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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34:59

안현수/대한민국 선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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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주니어 시절3. 2001-02 시즌4. 2002-03 시즌5. 2003-04 시즌6. 2004-05 시즌
6.1. 월드컵 시리즈6.2. 2005 인스브루크 동계 유니버시아드6.3. 2005 세계선수권
7. 2005-06 시즌8. 2006-07 시즌9. 2007-08 시즌10. 2009-10~2010-11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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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여기서는 안현수가 한국 국적이었을 당시의 시절을 서술한다.

안현수의 커리어에서 황금기라고 할 수 있는 기간으로 이 기간 동안 올림픽 3관왕 업적을 제외하고도 세계선수권에서 쇼트트랙 주요 이벤트라 할 수 있는 500m, 1000m, 1500m 개인 3종목에서 무려 금메달 9개를 획득했다. 전체 18번의 경기에서 메달을 따지 못했던 적은 단 3번 뿐이며 결승 진출에 실패했던 적은 딱 한 번뿐이다.

2003년부터 2007년까지 세계선수권 5연패를 하는데 이는 5년 연속 세계선수권 종합 우승자였다는 뜻이다. 말이 쉽지 5년이면 보통 국가대표 선수들의 세대 교체가 이뤄질 정도의 시간이고 특히 한국처럼 쇼트트랙 인재들이 수두룩한 곳에선 더더욱이다.[1]

2003 세계선수권을 시작으로 2007 세계선수권까지 남자 선수로 사상 최초로 5년 동안 종합 우승을 했다. 초반에는 미국의 아폴로 안톤 오노와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으나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그가 그야말로 미친 성장을 거듭하면서 둘의 실력 차는 굉장히 벌어지게 됐고 이것은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에서 제대로 실력을 보여주어 증명시켰다.

2. 주니어 시절

대부분의 재능이 있는 선수들이 중학생 때 두각을 나타내지만, 안현수는 초등학생 때부터 재능을 보였다. 명지초등학교 1학년과 4학년 때부터 동계체전에서 우승했다. 중학생과 고등학생 때는 각각 동계체전 3연패 및 고등부 1위를 하며 천재 스케이터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먼치킨적 재능은 이미 어릴 적부터 드러났던 셈이다.

3. 2001-02 시즌

3.1. 2002 주니어 세계선수권

1000m와 1500m에서 우승하며 종합 우승을 달성했다. 당시 이경기 해설을 맡았던 전이경은 안현수에 대해 이렇게평가했다. "안현수를 보는 순간 그만 입이 딱 벌어졌다”며 "안현수의 스케이팅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을 만큼 테크닉이 뛰어나다" #

3.2. 빙상연맹 국가대표팀 선수 추천제

당시에는 빙상연맹 선수 추천제가 있었다.[2]세간에 가장 유명한 것은 안현수의 2002년 솔트레이크 올림픽 특별차출이다. 하지만 안현수만을 위한 특별한 특혜가 아닌 안현수가 국가대표가 되기 이전부터 존재했던 선수 선발 시스템이었다. 이는 빙상연맹 지도부나 감독이 1~2명의 선수를 따로 추천하는 제도였다. 재능 있는 신예 선수에게 경험과 기회를 주거나, 뛰어난 선수가 아쉽게 탈락했을 경우, 선수가 부상을 입었을 경우 구제해주는 장치로도 쓰이기도 했다. 또한 대표팀의 후순위 선수들이 연맹추천선수로 국가대표 팀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이것을 사용해서 2002년 대한빙상연맹 지도부들은 부상당한 선수대신 안현수를 국가대표팀에 추천하였고, 이 추천제 시스템으로 당시 감독이었던 전명규는 안현수를 대표팀에 연맹 추천선수로 발탁한다.

추천제는 1995년 당시 대한빙상연맹 회장이었던 장명희가 채지훈, 김소희, 전이경을 국가대표 선발전 결과가 아닌 유니버시아드 대회의 성적으로 대표팀 선수 자격을 주면서 시작되었는데, 시작부터 갈등이 있었다. 당시 이준호, 박세우 등의 7명의 선수들은 선발전을 거부하며 항의하기까지 하였다. # 하지만 이 추천제도는 2005년 토리노 올림픽 국가대표 선발까지 사용되었으며, 대한빙상연맹 특별 추천제로 인해서 이호석 최은경이 올림픽과 세계선수권 개인전 출전자격을 얻었다. 2006년 대한빙상연맹 특별 추천 선발선수제도는 파벌싸움이 본격 수면 위로 노출되면서 사라진다. #

3.3.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특별 차출 논란

안현수는 솔트레이크 국가대표 선발전에 참가하지 않았다. # 즉 올림픽 출전 자격이 없었다. 하지만 안현수의 재능을 눈여겨본 연맹 윗선 당시 빙상연맹 회장 박성인과 부회장 유태욱 (비한체대)의 대표팀 추천과 주니어 세계 선수권에서 직관후 재능을 눈여겨 본 전명규 감독에 의해 감독 추천 특례 로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대표팀에 차출되어 미국으로 향할수 있었다. #1 #2 원래 국가대표 팀 멤버 중에서 이재경이 부상으로 이탈하게 되자 대체 선수를 선발하는 과정에서 안현수에게 기회가 가게된것이었다. #

안현수의 역할을 모두가 5000m 계주 멤버로 예상하였으나, 전명규 감독은 개인전에 뛸 선수로 히든카드로 안현수를 선택하였다. 이로 인해 당시 세계 정상급 선수였던 민룡[3] 이승재는 안현수에게 1000m 출전권을 넘겨줘야 했다. 빙상연맹에서는 시니어에서도 월드컵 랭킹 2위로 충분한 자격을 갖춘 선수였던 이승재를 추천했으나 전명규는 안현수의 출전을 주장했다. # 이승재에게는 500m 출전권이 주어졌다.

이 동계 올림픽은 안현수의 첫 시니어 무대이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이때의 안현수의 기량을 갖고 있는 국내의 어린 선수가 없다고 평가될 정도로 당시 기량 자체는 좋았다. 당시 감독이던 전명규와 주니어 때부터 지도를 맡았던 김기훈의 (당시 KBS 해설위원) 말에 따르면 대담한 근성과 재치있는 경기운영, 부드러운 스케이팅와 테크닉은 이미 세계적인 수준이었다. # 문제는 시니어 국제무대 경험이 전혀 없었던 것이었다.

