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4-17 13:59:26

야타노카가미

신기 야타노카가미 아마노무라쿠모노츠루기 야사카니노마가타마
실물 소재지
황거 검새의 방
대용품 소재지
황거 궁중삼전 현소
황거 검새의 방

일본어 八咫鏡

1. 개요2. 소재지3. 신화4. 명칭과 추정5. 일본 내 소문6. 대중문화 속의 야타노카가미

1. 개요

일본 신화에 전해지는 미쿠사노카무다카라(삼종신기) 중 하나. 야타의 거울. 야타노카가미가 돌거울이라고도 하고 쇠거울이라고도 하는데, 어느 쪽이 맞는지는 불명이고 제작년대도 불명. 하지만 아무래도 청동 재질일 가능성이 높다.

2. 소재지

파일:Ise_naiku.png
이세 신궁 내궁

원본은 이세 신궁 내궁에서 신체([ruby(神体, ruby=しんたい)])로 삼아 보관한다.
파일:Three_Palace_Sanctuaries.jpg 파일:external/takaoka.zening.info/Dsc_9701_m.jpg
야타노카가미의 카타시로를 모시고 있는 고쿄 궁중삼전 현소(賢所). 다이쇼 덴노 쇼와 덴노의 즉위식 때 삼종신기를 보관했던 교토고쇼 춘흥전(春興殿). 원래 야타노카가미의 카타시로를 모시는 현소가 있던 자리로, 메이지 시대에 철거됐다가 다이쇼 덴노의 즉위 때 춘흥전으로 부활했다.

삼종신기 중 야타노카가미와 아마노무라쿠모노츠루기는 카타시로(形代)라고 불리는 복제품을 만들었다. 이중 야타노카가미의 카타시로는 고쿄 궁중삼전(宮中三殿) 현소(賢所)에 모신다. 10-11세기에는 궁궐에 화재가 몇 번 일어났는데, 야타노카가미의 카타시로가 유(鈕)[1]만 남기고 녹아버린 적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후 카타시로를 새로 제작했다고 한다.

한국식 한자음으로 '팔지경'이라고 읽기도 한다.

3. 신화

일본서기≫ 권1 신대(神代) 상 7단의 본문에 따르면 스사노오가 천상계 타카마가하라(高天原)에서 깽판을 치다가 아마테라스를 다치게 하자, 아마테라스는 동굴에 들어가 돌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세상에는 태양이 비치질 않는 재앙이 일어났다. 신들은 어떻게 해야 아마테라스를 밖으로 나오게 할까 궁리를 했다. 그래서 아마노카구산(天香山)에서 나무를 뽑아 붉은 옥으로 만든 방울을 달고, 가운데 가지에 야카노카가미를 달고 천을 걸며 요란스럽게 꾸몄다. 그리고 신들은 모닥불을 피우고 시끌벅적한 소리를 내며 소란을 떨었다. 또한 아메노우즈메(天鈿女命)는 위로하는 춤을 추었다. 아마테라스는 '내가 여기에 숨었으니 하계에는 기나긴 밤이 이어질 것이다. 그런데 왜 아메노우즈메는 기뻐하며 춤을 추고 있을까?' 생각하며 의아하게 여겨서 슬쩍 돌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이때 타치카라오(手力雄神)는 돌문 옆에서 숨어있다가 아마테라스의 손을 잡고 재빨리 문 밖으로 끄집어내었고, 다른 신들이 문에 금줄을 걸어 다시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일본서기≫ 권1 7단의 일서 제2에 따르면, 아마테라스가 스사노오 때문에 동굴에 들어가 돌문을 닫고 나오지 않자, 신들은 여신을 끌어낼 방법을 궁리했다. 그래서 거울을 비롯하여 이런저런 물품을 만들었다. 아메노코야네(天兒屋命) 신이 돌문 앞에서 기도문을 외우자 아마테라스가 슬쩍 돌문을 열고 나왔다. 이때 거울을 동굴 안에 넣었는데[2] 이때 문에 닿아서 거울에 흠집이 생겼다고 한다. 여기서는 거울을 두고 "이세에서 모시는 대신大神"이라고 설명했다.

