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초명 | 양월서(梁月瑞) |
자 | 문찬(文贊) |
호 | 칙헌(則軒), 초계(初桂, 草溪) |
본관 | 남원 양씨 |
출생 | 1844년 10월 20일 |
전라도
남원도호부 장흥면 천거리 (현 전라북도 남원시 쌍교동)[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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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07년 2월 13일 |
전라북도 남원성 | |
상훈 | 건국훈장 독립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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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양한규는 1844년 10월 20일 전라도 남원도호부 장흥면 천거리(현 전라북도 남원시 쌍교동)에서 아버지 양맹석(梁孟錫)과 어머니 파평 윤씨 윤종길(尹宗吉)의 딸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양맹석은 남원도호부의 이방(吏房)으로 있다가 1885년(고종 22) 종2품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제수되고, 사후 정2품 호조판서에 추증되었다.그는 등에 달 모양의 형체가 있어서 월서(月瑞)라는 초명으로 불렸다고 하며, 용모와 체구가 남다르게 뛰어났고 용력이 절륜했으며, 재물을 가볍게 여기고 호탕한 기질이 있었다고 한다. 1882년 임오군란이 발발하자, 그는 남원도호부사 심의두(沈宜斗)에게 청하여 장정 3백 명을 모집하여 곧 서울로 올라가 난군을 토벌하고자 하였으나 심의두가 만류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1891년에는 선략장군 부사과(宣略將軍副司果)에 제수되었고, 1892년 통훈대부 초계군사(通訓大夫 草溪郡事) 겸 내금위장(內禁衛將)이 되었으며, 곧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되었지만 사양했다.
1894년 동학 농민 혁명이 발발하자 의병을 일으켜 농민군을 토벌하려 했지만 자원하는 이가 별로 없어서 중지했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잇달아 발발하자, 그는 재산을 뿌려 동지를 규합해 의병을 일으키고자 했다. 그는 활, 화살, 총포, 탄환 등을 다수 모아 벽처에 깊이 간직하고 명산대천에 기도하여 의병을 일으킬 것을 도모했다. 하지만 얼마 후 아관파천이 벌어지면서 친일파 관료들이 숙청되었고 의병 활동을 중지하라는 고종의 칙서가 각지에 배포되자, 그는 의병 계획을 접고 자택에 은신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의 국권이 일제에게 넘어가자, 양한규는 의병을 일으켜 국권을 회복하기로 결심하고 천여 명의 의병을 모아 1907년 2월 12일 일제히 집합해 남원성으로 진격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남원 주둔 진위대의 장병들이 음력 연말 연시를 기하여 휴가로 나가고 성내의 병력이 적은 틈을 타서 성을 점령하고 무기를 접수하기 위한 것이었다. 양한규 휘하 100명을 위시하여 참봉 유병두(柳秉斗)의 군사 50명 및 진사 박재홍(朴在洪), 상인 양문순 등 많은 장병이 모여서 모두들 양한규를 대장으로 추대하고 그의 지휘를 따르기로 하였다.
1907년 2월 13일 새벽, 양한규는 군사를 지휘하여 남원성으로 진격했다. 이때 남아 있던 진위대 군사와 순검들이 모두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으며, 그중 적 경부(警部) 1명은 총탄에 맞아 중상을 입은 채 겨우 몸을 빼서 도망쳤다. 여기서 의진은 큰 격전 없이 남원성에 입성했고 진위대의 무기, 군수품은 모두 의병에 의해 접수되었다. 장병들은 달아나는 진위대를 추격했으나, 불행히 양한규가 유탄에 맞아 쓰러져 전사했다. 의진은 대장을 잃자 동요했고, 진위대는 그 틈을 타 대오를 정비한 뒤 반격을 가해 의진을 궤멸시켰다.
한편 양한규와 함께 남원으로 진군하기로 약조했던 고광순, 고광훈, 윤영기(尹永淇) 등은 양한규가 전사하고 남원 의진이 뿔뿔이 흩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재차 남원성을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양한규의 부장이었던 박재홍과 양문순은 모두 체포되어 경성으로 압송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양한규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