1000m에선 결승 진출까지 하여 쇼트트랙을 보는 모든 이들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당시 체구가 굉장히 왜소했기때문에 가벼운 체중 과 기술을 이용한 스케이팅으로 꽤나 선전했다. 결승에선 아폴로 안톤 오노와 리자준과 같은 강호를 상대로 레이스를 펼쳤다. 전략은 선두를 지키다가 앞으로 나오는 선수를 견제하는 것이었으나 당시 힘, 체력, 체구가 모두 딸렸기 때문에 힘든 작전이기도 했다. 당시 안현수의 약점으로 지적됐던 것이 웬만한 여자 선수들보다도 왜소한 체격 (164cm, 53kg) 때문에 몸싸움에 약하다는 것이었다. #

경기 막판 오노와 리자준에게 추월당하고 3위로 뒤에서 바짝 따라붙었다가 앞에서 몸싸움으로 깽판을 치는 이 둘을 피해 인코스로 추월하려다 오노가 안현수의 다리를 손으로 쳤다. 안현수가 중심을 잃으면서, 미끄러지는 순간, 안현수의 팔이 오노의 몸을 휘감듯 걸었다. 결국 오노도 미끄러졌다. 이 둘이 자빠지면서 바로 뒤에 있던 마티외 튀르코트도 휩쓸려 연쇄충돌이 일어났다. 리자준은 이들의 3중 충돌이전에 미끄러지는데, 그때 안현수의 스케이트를 건드린다. 자빠진 이후 오노와 마티외 튀르코트가 메달의 획득을 위해 정신없이 움직인 반면 국제 무대 경험이 전무했던 안현수의 반응은 느렸고 4위로 들어왔다. #[4]

이 싸움 덕분에 꼴찌로 레이스하다 들어온 호주 스티븐 브래드버리가 어부지리로 금메달을 받았다. 은메달은 오노 동메달은 마티외 튀르코트가 목에 걸었다. 이후 5000m 계주에서는 민룡이 부상을 당해 실려가자 재경기를 예상한 전명규가 민룡 대신 투입을 시키려 했으나 재경기가 이루어지지 않아 계주에 출전하진 못했다. 민룡의 부상으로 1500m 개인전 출전권이 비게되었는데 이승재가 아닌 안현수가 출전자격을 얻는다. 하지만 준결승에서 실격당했다.

이때 감독이었던 전명규는 안현수의 개인전 출전을 강행하면서 전략이 노출되지 않은 히든 카드라고 하였다. # 전명규의 이 발언과 이후 2002년 세계선수권에서의 안현수의 역할을 본다면, 실제 안현수의 2002년 올림픽에서의 역할은 페이스메이커 혹은 전략 카드 였을 가능성을 추정해볼수 있다. 하지만 1000m에서는 김동성이 결승진출 실패, 1500m에서는 안현수가 실격되었다. 또한 김동성과 안현수는 결승전 포함 2002년 올림픽에서 단 한번도 서로 같은조인 적이 없었다.

3.4. 2002 세계선수권

민룡이 여전히 부상으로 세계선수권에 참가하지 못하게 되자 개인전 출전권은 차순위 선수가 아닌 안현수에게 돌아갔다. 1500m와 500m에서는 결승진출에 실패했으나, 1000m에서 김동성에 이어 은메달을 따면서 슈퍼파이널에 진출했고, 슈퍼파이널에서도 2위로 들어왔다. 계주에서는 4번 주자로 참가했는데 마지막 차례에 1번 주자를 밀어줄 때 넘어지는 실수를 했고 캐나다와 한국의 격차가 벌어졌다. 다행히 개인전을 모조리 석권하며 미친 기량을 선보이던 김동성이 캐나다의 마지막 주자를 다 따라잡아 끝내 날내밀기 경합에서 승리하였다.

당시 안현수는 1000m 3000m에서 김동성과 호흡을 맞추면서 외국선수들을 마크해냈다. 안현수는 계주 금메달과 개인전 은메달 3개를 수확하면서 첫 세계선수권 출전이란 말이 무색하게 대회 종합 준우승을 거머쥐었다. 그리고 김동성은 전관왕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2002년 세계선수권 당시의 언론보도를 보면 다음과 같다.
이날 1천m결승에 나선 김동성은 6바퀴를 남기고 선두로 올라선 뒤 안현수(신목고)와의 절묘한 협조로 나란히 1,2위로 골인했다. 기세가 오른 김동성은 3천m에서도 안현수와 호흡을 맞추며 5분19초041의 기록으로 우승했다. #

4. 2002-03 시즌

4.1. 국가대표 선발전

1500m에서 우승 했지만 상위 4명에 들어가는데 실패했다. # 그러나 당시에는 연맹 추천 선수 2명이 추가로 대표팀에 합류하는 규정이 있었기 때문에 무릎부상으로 선발전에 불참한 김동성과 안현수가 추천되었다. #1 #2 안현수는 대표팀에 승선했지만 김동성은 합류하지 않았고, 아시안게임에 참가하는 선수들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민룡이 김동성 대신 합류했다. #

4.2. 월드컵 시리즈

당시에는 김동성이 없는 남자 대표팀에 대한 의구심이 많았지만, 안현수가 한국에서 열린 1차 월드컵에서 개인전 종목을 싹쓸이하며 맹활약을 펼치며 자연스럽게 에이스자리를 이어받는 구도가 되었다. # 안현수의 성장은 에이스 김동성의 부상과 맞물려 더욱 빛을 발하였다.

다만 아폴로 안톤 오노가 솔트레이크 1500m 사건을 의식해 1차 월드컵 불참을 선언하면서 오노와의 맞대결은 훗날로 미뤄졌다. 한국 대표팀의 차세대 에이스로 인정받는 분위기였기는 했지만 이후 월드컵에서는 최대강적이라 할 수 있는 오노나 리자쥔 같은 당시 최강자들과의 맞대결에서는 패배한 경기가 더 많아 우려를 자아냈다. 아직 어린 나이라 피지컬이 성인 선수들만큼 올라오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미숙한 경기 운영을 보이며 완전히 유망주에서 벗어나지는 못한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빠른 성장세를 보였다. 5차 월드컵은 동계 아시안 게임을 위해 불참했다. 6차 월드컵은 출전하였으나 메달을 하나도 획득하지 못한채 끝냈고, 뒷심을 발휘한 오노가 월드컵 종합우승을 가져가고 안현수는 종합 준우승을 기록했다.

당시의 안현수에 대해 김기훈은 이렇게 평가하였었다.
"현수는 경기 운영 능력과 순간 스퍼트가 뛰어나다" #
"어린 나이답지 않게 승부근성이 강하고 침착하다".. "레이스 운영의 묘를 좀더 익힌다면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은 무한하다" #

4.3. 2003 아오모리 동계 아시안 게임

당시 안현수의 목표는 김동성과 아시아 최강의 자리를 다투던 리자준을 뛰어넘는것이었다. 500미터와 3000미터를 제외한 모든 종목에서 금메달을 가져오며 리자쥔과 리예가 이끄는 중국 대표팀을 압도하며 3관왕을 달성했다. 남자 5000m 계주에서도 최종 주자로 나서 경쟁자 리자준을 간발의 차로 제치고 결승선을 통과, 감격의 금메달을 한국에 안겼다. 세계에서도 이미 정상급 반열에 올라서고 있었지만, 아시아에서는 확실히 쇼트트랙 최강자임을 각인시켰다. #