일본서기≫ 권2 신대(神代) 하 9단의 본문에 따르면, 황조신 타카미무스비[3]은 자기 외손자를 지상에 내려보내 다스리게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지상에는 아직 타카마가하라를 따르지 않는 세력이 있었기 때문에, 먼저 그들을 굴복시키고자 하였다. 그래서 사자를 보내 오오쿠니누시 신을 굴복시킨 뒤 내려보내기로 하였다. 그리고 이후 타카미무스비는 니니기를 이불로 싸서 내려보냈다. 여기서는 삼종신기를 전혀 설명하지 않고 그냥 타카미무스비가 이불로 싸서 니니기를 내려보냈다고 설명할 뿐이다.

그런데 9단의 일서 제1에 따르면, 지상에서 오오쿠니누시를 굴복시켰단 보고를 받은 뒤 아마테라스가 니니기를 내려보내면서 야타노가가미, 아마노무라쿠모노츠루기, 야사카니노마가타마를 하사했다고 한다.

9단의 일서 제2에 따르면, 천손강림 타카미무스비 신은 아메노오시호미미(天忍穗耳尊)[4]에게 땅 위로 내려가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아마테라스가 아들 오시호미미에게 보경(寶鏡: 보배로운 거울)을 하사하면서 이 거울을 아마테라스 자신이라고 생각하며 모시라는 신칙(神勅)[5]을 내렸다. 이를 두고 '보경봉제의 신칙(宝鏡奉斎の神勅)'이라고 한다. 그런데 오시오미미가 명령을 받고 하늘에서 내려가다가 아들 니니기를 낳자 그는 자기 대신 아들이 내려가게 해달라고 청했다. 그래서 니니기가 내려갔다고 한다. 이 부분에서 일본서기는 그냥 '보경'이라고만 설명하지만, 다들 이 거울을 야타노카가미라고 여긴다.

≪일본서기≫ 스진 덴노조에 따르면, 10대 스진 덴노 재위 5년(기원전 93년?)에 전염병이 돌아 많은 사람이 죽었다. 이듬해(기원전 92년?)에도 그 여파로 백성들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충돌이 일어났고 이를 다스리기 어려웠다. 스진 덴노는 아마테라스와 야마토노오쿠니타마를 궁궐에 모시면서 죄를 고백하고 제사를 지냈으나, 두 신을 두려워하여 궁궐 안에서 함께 지내기를 매우 부담스러워했다.[6] 그래서 장녀 토요스키이리비메(豊鍬入姬命)로 하여금 궁궐 밖에서 아마테라스를 모시며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7] 여기서는 그냥 두 신을 제사 지냈다고만 서술했다. 아마도 각 신을 상징하는 물건을 모셔놓고 제사를 지낸 듯한데, 아마테라스를 상징하는 물건이 야타노카가미였을 것이다.

≪일본서기≫ 스이닌 덴노조에 이런 내용이 있다. 11대 스이닌 덴노 재위 25년(기원전 5년?)에 스이닌 덴노는 아마테라스를 모시며 제사 지내는 직무를 누이 토요스키이리비메 대신 딸 야마토히메(倭姫命)가 맡도록 하였다. 야마토히메가 아마테라스를 모시기 좋은 터를 찾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이세국(伊勢國)에 닿았을 때 아마테라스가 신탁을 내려 알려주었다.
신풍(神風)이 부는 이세국(伊勢國)은 도코요(常世)[8]의 파도가 계속 밀려드는 나라로 주변 나라들이 부러워한다.[9] 여기에 머무르도록 하라.
야마토히메는 신탁을 받은 뒤에 이세에 신궁[10]을 지었는데, 그 자리가 아마테라스가 하늘에서 처음으로 내려온 곳이라고 일본서기는 말한다.

참고로 일본 각지에는 모토이세(元伊勢) 신궁이라고 불리는 곳들이 있다.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아마테라스가 이세 신궁 자리에 정착하기 전, 야마토히메가 각지를 떠돌며 임시로 신령을 모셨는데, 모토이세라 불리는 곳들이 잠시나마 아마테라스를 모셨던 터라고 한다. 아마도 야타노카가미를 모시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제사를 올리다가, 최종적으로 이세에 안착했다는 뜻일 것이다.

