무슨 야구를 할까 했는데 던지는 것을 보니까 놀랄 만큼 강속구였고 재주도 뛰어났어요. 잠깐 반짝했지만 계속했으면 아마도 대표팀 투수로 이름을 날렸을 텐데 갑자기 일본으로 가 또 한 번 놀랐죠”며 그를 기억했다.

2.2. 일본에서 미국, 멕시코로 가다

3학년에 올라간 다음 해 봄 이원국은 뜻밖의 인물을 만났다.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영화제에 참가한 일본 다이에이 영화사의 대표 겸 일본프로야구 도쿄 오리온즈의 구단주인 나가타 마사이치[1]가 이원국을 찾아온 것이다. 그 전 해 지구별 초청대회 우승 시 서울에 와 있던 나가타는 이 경기를 보고 이원국에게 반하여 스카우트에 나섰다.

파일:external/archive.today/a526ecbe64d79535ddc2c45a0536cb282a9a2549.jpg
도쿄 오리온즈 입단식에서의 이원국. 오른쪽은 구단주 나가타 마사이치.

재학 중이었던 그 해 6월, 이원국은 일본으로 건너갔고 졸업을 한 다음 해 봄 정식으로 오리온즈에 입단했다. 4년 전 백인천에 이어 두 번째로 일본프로야구에 진출한 대한민국 출생 선수가 된 것이다.[2] 등록명은 본인 이름의 한문을 일본식으로 발음한 리 겐코쿠이다. 오리온즈 2군에서 훈련하면서 경기에 나갔던 이원국은 새로 제정된 외국인선수 규정에 걸리고 일본선수들의 심한 견제로 1군 승격이 어려웠지만 가까스로 1967년 시즌 후반기에 1군에 승격하며 1967년 8월 19일 한큐 브레이브스 전에 1군 공식경기에 등판했지만 1.1이닝 2실점 평균자책점 18.00의 부진한 투구내용을 기록하며 이 경기가 일본에서의 처음이자 마지막 등판이 되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는 일본 리그에서는 양손 투수로 데뷔를 시도하였으나 이후에는 결과적으로 우완으로 전향하였다.

사실 1960년대 중반 샌프란시스코는 몇 명의 일본 선수들을 연수 차원에서 받았던 적이 있었다. 대표적인 선수가 1964년~5년 사이 메이저리그에서 20살의 나이로 활약한 일본 최초의 빅리거 무라카미 마사노리이며 이외에도 매년 자이언츠 애리조나 교육리그 캠프 (현재로 치면 루키 레벨 정도에 해당하는 느낌의 겨울캠프) 에 교류 형식의 연수가 팀과 무관하게 이루어져 왔었다. 도쿄 오리온즈는 이원국이 외인TO 신설로 붕 떠버리자 사실상 처분하기 위한 방법으로 이와사키 타다요시와 함께 연수 명목으로 이 샌프란시스코 겨울루키캠프에 보내버린다. 타다요시는 그해 바로 여름에 귀국해 1군에 곧 정착했지만, 이원국은 그 곳에 남아서 정착했다.[3] 이원국은 1968년 초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 마이너리그 계약을 통해 입단해 [4] 출전했다.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1968년 마이너리거가 된 이원국은 프레스노 자이언츠 (A) 팀에서 7승10패 ERA 3.94를 기록했으며 타석에서는 타율.166 1홈런을 기록했다. 만 20세로 어린 나이로 애매한 기록을 내서 싱글 A 재수를 택하게 된 이원국은 1969년에는 중계 및 마무리로 나와 5승5패 8세이브 ERA 3.44를 기록했으며 102이닝 106삼진의 좋은 투구를 보였다. 이 때문에 시즌 후 룰5 드래프트의 더블 A 단계에서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의 선택을 받았다. 이후 모종의 과정을 거쳐[5] 밀워키/몬트리올 공동산하구단 (AA) 잭슨빌 선즈에서 뛰었다. 1970년 만 22세의 이원국은 4승7패 ERA 3.71을 기록하였다. 이후 방출된 이원국은 여러 시도를 하던 중 멕시코행을 택하게 된다.