4.4. 2003 세계선수권

500m는 취약 종목이라 메달은 따내지 못했다. 1000m에서는 팀동료인 송석우 이승재와 함께 결승에 진출했다. 하지만 리자쥔이 중반부터 선두를 서서 이끄는 작전을 펼치고 캐나다의 쟝프랑수아 모네트가 2위에 치고 올라와 레이스가 더 치열해 졌고, 마지막에 안현수가 아웃코스패싱을 시도하여 모네트는 추월에 성공하나 2등으로 골인해 은메달을 걸어 리자쥔에게 우승을 내줬다.[5] 1500m에서는 아폴로 오노와의 맞대결이 성사되었다. 이번에도 1000m와 마찬가지로 송석우와 이승재 모두 결승에 같이 올라왔으며, 중반까지는 이 셋이 선두에서 스위칭하며 이끄는 팀플레이를 펼쳐 오노를 고전시켰다. 오노가 경기 후반에 인코스패싱을 시도하며 승부수를 던지지만 송석우가 두번째 포지션에서 인코스를 선점해 오노의 패싱을 차단했고 오노 또한 결국에는 안현수와 송석우의 체력과 스피드에 따라가지 못하며 막바지에는 이승재에게 추월당해 4위로 경기를 마감했다.[6]

결국 세계선수권 우승 후보는 안현수와 리자쥔으로 좁혀졌다. 결과는 3000m 슈퍼파이널에서 판가름이 났다. 1500m와 마찬가지로 송석우, 이승재와 함께 강한 지구력을 이용해 선두에서 팀작전으로 레이스를 이끌어 나갔지만, 경기 후반 체력이 방전된 이승재가 나가떨어지고 오노와 리자쥔이 치고 올라왔다. 오노는 종합우승은 물건너 갔지만 3000미터라도 우승해 보려는 시도였는지 5바퀴 남은 상황에서 선두에 가던 안현수를 맹추격하였는데, 안현수가 후반 스퍼트를 뽐내며 더욱더 거리를 벌리며 앞서나갔고 1위로 통과해 자신의 커리어 첫 세계선수권 종합우승을 거머쥐었다.

5. 2003-04 시즌

5.1. 국가대표 선발전

1500m와 3000m 슈퍼파이널 우승과 500m 준우승을 기록하며 선발전에서 종합 1위를 기록해 선발되었다. #1 #2

5.2. 월드컵 시리즈

지난 시즌보다 더 강한 모습으로 돌아와 좋은 활약을 펼쳤으며 라이벌 구도가 형성되었던 아폴로 안톤 오노와의 맞대결에서도 대부분 경기에서 우위를 점했다. 리자쥔은 나이가 들며 지구력이 떨어지면서 단거리 위주로 활약했으나 중장거리에서는 경쟁에서 확실히 밀린 모습을 보였다. 송석우와 마지막까지 포인트 경쟁이 치열했으나 결국 안현수가 본인의 첫 월드컵 종합우승을 달성했다.(참고로 이 우승이 아직까지도 남자부 역대 최연소 우승 기록이다.) 본인의 주종목인 1000미터와 1500미터에서는 확실하게 최강자라는 모습을 각인시켰다.

5.3. 2004 세계선수권

1500m에서 압도적인 모습을 보이며 2연패에 성공했다. 500m에서도 결승 진출에 성공했지만 스타트가 워낙 취약한데다 상대가 500m에서 강한 송석우와 중국 선수들이었다. 경기 후반 리예를 추월해 3위로 올라왔지만 실격을 당하여 500m 포인트를 모조리 잃어버렸다. 1000m에서는 리자쥔과 맞붙게 되었지만 안현수가 아예 경기 초반부터 우월한 체력을 앞세워 선두를 지키며 나갔고 후반에서도 스피드와 체력이 남아돌면서 1500m와 굉장히 비슷한 구도로 우승했다. 참고로 오노는 1500m와 1000m에서 결승도 올라와보지 못하고 실격당했으며, 당시 안현수나 송석우같이 좋은 폼을 보이고 있는 선수들에 비하면 많이 떨어지는 스케이팅 수준을 보여줬다. 3000미터 슈퍼파이널에서는 아예 한바퀴를 잡는 전략을 실행했고, 그럼에도 엄청난 체력을 자랑하며 후반까지 뒤쳐지지 않고 그룹과 스케이팅을 펼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여유 있게 결승선을 통과하며 세계선수권 2연패를 달성하였으며, 남자 선수로는 마크 가뇽 이후 역대 두번째 세계선수권 2연속 우승자가 되었다.

6. 2004-05 시즌

6.1. 월드컵 시리즈

지난 시즌 부진과 안현수에게 자극받은 오노가 작심하고 시즌을 준비했는지 지난시즌과는 다르게 접전이 벌어졌다. 1차 월드컵에서는 500m와 1500m를 오노가 가져가고 안현수가 1000m와 3000m를 따냈다. 하지만 안현수도 1차 월드컵때 오노의 활약에 자극을 받은건지 2차 월드컵에서는 500m, 1000m, 1500m, 3000m 모든 경기에서 오노를 눌러버리고 우승했고, 계주에서마저 금메달을 걸며 오노를 상대로 완승했다. 3차와 4차 월드컵은 대한민국 대표팀이 불참하면서 참가하지 못했고, 안현수의 부재를 틈타 오노가 활약하며 포인트를 착실하게 쌓았다. 이후 5, 6차에서는 오노와 엎치락뒤치락 경쟁했지만[7], 앞서 언급한대로 3, 4차 때 포인트를 많이 쌓아놨던 오노가 이미 기정사실화였던 그의 두번째 월드컵 종합우승을 확정지었다.

6.2. 2005 인스브루크 동계 유니버시아드

성시백, 서호진과 함께 개인전에 출전해 1500m와 3000m 금메달, 1000m 동메달을 땄다. 그리고 이 1000m 경기가 바로 서호진이 안현수와 성시백에게 폭행을 저지른 사건이 일어난 원인이 된 경기다. 경기 전 서호진이 안현수와 성시백에게 코치를 통해 금메달 양보를 요구했고, 경기 중에 서호진이 성시백과 안현수에게 '야 비켜!' 라고 소리쳤고 본인은 비켜줬으나 성시백에게 '끝까지 타라' 라고 말했다. 성시백은 결국 1위로 결승선을 통과했고 서호진이 2위, 안현수가 3위를 기록한다. 경기가 끝난 후 둘은 서호진에게 헬멧을 쓴 상태에서 머리를 맞았고, 훗날 그가 러시아 귀화 후 촬영한 MBC 휴먼다큐 사랑에서는 후배(성시백)가 본인보다 두배는 더 맞았다고 증언했다. #