4. 명칭과 추정

야타노카가미(八咫鏡)란 이름은 '8아타의 거울'이란 뜻이다. 八(야)咫(아타)노鏡(카가미)를 줄여서 '야타노카가미'라고 부른다. 이름에서 드러나듯 원래는 특별히 큰 청동거울을 가리키는 일반명사였던 듯하나, 후에는 이세 신궁 내궁에서 모시는 '그 거울'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되었다.

여기서 '아타(咫)'란 글자를 한국 한자음으로는 '지'라고 읽는데, 8치(0.8척)을 가리킨다. 2세기 중국 후한 시절의 서적 설문해자는 지(咫)를 부인네들의 손길이[11]로 주척(周尺) 8치라고 설명했다. 주척이란 중국 주나라에서 사용하던 길이 단위 (尺)를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주척을 중국 한나라의 척과 같다고 간주해서 1척이 23 cm라고 본다.[12] 이 기준에 따르면 1지는 23×0.8 = 18.4 (cm)가 된다.

그런데 설문해자가 지(咫)를 설명하며 쓴 주척(周尺)이란 단어를 일본에서 '주나라의 척'이 아니라 '원 둘레(周)를 재는 척'이란 뜻으로 해석했다는 설이 있다. 지름 1척짜리 원의 둘레가 4지라고 한다. 원주율이 약 3.14인데, 직경 1척짜리 거울의 둘레가 4지(32치 = 3.2척)라면, 원의 직경과 둘레의 비가 1:3.2로 실제 원주율의 근사값이 된다.[13] 이 설을 따르면 야타노카가미, 즉 '둘레가 8아타인 거울'이란 명칭은 지름 2척(약 46 cm)짜리 둥근 거울을 가리킨다.

그리고 일본에서 정말로 딱 이 정도 크기인 청동거울이 발굴되었다. 1965년 일본 후쿠오카현 이토시마시 히라바루(平原) 유적의 고분군에서 지름이 46.5 cm에 달하는 대형 청동거울이 나온 것이다. 대략 3세기 일본 야요이 시대 후기에 제작된 물건이라고 추측한다. 거울의 뒷면에는 동심원 여러 개와 8머리 꽃 같은 무늬가 있는데, 당시 중국 후한에서 유행하던 청동거울의 형상을 따라 고대 일본인들이 히라바루 유적의 거울을 만들었다고 추정한다. 처음에는 청동거울을 제작할 기술이 없었으나, 한반도나 중국에서 들어온 동경을 접한 이후로 제작기술을 받아들여 제작한 듯하다.

양식이 거의 같은 거울이 중국은 물론 한반도의 낙랑고분에서 종종 발견되는데, 중국이나 한국에서는 연호문경(連弧文鏡)이라고 부름이 보통이다. 거울 뒷면에 활 모양 호(弧)가 연이어서 문양을 만들기 때문이다. 이런 거울을 일본에서는 내행화문경(内行花文鏡), 즉 안쪽에 꽃 무늬가 있는 거울이라고 부른다.[14] 히라바루 유적의 거울은 연호문경들 중에서도 유독 크기 때문에 주목받는데, 다른 발굴품과 함께 2006년 '후쿠오카현 히라바루 방형주구묘 출토품(福岡県平原方形周溝墓出土品)'이란 이름으로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었다. 내행화문경 자체는 일반명사이기 때문에 해당 거울을 '국보 내행화문경' 또는 '히라바루 유적의 내행화문경' 등으로 부르곤 한다.