파일:external/www.iworldtoday.com/179325_53303_3758.jpg
피라타스 데 사비나스 시절.

1971시즌을 쉰 이후, 1972년 5월 멕시코 프로야구 리그[6]로 건너가 에르네스토 카를로스(Ernesto Carlos 또는, Ernesto Carlos Kuk Lee)라는 이름으로 개명하고 멕시코에서 11년 간 뛰었다.

1972년 피라타스 데 사비냐스에서 11승11패 ERA 3.27, 1973년 사비냐스와 사티요에서 16승 13패 ERA 2.30(리그 7위)을 기록하며 순식간에 그는 멕시코 최고의 투수 중 한 명이 되었다. 1974년 그는 미네로스 데 코아후이아로 이적하여 16승14패 ERA 3.08을 기록한다. 1975년은 그야말로 악운이 지배한 해였다. 7승 20패 (리그 다패 1위) ERA 3.33의 성적을 기록했다. 다음해 다시 반등한 이원국은 76년 16승9패 ERA 2.29(리그 11위) 및 212이닝동안 피홈런 5개의 경이적 기록을 냈다. 77년 16-10, ERA 3.51을 78년 13승13패3세이브 ERA 2.8을 기록하는 등 이원국은 꾸준히 프런트라인 선발투수의 재능을 보여주었다.

당시로서는 투수로 노장인 31세가 된 이원국은 멈추지 않았다. 37게임 35선발(리그1위) 24완봉 277이닝(리그 1위) 19승 14패 174삼진 70볼넷 ERA 2.53을 기록했다. 다만 피안타 수도 285개로 1위로 점차 나이가 먹어가며 피칭 스타일 자체는 맞춰잡는 유형으로 변해갔다. 그럼에도 1980년대 들어서도 그의 엄청난 기록은 멈출 줄 몰랐다. 1980년 몬클로바와 페트롤레로스 데 포차 리카에서 10승9패 ERA 3.38을 기록했으며 1981년에는 1981년 18승(리그 2위) 11패 ERA 2.36으로 노익장을 과시하며 엄청난 실적을 냈다.

1982년의 활약은 기록상으로는 매우 좋았다. 포차 리카에서 7승4패 ERA 1.98(리그 5위). 다만 기록에서도 보이듯 소화 경기 숫자가 많지 않았으며 이때 이미 약간의 노화 징후가 보이고 있었고 그가 83년 한국으로 복귀하는데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한편 당시 기록의 미비 문제인지, 어느 쪽에서인가의 해석의 문제인지 모르겠으나 통산 기록은 한국 측 기록과 멕시코 측 기록이 다른데[7] 한국 측 기록은 150승 85패, 멕시코/미국 측 기록은 336게임 149승 128패 8세이브 1126탈삼진 154완투 33완봉 통산 평균자책점 2.81이다. 윈터리그인 멕시칸 퍼시픽리그에서는 통산 16승 23패 평균자책점 2.97 161탈삼진을 기록했다. 멕시칸리그 평균자책점 2.81은 멕시칸리그에서 2000이닝 이상 선수 중 역대 4위라고 한다. (1-2위는 메이저리그 경력자) 그 실적에 걸맞게 최우수선수상, 철완투수상을 수상, 멕시코에서는 최고의 투수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2.3. 국내 복귀, 은퇴

텍사스에 거주하면서 일본계 2세 미국인 간호사 제인 리와 결혼한 이원국은 1982년 조국에 프로가 출범하자 다음 해 3월 MBC 청룡의 초청으로 17년 만에 귀국했다.[8] 35살의 최고령 멤버로 청룡에 합류한 이원국은 새로 팀을 지휘하게 된 김동엽 감독과 훈련 방식의 차이로 갈등을 느꼈다.