사실 이 사건은 선수 개인의 폭행 사건이 아닌 대한빙상연맹 임원진들의 병폐와 연결되어 있다. 특히 빙상연맹 고위간부들이 이후 금품을 받은 혐의로 불구속 수사를 받았던 것이나 폭행사건과 승부조작 논란으로 퇴출되었던 선수와 해임되었던 감독이 올림픽 시즌 직전 대한빙상연맹 지도부들의 주도로 복귀했던 점. 폭행방조 사건으로 선수 학부모들이 2006년 올림픽 감독 선임에 반대했을 때는 오히려 빙상연맹 지도부의 해체를 주장한 일개 코치를 해임하고 징계까지 주는 등 당시의 파벌문제와 함께 당시 빙상연맹의 병폐를 그대로 보여주는 사건이라 할수 있겠다.
1월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에서 열린 겨울유니버시아드대회 때도 남자대표팀 선배가 정한 순위를 따르지 않은 후배 선수를 폭행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해 11월 여자대표팀 구타파문이 있은지 불과 2달 만이다. 연맹은 선배선수가 순위를 양보하지 않는 후배선수에게 경기 뒤 “뭐가 그리 잘났냐, 건방지다”라며 폭언 하고 수십차례 주먹으로 때린 사실을 알아내고 선수와 코치에게 징계를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대한빙상연맹쪽은...."유니버시아드대회 이야기는 알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
서울 강동경찰서는 학부모로부터 돈을 받고 선수를 쇼트트랙 국가대표팀에 넣어 준 혐의로 대한빙상경기연맹 부회장 편아무개(58)씨와 강아무개(72)씨를 불구속 입건했다고 26일 밝혔다.
편 부회장은 올해초 오스트리아에서 열린 겨울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 후배 선수를 때려 국가대표 자격을 박탈당한 서아무개(23)의 아버지로부터 아들을 대표팀에 복귀시켜주겠다며 2월 300만원을 받은 혐의를 받고 있다. 서 선수는 그 뒤 국가대표팀에 복귀했다.
편 부회장과 강 부회장은 또 서 선수의 아버지로부터 1999년부터 최근까지 4차례에 걸쳐 '아들의 편의를 봐주겠다' 는 등의 명목으로 2100여만원을 받은 혐의다. #

6.3. 2005 세계선수권

1500m 준결승에서 가장 강력한 경쟁자 오노가 실격 당해 안현수에게 유리하게 시작되었고, 안현수가 결승에서 1500미터 금메달을 따내며 본종목 3연패를 달성했다. 500m 준결승에서는 오노는 물론이고 캐나다의 차세대 에이스인 샤를 아믈랭과 상대하게 됐는데, 오노가 아믈랭에게 파울을 범하면서 또 실격당했고 안현수는 니시타니 다카후미에 이어 2위로 결승에 진출했다.[8] 결승에서는 당시 500미터에서 포텐을 터트리던 캐나다의 프랑수아루이 트랑블레가 우승했고, 샤를 아믈랭은 준우승, 안현수는 3위로 골인해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1000m에서는 드디어 결승에서 오노와 맞대결이 벌어졌는데, 2바퀴를 남기고 아웃코스 패싱 후 선두로 치고 나가던 오노까지 인코스로 추월에 성공하지만, 코너를 돌며 인코스에 공간을 내준걸 오노가 놓치지 않고 다시 파고 들어 추월해 안현수가 다시 2위로 내려앉았고 마지막까지 추격하지만 오노가 1위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하지만 오노가 실격으로 인해 1500m와 500m 종목에서 포인트를 모조리 잃었기 때문에 여전히 안현수에게 굉장히 유리한 상황이었고, 3000m에서도 오노가 안현수보다 먼저 1위로 들어왔지만 안현수도 2위를 기록해 압도적인 점수 차로 대회 3연패에 성공하였으며, 남자부에서는 최초로 세계선수권 3연패를 달성한 선수가 되었다.[9] 더군다나 다음시즌에는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이 걸린 시즌이기도 했기 때문에 세계선수권 우승으로 우선 선발이 더욱 값지게 되었다. 단 당시에는 선발 규정이 자주 바뀌던 시절이었는데 세계선수권 우승자는 자동선발이었던 2004-05 시즌과 달리 2005-06 시즌에는 세계선수권 개인종합 우승을 해도 1차 선발전만 면제되었고, 2차 선발전에는 참가해야했다.

7. 2005-06 시즌

안현수가 한국 선수시절 커리어 하이를 찍은 시기로 올림픽 3관왕과 세계선수권 4연패를 달성하였다. 월드컵 종합우승은 덤. 다만 한체대와 비한체대 간의 파벌싸움이 더욱 심각해지면서 한국 쇼트트랙계가 전체적으로 시끄러웠던 시기이도 하며 시즌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잡음이 많았다.

7.1. 국가대표 선발전

이전 시즌인 04-05시즌에는 세계선수권 우승자는 자동 선발이 되는 규정이었지만, 이번 시즌에는 빙상연맹이 세계선수권에서 종합 순위(1-3위)에 입상한 선수들을 모두 우선 선발(2번의 선발전 중 1차 선발전 면제)하겠다고 해서 논란이 많았다. 남자부는 안현수가 세계선수권을 우승했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어보이지만, 사실 이건 남자 대표팀보다 여자 대표팀 선발 때문에 급작스럽게 바뀐 룰이었다. # 여자부는 세계선수권에 우승자 진선유 이외에도 최은경 강윤미가 각각 2, 3위를 기록했기 때문에 무려 3명이나 1차 선발전을 면제 받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근데 최은경과 강윤미는 한체대 출신 선수들이었고, 당시 한체대 vs. 비한체대(정확히는 전명규 vs. 반전명규) 파벌 싸움이 한창이던 시기이기 때문에논란이 많았다.

언론에 파벌싸움이 알려진 이후에 빙상 연맹이 조치랍시고 박세우(한체대파)와 송재근(비한체대) 코치를 선임해 파벌로 나뉘어 훈련하게 되는 등 실제로는 갈등은 계속되었다. 어쨋든 9월에 열린 2차 선발전에서 안현수는 상위 4명 중 2위로 최종 선발에 무사히 성공했다.

7.2. 한체대 vs 비한체대

2003년 비한체대 파벌쪽의 이준호 코치가 2003년 선수들 폭행 문제로 물러난다. # 2004년에는 당시 비한체대 출신이던 최광복, 김소희 코치진의 여자 대표팀 선수구타 사건이 있었다. # 이로인해 코치진은 한체대 박세우와 단국대 전재목으로 교체되었다.

그리고 2달 뒤 2005년 1월 동계 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는 안현수와 성시백이 선배에게 구타당하는 사건이 이 일어난다. 이 일로 윤재명 감독은 당시 제기된 승부조작 논란과 폭행파문 책임으로 3월 세계 팀 선수권 이후 감독직에서 물러나야 했고, 당시 비한체대 파 연맹 간부들은 폭행으로 퇴출 당한 선수 측으로부터 국가대표 복귀와 편의를 봐주는 대가로 금전을 받은것이 확인되어 경찰에 불구속 입건되었었다. #1 #2

그리고 윤재명 감독대신 2006년 토리노 올림픽을 위해 남자팀 코치에 김기훈이 재선임 되었으며, 여자팀에는 전재수 코치가 임명된다. # 그러나 1차 선발전이 끝난 이후 2005년 4월 안현수를 제외한 비한체대 출신인 나머지 이호석, 서호진, 송경택, 송석우, 오세종 등의 7명의 선수들이 선수촌 입촌을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전명규 라인이었던 김기훈 코치가 안현수를 편애해서 특별히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었다. 또한 김기훈 부친의 회사의 스케이트를 신을 것을 강요했다는 이유도 있었다. 그들은 올림픽의 주인공은 이미 정해졌다.는 이유로 김기훈 코치를 거부했고, 재입촌 하고서도 학부모 7명은 선수촌에서 소란을 피워서 결국 김기훈은 "더이상 이런 선수들을 가르칠 수 없다" 며 사임한다. #1 #2

김기훈은 이에대해 2018년 인터뷰로 "안현수만 특별히 더 가르친건 아니었는데 안현수가 더 자주 나를 찾아와서 배웠고 안현수의 재능은 너무 뛰어나서 스폰지처럼 흡수했다."고 당시의 상황에 대해 반박하기도 하였다. # 빙상연맹은 김기훈 감독이 사임한 이후 7월 윤재명 감독을 다시 복귀 시키려고 하였다.