히라바루 유적을 발굴한 재야 고고학자 히라다 다이로쿠(原田大六 1917-1985)는 저서 《실재하는 신화実在した神話》(1966)에서 히라바루 유적의 청동거울이 야타노카가미와 사실상 같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단순히 히라바루 유적의 청동거울의 크기가 딱 8지라서가 아니다. 신도오부서(神道五部書)라고 불리는 서적 5종이 있다. 전하기로는 나라시대에 쓰였다고 하지만, 현대 일본 학자들은 신도오부서를 13세기 이세 신궁 외궁의 신관 와타라이 유키타다(度会行忠)가 외궁의 위상을 높이고자 자기 이름을 숨기고 집필한 서적이라고 추정한다. 신도오부서 중 《어진좌전기御鎮座伝記》[15]란 책에는 야타노카가미를 묘사한 구절이 있다. 도대체 외궁의 신관이었던 와타라이가 야타노카가미를 어떻게 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어진좌전기》에서 묘사한 바에 따르면 야타노카가미는 원형 거울인데 8머리 꽃과 8잎이 있는 형상에 바깥에는 태양을 8개 그렸다고 한다. 히라다는 《어진좌전기》가 묘사한 바가 히라바루 유적에서 발견된 내행화문경의 뒷면 모양과 똑같다고 판단했다. 8머리 꽃과 8잎이란 내행화문경 중앙의 꽃 문양이고, 태양을 8개 그렸다는 것은 꽃 문양 바깥에 새긴 동심원 여러 개를 뜻한다는 것이다.

히라다는 또다른 기록도 보강근거로 들었다. 804년 편찬된 《황태신궁의식장皇太神宮儀式帳》, 927년 편찬된 《연희식延喜式》의 <이세대신궁식伊勢大神宮式>에 나온 기록에는 이세 신궁에 있는 야타노카가미를 보관하는 상자의 안쪽 너비가 1척 6치 3푼이라고 기록했다. 당시 일본에서 사용하던, 한 척이 약 30 cm인 자에 맞추어 환산해보면 약 49 cm가 나온다. 이 정도 너비는 지름 46 cm짜리 원형 동경을 넣기에 딱 알맞는다.

이세 신궁 내궁에 봉안한 야타노카가미 실물은 공개하지 않으므로 히라다의 주장이 사실인지 확인할 길은 없다. 하지만 상당히 설득력 있기 때문에 야타노카가미를 추측해보는 자리에서는 꼭 언급되곤 한다.

한중 학계는 연호문경(내행화문경) 뒷면의 무늬가 햇빛을 표현했다고 추측한다. 만약 이 추정이 사실이라면 상당히 의미심장한 가설을 세울 수 있다. 고대 일본인들이 청동 거울이란 외래문물을 좋아해서 기술을 받아들여 국산화하였는데, 햇빛을 반사하고 햇빛을 형상화한 문양을 넣은 대형 연호문경을 주조해서 태양신 아마테라스의 혼이 깃든 신물로 삼았다고 짐작해봄 직하기 때문이다.

다양한 명칭과 표기법이 있는 다른 신기[16]와 달리 야타노카가미는 하나의 명칭, 하나의 표기법만 사용한다.

5. 일본 내 소문

메이지 덴노가 재위 2년(1869)에 이세 신궁을 몸소 참배했는데, 7세기 말 지토 덴노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일본에서는 이때 메이지 덴노가 야타노카가미 원본을 친견했다는 말이 있다. 원칙대로라면 메이지 덴노 외에는 천황조차도 못 봤을 것 같기는 한데, 일본에서는 은근히 '야타노카가미를 봤다.'는 소문이 도는 이들이 있다.

일본의 초대 문부대신 모리 아리노리(森有礼, 1847-1889)가 현직 대신 시절에 어떻게 이세 신궁의 궁사(宮司)를 구워 삶아서 야타노카가미를 보았는데 거울 뒷면에 히브리 문자로 "나는 있는 나다."[17]라는 구절이 씌었더라는 소문이 있다.