김 감독이 모든 선수들에게 새벽 5시부터 훈련을 요구하자 그는 “야간경기가 많은 프로선수들에게 이런 훈련은 무리이고 효과가 적습니다. 미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이 같은 연습을 하지 않습니다”며 시정을 요청했다. 당연히 현시점에서 본다면 이원국의 말이 백 번 옳은 말이지만 당시 한국야구계는 그런 걸 신경쓰지 않는 분위기였고 특히나 이종도, 이해창, 이광은, 김재박 등 몇 몇 고참 선수들을 제외하곤 나머지 선수들에게 혹독하게 기합을 주는 등 강력한 이미지로 나가던 김동엽 감독은 그말이 더욱 통하지 않을 이였다. 결국 김동엽은 이원국을 훈련과 경기에서 철저히 ‘왕따’를 시켰고 이로 인한 불규칙한 일정은 선수로선 황혼기인 30대 중반이었던 이원국에게는 치명타였다. 결국 그는 오른쪽 팔꿈치 부상을 당하며 주무기인 빠른 공을 봉인하고 컨트롤 위주의 투구를 해야만 했다.

국내에서의 성적은 8경기 1승 1패 4.42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였는데, 한가지 특기할 점이 있다면 유일한 1승이 완투승이다.

3. 연도별 성적

3.1. NPB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67 도쿄 오리온즈 1 1⅓ 0 0 0 - 0.000 18.00 2 0 1 0 2 2 2.25
NPB 통산
(1시즌)
1 1⅓ 0 0 0 - 0.000 18.00 2 0 1 0 2 2 2.25

3.2. MiLB

역대 기록(투수)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68 프레즈노 자이언츠(A) 31 162 7 10 0 - .412 3.94 143 17 95 139 88 71 1.42
1969 47 102 5 5 8 - .500 3.44 95 4 53 106 49 39 1.33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70 잭슨빌 선즈(AA) 30 114 11 11 0 - .500 3.27 111 9 42 65 55 47 1.30
MiLB 통산
(3시즌)
108 378 16 22 8 - .412 3.74 349 30 190 310 192 157 1.36
완투, 완봉 기록
연도 완투 완봉
1968년 7완투 2완봉
1970년 1완투 0완봉
MiLB 통산 8완투 2완봉

역대 기록(타자)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출루율 장타율 OPS
1968 프레즈노 자이언츠(A) 31 60 .167 10 1 0 1 5 3 0 1 .177 .233 .411
1969 47 19 .053 1 0 0 0 1 1 0 3 .182 .053 .234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출루율 장타율 OPS
1970 잭슨빌 선즈(AA) 30 34 .118 4 0 0 0 0 1 0 0 .118 .118 .235
MiLB 통산
(3시즌)
108 113 .133 5 1 0 1 6 5 0 4 .161 .168 .329

3.3. LMB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72 피라타스 데 사비나스 27 154 11 11 0 - 0.500 3.27 152 5 54 108 63 56 1.279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73 피라타스 데 사비나스/
사라페로스 데 살티요
33 176 16 13 0 - 0.551 2.30 163 6 56 115 63 45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74 미네로스 데 코아우일라 36 219 16 14 1 - 0.533 3.08 198 9 72 92 96 75 1.20
1975 33 200 7 20 1 - 0.259 3.33 210 8 58 96 98 74 1.32
1976 29 212 16 9 0 - 0.640 2.29 204 5 79 137 79 54 1.31
1977 33 205 16 10 0 - 0.615 3.51 204 16 82 140 96 80 1.36
1978 38 215 13 13 3 - 0.500 2.80 196 11 79 111 87 67 1.26
1979 37 277
(1위)
19
(1위)
14 0 - 0.575 2.83 285
(1위)
1980 아세레로스 데 몽클로바/
페트롤레스 데 포자 리카
19 138 10 9 0 - 0.526 3.39 157 2 59 48 67 52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81 페트롤레스 데 포자 리카 34 198 18 11 3 - 0.621 2.36
1982 17 109⅓ 7 4 0 - 0.636 1.98 103 3 42 29 35 24 1.27
LMB 통산
(11 시즌)
336 2103⅓ 149 128 8 - 0.537 2.81 80 1126