윤재명 감독 또한 2004년 여자대표팀과 2005년 남자대표팀의 선수들 구타사건의 중심에 있던 폭행피해 선수였던 안현수와 최은경 그리고 성시백 등 학부모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1 #2 대한빙상연맹은 당시 빙상연맹 지도부의 퇴진을 요구했던 전재수 코치에게 학부모 선동이라며 책임을 덮어씌우고 해고와 함께 6개월 자격정지 처분까지 내린다. 이당시 안현수는 한체대에 자퇴서까지 낼정도로 전지훈련을 거부하였다. #

남자 대표팀과 여자 대표팀의 코치진은 다시금 바뀌었다. 결국, 남자팀 감독이었던 박세우 코치가 여자팀을, 그리고 남자팀은 송재근 코치가 맡게된다. 2006년 올림픽 직전에는 2005년 11월 박세우 코치가 여자대표팀 선수들에게 진선유를 견제하라고 지시했다는 폭로까지 나온다.

선발전이 모두 끝나고 시즌이 시작되는데도 파벌싸움은 나아지기는 커녕 빙상연맹은 사실상 손놓고 있던 상황이었으며, 이로 인해 심지어 월드컵 대회 중 한 번은 안현수 홀로 비행기를 타고 귀국해야 했을 정도였다. 안현수가 다른 남자 선수들과 훈련을 하지 못하자 이때 그가 도움을 청한 선수들은 이승훈과 성시백이었다. 이승훈은 안현수의 신목고 후배이자 한체대 입학 예정자였지만, 성시백은 당시 이미 연세대학교를 재학중으로 비한체대 선수였다. 올림픽이 코앞이였는데도 대표팀은 여전히 한체대파, 비한체대파로 나뉘어 훈련이 지속돼 상황이 나아지지 않자 안현수는 토리노에 훈련파트너로 이 둘을 데려갈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 그나마 빙상연맹의 뒤늦은 중재로 토리노에 가서는 파벌로 나뉘지 않고 같이 훈련하게 되어 이승훈과 성시백이 토리노에 동행하지는 않았다. #

특히 이 시기에서 비롯된 안현수와 타 선수들과의 관계에 관한 (악성)루머들이 양산되기도 했지만, 이호석이나 송석우 항목을 봐도 알 수 있듯, 실제론 안현수는 선수들과는 이런 케이스를 제외한다면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심지어 안현수와 관련해 악성 루머가 가장 많은 이호석과는 같은 방을 썼으며 그의 대표팀 적응을 도우며 친해졌고, 대표팀 합류 이전부터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던 사이었다. 그리고 비한체대 출신이었던 여자 대표팀 에이스 진선유와도 친한사이였다. 윗사람들의 편가르기 싸움에 어쩔 수 없이 선수들이 피해를 본게 컸다.
3년째 같은 방을 쓰고 있는 송석우(22·전북도청)와 웃고 떠들며 장난도 한다. 송석우는 "현수는 친동생같아요. 하긴 가족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 지내니 그럴만도 하죠"라더니 안현수의 머리를 툭 치며 웃는다.
- 2005년 1월 세계일보 #
선수들은 같은 팀이 아니면 밥도 따로 먹고 서로 대화도 없었다.
선수들의 관계도 바뀌었다. 안현수와 이호석은 신목고 1년 선후배 사이로 지난해에 선수촌에서 한 방을 썼던 친한 사이였지만 현재는 이호석이 "서로 얘기를 나눌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다. 서먹서먹하다"고 말할 정도로 달라졌다.
안현수도 5일 대학 선배 이진성의 인터넷 미니홈페이지에 남긴 글에서 "같은 시간에 운동하면서도 (선수들끼리) 말 한마디 없다. 도대체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 2006년 4월 동아일보 #

7.3. 월드컵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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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시리즈에서는 오노뿐만 아니라 지난 세 시즌 동안 주니어무대를 평정하던 대한민국의 기대주 이호석까지 합세하며 더욱 치열한 경쟁이 펼쳐졌다. 올림픽에서 전관왕이 목표였던 안현수는 본인의 주종목뿐만 아니라 상대적으로 약하다 평가받던 500m에도 굉장히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실제로 당시 네 차례의 월드컵에서 500m를 두 번이나 우승하면서 이 종목에서도 이 시즌 한정으로는 최강자의 면모를 보였다. 다만 스타트가 강해서 좋은 성적을 낸건 전혀 아니고 추월능력과 스피드를 이용해 역전으로 승부를 보는 방식이었다.[10] 주종목에서도 여전히 건재했으며 올림픽을 앞둔만큼 큰 무리를 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500미터와 1500미터에서 랭킹 1위, 1000미터에서 랭킹 2위를 기록해 커리어 두번째 월드컵 종합 우승을 달성했다. 세계랭킹 2위는 이호석, 3위는 오노가 차지했으며 월드컵에서처럼 토리노 올림픽에서도 이 셋이 경쟁을 이어나갈 것으로 예상되었다.