소문은 계속 이어진다. 해군대좌 야노 유타로(矢野祐太郎, 1881-1938)[18]가 이세 신궁의 궁사에게 사정사정해서 궁사가 남 몰래 보여주었는데 정말로 히브리 문자가 있었다는 둥,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이 1953년 정말로 야타노카가미의 뒷면에 히브리 문자가 있는지 확인해보려 했다는 둥 여러 가지 썰들이 있다. 다카히토 친왕이 확인해보고 싶다는 말을 공개적인 자리에서 하긴 했다는데, 실제로 시도했는지 등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초대 문부대신 모리 아리노리가 야타노카가미 원본을 직접 보았다는 말은 생전에 받았던 중상모략에 기반한다. 모리는 '영어 공용어화'를 주장했을 정도로 매우 급진적인 개화론자였다. 그래서 그는 실제로는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 신자'라느니 '학교에서 그리스도교를 가르치려 한다.'[19]느니 하는 모함을 받았다. 또한 당시 일본에서는 크고 유서 깊은 신사, 특히 이세 신궁이 달력을 만들어 배포했는데, 이는 해당 신사 입장에선 상당히 큰 수입원이었다. 그런데 모리는 달력을 만들고 배포하는 일을 대학에 맡기려고 했기 때문에 신토 관계자들에게 미움을 많이 받았다.

그는 1887년 이세 신궁을 참배했다. 그런데 통상적인 신토의 예법을 지키며 외궁을 참배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궁을 참배한 어느 대신이 배전의 문에 늘어트린 발을 지팡이로 걷어 올려 안을 들여다 보고 신발을 신은 채로 배전에 올라가는 불경을 저질렀다.'는 신문 보도가 나왔다. 신문에서는 그 '대신'이 누구인지는 말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다들 모리라고 생각했다. 사실이 아니었지만 이 일로 극우 인사들에게 찍혀버렸다.[20] 1889년 2월 11일 모리는 문부대신으로서 대일본제국 헌법 반포행사에 참석하고자 관저를 나섰다가 니시노 분타로(西野文太郎)라는 극우 청년에게 칼로 공격을 받아 이튿날 사망했다.

모리 아리노리가 야타노카가미를 봤다는 소문은 여기서 나왔다. '그리스도교 신자라서 신토를 존숭하지 않는 모리라면, 내궁을 참배했을 때에도 야타노카가미를 함부로 보려는 무례를 저지르지 않았을까? 그리고 히브리 문자도 그라면 알아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하지만 모리는 실제로는 외궁을 참배했고 그리스도교 신자도 아니었을뿐더러 히브리어를 공부한 적도 없었다.

아무튼 야타노카가미 뒷면에 히브리 문자가 있다는 카더라는 음모론이나 오컬트 방면에 관심 있는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꽤 유명한 이야기이다.