3.4. KBO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83 MBC 8 38⅔ 1 1 0 - .500 4.42 46 1 16 6 25 19 1.55
KBO 통산
(1시즌)
8 38⅔ 1 1 0 - .500 4.42 46 1 16 6 25 19 1.55

4. 은퇴 후

결국 이원국은 청룡에서 1983년 한 시즌 동안 8경기에 등판해 1승 1패, 평균자책점 4.42를 기록하고 다시 가정이 있는 미국으로 돌아갔다. 한국 프로야구 원조 먹튀[9]로 평가하는데 이원국의 그 당시 연봉은 1억원을 상회하는 한국 프로야구 최고 연봉이었다(무려 장명부보다 많았다.). 미국에서 그는 멕시코의 사비나스 팀 단장으로 2년간 근무하다가 손재주가 좋은 장점을 살려 텍사스 주의 샌안토니오 오스틴에서 건축 사업가로 활동하고 있다. 삼성의 오스틴 전자공장 건물 중 일부가 그의 회사에서 건설한 것이다.

현재 하와이에 거주 중이다.[10]

5. 관련 문서



[1] 그는 평소 허풍이 심해서 일본 야구계에서 나가타 나팔 이라는 별명으로 통했다. 기자들도 그의 말은 반 정도만 믿고 기사를 쓸 정도였으니. 또한 다혈질의 과격한 성격으로 1960년 일본시리즈 준우승 보고 차 찾아온 니시모토 유키오 감독에게 '이 멍청한 자식아' 라고 상소리를 퍼붓는 바람에 뚜껑이 열린 니시모토는 1년만에 다이마이 감독직을 내던졌다. [2] 일제 시대에 태어나서 도일하여 1940년대 일본프로야구를 경험한 선수는 몇 있다. 대표적으로 한국 야구 역사 초창기 발전에 많은 도움을 준 김영조 씨 등. [3] 이후 도쿄 오리온스는 롯데가 인수하면서 지바 롯데로 이름을 변경했고, 이원국과는 자연스럽게 이별에 성공했다. [4] 시카고 컵스 마이너리그 이야기가 있으나, 어떤 공식 기록에도 확인되지 않으며 한국 블로그에만 나오는 정보이다. [5]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타이거즈 AA 로스터 사정으로 인한 트레이드 내지는 선수 이동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6] 정확히는, 멕시코의 하계/동계(멕시칸퍼시픽리그)) 리그를 모두 뛰었다. [7] 다만 위의 상세한 미국 측 연도별 기록을 본다면 어느 쪽이 맞은지는 한국 측의 150승 85패는 실력과 관계 없이 너무 승수가 많은 느낌이기도 하고 일단 양측을 모두 기재한다. [8] 사실 이원국과 먼저 접촉한 건 해태 타이거즈였지만 계약금-연봉 협상이 결렬된 탓에(특히 이때도 나이가 걸림돌로 작용했다. 해태 입장에선 곧 은퇴할 것으로 보이는 30대 중반이 된 투수가 주라는대로 주기엔 본인들 자금 사정도 안좋았던지라 포기하는게 옳다고 판단했던 것.) MBC가 그를 데려올 수 있었다. [9] 다만, 먹튀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을 수 있는 것이, 1983년 시즌에서 부진했던 이원국은 1984년 시즌에서 부활하기 위해 절치부심하고 있었으나, MBC 청룡 구단에서 돌연 '연봉 60% 삭감'을 선언하는 바람에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