7.4.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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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현수가 참가하는 두 번째 올림픽이였으며 당시 만 20세였던 그는 더 이상 지난 올림픽의 자그마했던 유망주가 아니었다. 미국 언론에서는 아폴로 안톤 오노와의 올림픽에서의 재대결이라고 설레발을 쳤으나 토리노 올림픽 이전부터 이미 안현수가 세계선수권 3연패를 진기록을 세우고 있었고 시즌이 거듭할 수록 오노와의 차이가 훨씬 더 벌어지고 있을 때였다. 세 시즌동안 안현수가 오노를 상대로 무조건 승리만 거둔건 아니지만 전체적인 경기력으로는 안현수가 성장을 거듭하며 이미 오노보다 뛰어나다고 평가받고 있었다. 결국 이 동계올림픽은 그가 '쇼트트랙의 황제'로 거듭나게 되는 완벽한 무대였다.
예선, 준결승을 모두 가볍게 통과했으며[11] 결승에서 이호석이 먼저 1위로 나왔을 때 한 바퀴를 남기고 인코스로 추월한 후 선두를 유지하면서 골인했다.[12] 또한 올림픽이 끝나고 이호석의 '양보 드립' 루머가 나온 경기이기도 한데, 사실 양보했다기 보다는 무리하지 않았다는게 더 맞는 해석이다. 더군다나 당시 명실상부 최강자였던 안현수에게 양보한다는 표현부터가 어색하다. 또한 이호석 본인도 그런 말을 한적이 없는데 기사가 그렇게 나가는 바람에 오해의 소지를 제공했고, 하필이면 당시 파벌싸움이 깊어졌을 때라 둘 사이가 멀어졌었기 때문에 대화도 제대로 하지 않던 상태라 서로 오해만 깊어졌다. 자세한건 이호석 항목 참조.[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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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m 결승이 끝난 후 안현수와 이호석의 모습
준준결승 준결승에서 모두 1위를 기록하며 수월하게 결승에 진출했다. 이번엔 1500m 결승을 함께 탄 이호석 뿐만 아니라 오랜 라이벌인 아폴로 안톤 오노 또한 결승에 진출했다. 안현수와 오노의 올림픽에서 결승전 맞대결이, 그것도 같은 종목에서 4년 만에 성사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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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경기력으로 냉정히 평가하자면 오노와의 맞대결이라기 보다는 사실상 이호석과의 재대결이었다. 안현수가 오노 바로 뒤인 세번째 자리에서 기다리다 네바퀴 남기고 인코스 패싱으로 치고나오면서 그대로 끝까지 선두를 유지하는 작전을 펼쳤고 급해진 오노가 중국의 리예를 따돌리고 안현수를 맹추격했지만 안현수가 체력과 스피드를 계속해서 유지하면서 추월할 기회를 내주지 않았고 그 사이 맨 뒤에 있던 이호석이 두바퀴를 아웃사이드 패스로 돌면서 맨 마지막 한바퀴 때 오노를 인사이드로 추월해 2위까지 치고 올라오면서 멋진 레이스를 펼쳤고 마지막까지 날내밀기 경합을 하면서까지 승부를 봤으나 안현수의 날이 결승선을 먼저 통과했고 안현수는 올림픽 2관왕을 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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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내밀기 경합 장면 아쉬워하는 이호석과 오노의 표정
올림픽 2관왕을 달성한 뒤 주종목이 아닌 500m에서도 결승까지 가는 기염을 토했다. 결승에서는 5명의 선수들 중 한가운데인 3번레인을 배정받았지만 스타트 기술이 약했기 때문에 맨 꼴찌로 출발했다. 하지만 결국 스피드와 추월기술만 가지고 앞에서 전력질주하던 두명의 선수를 제치고 동메달을 따냈고, 개인 종목에서 총 3개의 메달을 수집했다. 금메달은 자리 배정을 기막히게 잘 받은 아폴로 안톤 오노가 차지했으며 은메달은 캐나다 프랑수아루이 트랑블레가 따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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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베다르보다 0.004초 먼저 들어왔으며, 어쨌든 간에 본인 입장에선 크게 아쉬울 것 없는 종목이었다. 이미 대회 2관왕으로 자신이 최고라는 걸 입증했을 뿐더러 500m가 주종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동메달까지 따냈다. 다만 월드컵 500미터에서 4번 중 3번이나 우승을 기록해 500미터 랭킹 1위를 달성했기도 했고, 이때까지는 500미터에서의 경쟁이 이 이후 시즌들만큼 심화되었던 때가 아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절호의 기회를 놓쳤던 셈이다.[14]

이 경기에서 논란이 있었던 건 금메달을 따낸 오노가 부정 출발을 했다는 것이다. 확실히 출발 총성이 울리기도 전에 상체가 움직였지만 심판진은 그냥 넘어갔다. 500m 같이 단거리 종목에서는 부정 출발이 큰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기에 500m에서 항상 강세를 보인 캐나다에서 강하게 항의했다. 사실 두 캐나다 선수도 부정 출발을 한 번 하긴 했지만 오노는 3번이나 부정 출발을 했다.[15]

그가 상대적으로 스타트가 약하기도 했지만 맨 꼴찌로 출발해 두 명이나 추월해낸 걸 봐서 한 두 번째 자리나 세 번째 자리로 출발했다면 전관왕도 가능했을 거란 의견이 다수다.[16]
한국의 계주 순서는 송석우( 오세종)-안현수- 서호진- 이호석 순이었다.[17] 준결승에서는 초반에 오세종이 넘어지면서 위기가 있었지만 이호석과 같이 환상의 콤비를 이룬 덕분에 17바퀴에서 역전한 뒤 조 2위로 들어왔다.

결승전에서는 초반부터 안현수와 이호석의 스퍼트로 빠른 스피드로 치고 나갔던 캐나다를 따라갈 수 있었으며 일찌감치 뒤쳐진 미국은 홈 그라운드 버프를 받은 이탈리아와 3위를 다투고 있었고 사실상 지난 두 번의 올림픽의 계주 종목 챔피언 캐나다와 한국의 1위 싸움이었다. 선두로 치고 나가 캐나다와 격차가 벌어진 상황이 나와 더 쉽게 풀릴 수 있던 경기였으나 서호진의 실력이 다른 세 선수에 비해 너무 낮았기 때문에 캐나다에게 계속해서 따라 잡히다 선두까지 내주는 상황이 벌어졌다.

막판에 이호석이 분전해 송석우에게 터치, 송석우가 다시 선두로 나왔으나 캐나다가 인코스로 파고들어 다시 선두를 내줬다. 3바퀴를 남겨두고 캐나다 선수인 에릭 베다르 송석우를 푸싱하는 바람에 위기가 있었지만 다행히 넘어지지 않아서 송석우가 안현수에게 패스할 수 있었다. 만약에 넘어지기라도 했다면 캐나다는 실격당하는 건 물론이고 미국이 어부지리로 금메달을 땄을 수도 있었다. 이 때 캐나다 선수와 거리가 꽤나 나있는 상황이었는데 역시 먼치킨은 다른 지라 스퍼트를 올려 캐나다의 마지막 주자인 마티외 튀르코트를 아웃코스로 가볍게 제치고 대역전극을 일구어냈다. 또한 올림픽 신기록을 여기서도 세운 건 덤이다.

그의 대활약 덕분에 12년 만에 남자 계주 금메달을 땄으며 동료 4명에게 금메달을 선사할 수 있었다. 당시 세계선수권을 3연패하고 있던 것도 모자라서 올림픽 3관왕까지 했으며 거기다 올림픽 한 대회에서 무려 4개의 메달(금 3, 동 1) 을 목에 건 유일한 한국 선수이며, 쇼트트랙 선수가 한 대회에서 4개의 메달을 딴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 #

7.5. 2006 세계선수권

아폴로 안톤 오노가 대회 불참을 선언[18]하면서 대회가 시작하기도 전 일찌감치 자연스럽게 안현수 대 이호석 구도로 좁혀들었다. 또한 오세종이 안현수, 이호석과 함께 개인전에 출전하게 되었으며, 송석우 서호진은 계주에만 출전했다.