6. 대중문화 속의 야타노카가미


[1] 옛날 거울의 뒷면에 있는 고리. 유(鈕) 자는 도장의 손잡이 부분을 가리키는 한자로도 쓰인다. 鈕를 뉴(유)라고 읽음은 일본식이 아니라 한국식이다. [2] 일본서기에서도 자세한 설명은 없고 그냥 '굴 안에 넣었다.'고만 말한다. [3] 아마테라스가 아니라 타카미무스비를 황조신(皇祖神)이라고 설명했다. [4] 아마테라스가 동생 스사노오와 우케이(점의 일종)를 하는 동안 태어났다고 하는 신이다. [5] 신이 내린 명령이란 뜻이다. 칙(勅)이란 한자가 원래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내리는 명령을 가리킨다. 중국에서는 5-6세기 남북조시대 이후로 황제의 명령을 가리키는 뜻으로 사용했다. [6] 고대의 관념에서 신성한 것은 곧 위험한 것이다. 신성한 것을 합당하게 대하지 않으면 도리어 재앙을 받는다고 여겼다. 그러므로 신성한 것을 자기 사는 집(궁궐)에 두었으니 스진으로서는 좌불안석이었을 것이다. [7] 야마토노오쿠니타마는 다른 곳에 따로 모시도록 하였다. 이를 모신 곳이 나라현 텐리시의 오야마토 신사라고 한다. [8] 일본 신화나 고대 민속에서 말하는, 바다 건너편에 있다는 낙원, 이상향을 가리킨다. 신화에서 흔히 보이는 타계(他界)의 한 종류다. 일본의 민속에서는 타계를 흔히 산 속이나, 혹은 바다 너머에 있다고 상상한 반면, 궁중에서는 천상계에 타계가 있다고 믿었다. 타카마가하라야말로 야마토 조정의 궁중에서 믿었던 천상계 타계이다. [9] 이세를 현세와 타계의 중간쯤에 위치한 곳, 타계에 가까운 곳으로 보는 것이다. 이 문맥에서는 이세를 도코요라는 '해상 타계'와 가까운 곳이라고 하는데, 아마테라스는 천상 타계인 타카마가하라의 군주다. 이 부분은 야마토 조정의 포섭 이전부터 존재했던 민간 신앙의 성소를 야마토 조정이 포섭하려 한 역사가 신화에 남았다고 볼 수 있다. 야마토 조정의 포섭 이전에는 바다 건너편에서 이세로 신이 건너왔으므로, 그곳에 종교시설을 세웠다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10] 정확히는 지금의 내궁 [11] 엄지와 중지를 벌린 한 뼘의 길이를 말한다. [12] 현대 중국에서는 실제 주나라 시절의 1척이 19.1 cm였으리라고 추정한다. [13] 둘레가 π척일 테니 1π척 = 4아타는 즉 1아타 = π/4척 ≒ 0.785척이다. [14] 일본에서 '연호문경'은 학술적인 글에서만 소수 쓰일 뿐, '내행화문경'이란 용어가 학계와 일반 대중 사이에서 널리 사용된다. [15] 정식명칭은 《이세이소황태신어진좌전기伊勢二所皇太神御鎮座伝記》이다. [16] 아마노무라쿠모노츠루기는 쿠사나기의 검, 쿠츠나기의 검, 도모예대도, 팔중원검으로 다양한 이름이 있고 야사카니노마가타마도 팔척경곡옥, 팔척경구옥, 팔척구총으로 표기 한다. 발음은 모두 야사카니노마가타마. [17] 탈출기(출애굽기) 3장 14절의 구절. 모세가 자기 앞에 나타난 에게 '제 동포들이 그분(신)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제가 무어라 답해야 하겠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신이 답한 구절이다. [18] 1917년 오모토에 입교하고 1923년 해군에서 퇴직했지만 불경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후 오모토의 성사(聖師) 오니사부로와 함께 몽고로 가 선교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후 어떤 이유로 오모토를 떠났다. 아마츠교(天津教)라는 종교단체에도 가입했던 듯하다 금방 떠나고, 1934년 신정룡신회(神政龍神会)라는, 우익+종교적인 성향이 매우 짙은 단체를 만들었다. 신정룡신회는 오모토와 아마츠교의 영향력이 둘 다 배여 있었다고 한다. 또한 이세 신궁의 야타노카가미는 가짜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천황을 숭상하고 국수주의적이었지만 메이지 덴노까지만 인정하고, 어처구니없게도 쇼와 덴노는 천황으로서 올바르지 못하다고 거부했다고 한다. 이유는 천황으로서 세계를 지배하고 신정(神政)을 복고해야 할 사명을 제대로 자각하지 못했다는 것. 그래서 이미 1932년 즈음부터 특별고등경찰의 요주의 인물이었다. 자기가 신령에게 계시를 받는다고 주장하며 글을 써서 유명 인사들에게 돌렸는데, 심지어 쇼와에게도 보내는 데 성공했다. 1936년 불경죄로 체포되었지만 혐의가 뚜렷하지 않아 계속 구금된 와중에 1938년 사망했는데, 독살되었다는 의혹이 있다. [19] 1873년까지 일본에서 그리스도교는 금지되었고, 그 뒤로도 국가신토와 충돌하는 등의 이유로 불온사상 취급을 받아 비공식적 탄압을 많이 받았다. [20] 후일 모리의 비서관은 모리가 이세 신궁에서 불경을 저질렀다는 모함이 '이세 신궁 신직의 수작질'이라고 증언했다고 한다. [21] 일어 독음으로는 스이텐닛코아마테라스야노시즈이시 [22] 그런데 연출은 잠시 흡수 후 방출하는 듯한 모습으로 표현 된다. [23] 변신 아이템인 오브링이 야사카니노마가타마, 오브 오리진의 무기인 오브 칼리버가 쿠사나기노츠루기에 대응한다. 본작 자체가 일본 신화를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심지어 최종보스의 이름조차 '마가타노오로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