1500m에서는 출전한 한국 선수 세명이 모두 결승 진출한다. 오세종이 제일 먼저 앞으로 치고 나왔으나 경기 후반 이호석과 안현수가 아웃코스로 나가며 오세종을 한꺼번에 추월했다. 이후 안현수가 살짝 아웃코스로 타면서 이호석을 추월할 기회를 노렸고 마지막 한바퀴를 남기고 주특기인 인코스기술로 이호석을 추월했다. 이 과정에서 살짝 충돌이 있었지만 다행히 넘어지거나 실격으로 이어진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으며 마지막 날내밀기에서 마치 토리노 올림픽 1000m 결승을 연상시키듯 간발의 차로 안현수가 승리한다. 안현수 입장에서는 순간의 방심으로 하마터면 마지막 코너를 돌고 아웃으로 빠져서 날을 내미는 이호석에게 우승을 내줄 뻔했지만 본인도 반사적으로 날을 내밀어 우승을 확정지었다. 또한 그가 1500m 종목 4연패를 달성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500m에서도 둘의 재대결이 펼쳐졌다. 당시 이호석은 500m에서 좋은 성적을 내던 선수는 아니었기 때문에 꽤나 선전했다 볼 수 있다. 안현수 입장에서는 이호석이 꽤나 난적으로 느껴졌을텐데 안현수가 속도를 받기 위해 트랙을 크게 탈 때 이호석이 인으로 파고 들어 안현수가 계속 아웃으로 탈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고 마지막 코너를 크게돌며 중국 선수와 이호석의 안쪽으로 파고들어 2위로 통과하며 짜릿한 역전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하필이면 이호석이 마지막 코너에서 살짝 미끄러질 때 코너 블록을 건드리고 말았고, 당시 주심이었던 제임스 휴이시는 안현수가 블록 안으로 지나간 것으로 판단해 안현수에게 실격을 주었다. 이로 인해 500m에서 쌓았던 포인트를 모조리 잃었다. 여담으로 이호석이 안현수의 실격을 유도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블록을 건드렸다는 근거 없는 악성 루머가 돌기도 했다.[19]

이어진 1000m 이벤트에서도 500m에 이어 또 다시 결승에서 이호석과 맞붙었다. 안현수는 1500m에서 우승했지만 500m에서 실격을 당해 포인트를 손해봤고, 이호석이 1500m에서 2위, 500m에서 3위를 기록하여 둘의 포인트가 동률을 이뤄 두 선수 다 포인트 선두를 뜻하는 빨간 캡을 쓰고 경기를 하는 진기한 상황이 펼쳐졌다. 슈퍼파이널을 치르기 전 우승에 유리한 고점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1000m를 우승하는게 절실했다. 경기 중반 둘 다 인코스와 아웃코스패싱을 자유자재로 선보이면서 선두로 달리던 미국 러스티 스미스에게 굴욕을 선사해주고, 마지막 한바퀴를 남길 때 이호석이 안현수를 인코스로 추월을 시도 했으나 안현수가 자리를 잘 견제하면서 골라인을 통과해 1000m를 우승하면서 종합 우승에 한걸음 더 앞서갔다.

안현수는 포인트를 많이 따낸 상황이었으나 이호석이 슈퍼파이널을 우승하게 되면 이호석이 종합 우승을 하게 되었기 때문에 마지막 3000m 경기에서까지 초접전이 이어졌다. 또한 안현수와 이호석이 충돌하는 최악의 사태가 발생한, 그리고 모든 불화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는 경기이다. # 경기 막판에 안현수가 앞에 있던 이호석과 충돌하였고 결국 이호석이 중심을 잃으면서 엉덩방아를 찧게 되었다. 해당 장면을 분석하자면, 안현수가 마지막 코너를 돌기 전 직선 구간에서 안쪽으로 코스를 바꿔 인코스로 추월을 시도하려 했지만 이를 잘 주시하고 있던 이호석이 때에 맞춰 살짝 안쪽으로 움직여 인코스를 틀어막았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속도가 많이 붙었던 안현수가 이호석이 안쪽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주춤하지만 결국 충돌했다.[20] 웬만한 스케이터였다면 코너에서 나오면서 안현수가 아웃으로 치고 나올것이라 착각해 그의 크로스 기술에 인코스로 농락 당했겠지만, 이호석은 당시 최고 실력자 중 한 명에 안현수를 여러 번 상대해 본 팀 동료였으니 이를 모를 리가 없었다. 안현수에게도 사실 마지막 코너 하나를 돌면 우승 여부가 판가름 나는 상황에서 아웃 코스로 추월하는건 특히나 이호석 같은 선수를 상대로는 성공률이 낮은 도박이었을 테니 인코스가 맞는 판단이기는 했다. 만약 아웃으로 돌았더라도 이호석 본인도 코스 견제에 굉장히 신경쓰고 있었기 때문에 크게 돌아 인과 아웃 모두 틀어막는 것도 가능했기 때문이다. 결국 둘 다 실력이 너무 뛰어나고 서로가 서로를 너무 잘 알아 벌어진 불운이기도 하다.

경기 주심이었던 제임스 휴이시 안현수에게 잘못이 있었다고 판단해서 실격을 줬지만, 이호석은 넘어져서 5위로 들어와 총점 60점을 받으면서 결국 8점 차이로 안현수가 대회 종합 우승 및 세계선수권 4연패를 달성했다. 비디오를 보면 안현수가 이호석에게 다가가 사과하는 모습이 나오며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이 때 파벌싸움이 엄청나게 심했던 상황이었다.

이 사건 당시 엄청나게 욕을 먹은[21] 안현수는 아버지 안기원에게 자신의 심경을 하소연했고, 이에 분노한 안기원이 선수들이 귀국하는 공항에서 쇼트트랙 관계자에게 '이호석과 오세종이 짜고 안현수를 방해했다.'고 주장하며 화를 냈고 멱살잡이를 했다. # 이에 열받은 이호석의 엄마는 정신줄을 놓고 다음과 같은 인터뷰를 했다. # 그리고 아래 영상 앞부분에서 볼 수 있듯이, YTN과 인터뷰 중이던 안현수가 아버지의 분노하는 모습을 보고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여론이 이호석과 이호석의 어머니를 비난하는 쪽으로 재형성되었다. 파벌싸움이 극단으로 치닫고 있던 때였기 때문에 당시 안현수에 대한 비난도 정도를 넘었으며, 오히려 이때문에 여론은 반전되게 되었다. 당시 남자팀 코치 송재근은 다음과 같은 인터뷰를 하기도 하였다.
"현수가 스포츠에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서[22], 1등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

이 사건이 방송을 타게 되면서 빙상연맹에서는 선수단 징계를 검토한다고 한다면서 진화에 나섰다. #

그리고 비디오 판독결과 오세종이 이호석에게 추월당한 직 후 이호석을 따라 아웃코스로 추월을 하던 안현수의 위치를 미처 판단하지 못하고 서로 어깨를 살짝 부딪히면서 선두권 밖으로 밀렸다. 하지만 고의성이 없었으므로 이호석과 오세종, 안현수 모두 잘못이 없다는 판정을 내린다. 당시 위원장이었던 채환국 동국대학교 교수의 발표는 다음과 같다.
세계쇼트트랙선수권대회 3,000m 결승 당시 이호석과 안현수의 충돌장면에 대해 "100여 번 이상 비디오를 재생한 결과 고의적인 충돌이 아니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안현수의 스케이트 앞날이 빙판에 걸리면서 이호석과 부딪혔고, 오세종 역시 캐나다 선수의 반칙으로 밀리면서 안현수와 충돌했다." #

그리고 안현수의 아버지는 빙상 경기장 1년 출입 금지 처분을 받는 것[23]으로 마무리 지어졌으나, # 이 사건 당시 서로의 부모님[24]에게 좋지 못한 말을 들은 양 선수 모두에게 상처가 되는 최악의 결과만 가져오게 됐다.

어쨌든 본론으로 돌아와 이 대회는(특히 한국) 팬들에게는 상당히 가치가 있는 대회다. 경기 영상에서 볼 수 있듯이 안현수와 이호석은 토리노 동계올림픽에서의 상승세를 이어가 이 세계선수권에서는 더욱더 수준 높은 경기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 세계 투톱이었던 두 선수가 종합 우승 하나만을 바라보고 치열한 경쟁을 펼쳤기 때문에 결승에서 맞붙은 네 경기 모두 명승부로 평가받고 있다.

5000m 계주 결승에서는 같이 결승에 올라온 나라들은 캐나다, 미국, 중국으로, 마지막 두 나라는 안그래도 전력이 약해서 각각 아폴로 오노, 리자쥔 원맨팀으로 불리던 팀들인데 리자쥔은 은퇴를 선언한 상황이고 오노는 휴식을 이유로 불참한 상황이었다. 결국 올림픽 계주 결승에 이어 캐나다와 재대결이 성사되었다. 한국팀은 송석우- 이호석- 안현수- 서호진 순으로 토리노와는 다르게 이호석이 마지막 주자를, 안현수가 세번째 주자를 맡게 되었다. 팀원 이호석의 맹활약에도 심판이 제임스 휴이시여서였을까 한국이 어이없는 실격을 받고 금메달은 캐나다가 가져가게 된다.

8. 2006-07 시즌

잇따른 잔부상과 컨디션 난조로 성공적이었던 전 시즌만큼 월드컵에서 좋은 활약을 선보이지 못했지먼, 세계선수권 종합 우승을 달성하고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 2개와 동메달 1개를 가져오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경기력은 많이 떨어져 있었다고 평가받았던 시즌이기도 했다. 같은 시즌 이호석은 한 술 더 떠서 부상으로 인해 시즌 아웃이나 다름없었던 상태였다. 세계 탑이었던 건 변함이 없었지만 안현수가 20대 중반에 다다르고 있었기에 서서히 기량이 떨어질 거란 예상들도 꽤 있었다.

8.1. 국가대표 선발전

이전 시즌 파벌 문제가 대중에 알려져서이기 때문인지 빙상연맹은 세계선수권 우승자 자동 선발 규정을 다시 없에며 2006 세계선수권 우승자인 안현수도 선발전에 참가하게 된다. 2006년 4월 1차 국가대표 선발전 개념인 제 21회 전국남녀 종합 쇼트트랙 선수권 대회에서 성시백 이호석에 이은 3위를 기록해[25] 2차 선발전을 치를 자격이 주어지는 최종 15인 안에 들게 된다. 9월에 열린 2차 선발전에서는 약간 불안하기는 했지만 결국 종합 1위를 달성해 무사히 대표팀 재승선에 성공했다. 안현수와 이호석을 제외한다면 모두 이전 시즌에 대표팀에 있던 선수들( 서호진, 송석우, 오세종) 탈락했다.

8.2. 월드컵 시리즈

시즌 초기에 안현수와 이호석의 경쟁이 굉장히 더욱 더 치열했고, 월드컵 경기에선 종종 둘의 충돌이 나오기도 했다.[26] 다만 이때는 파벌 싸움이 나아지고 있던 시절이었고 이전 시즌과는 달리 한체대, 비한체대 선수들이 따로 나뉘어 훈련하지도 않았지만, 워낙 파벌로 이미지가 나빠진 상황이라 파벌 싸움이 지속되어 저런 사건들이 벌어졌다고 오해를 사는 부분은 있었다. 하지만 쇼트트랙부터가 이미 경쟁자들끼리 접촉과 충돌이 많이 일어나는 스포츠이니 과대해석은 금물이다.

안현수는 4차 월드컵까지는 그래도 어느 정도 성적이 나왔으나 이전 시즌들 만큼 압도적인 폼은 아니었고, 서서히 경기력이 낮아지며 슬럼프에 빠졌던 이호석은 4차 월드컵에서는 아예 메달을 따지 못했다. 5차 월드컵은 동계 아시안 게임 출전으로 한국 대표팀을 포함한 아시아 국가들이 불참했다. 이후 잔부상이 있었던 안현수는 세계선수권을 앞두기도 했으니 컨디션조절을 위해 6차 월드컵에 불참하고 이호석이 출전해 2개의 종목을 우승하면서 부활의 신호탄을 쏘나 했으나, 결국 세계선수권을 앞두고 발목 부상을 당해 참가하지 못했다.

8.3. 2007 창춘 동계 아시안 게임

1000m 5000m 계주에서 우승했다. 5000m 계주의 경우에는 중국의 홈그라운드 버프에도 불구하고 안현수가 마지막 2바퀴에서 해결을 하면서 우승을 얻었으며, 1500m에서 2위를 기록해 총 2개의 금메달과 1개의 은메달을 획득했다. 1500m 은메달 같은 경우는 중국 선수들이 거친 몸싸움을 겸비한 팀플레이에 방해 받았음에도 따낸 거다. 500m에서는 1위로 골라인을 통과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인 심판진의 편파판정으로 실격당해 2연속 아시안 게임 3관왕은 실패한다. 물론 한국도 팀플레이를 하긴 했지만 홈 그라운드가 중국이었기 때문에 몸싸움을 중국 선수들처럼 대놓고 할 수는 없었다.

8.4. 2007 세계선수권

1500m 결승에 무난히 진출했으나, 6바퀴가 남은 상황에서 올리비에 쟝이 코너를 돌때 미끄러지며 안현수를 넘어트렸다. 다시 일어서서 레이스를 재개했으나 이미 앞 그룹과 격차가 크게 벌어지게 된다. 송경택 아폴로 안톤 오노를 제치고 1위로 골인을 하긴 하나, 송경택이 실격을 당하면서 오노가 1500미터 우승을 하고말아 안현수는 2003년부터 이어지던 세계선수권 1500m 연속 우승도 4연패로 끝이나게 된다. 하지만 오노를 따라가던 미국의 조던 말론이 마지막 한바퀴에서 넘어지게되고 올리비에 쟝이 안현수를 넘어트린 것으로 실격을 받게되어 운좋게도 안현수가 동메달을 받게되어 최악의 상황은 모면한다.

500m에서는 오노가 준결승에서 실격을 당해 500m 포인트를 모조리 잃어 안현수에게 다시 기회가 생겼고, 안현수는 결승 진출에 성공한다. 결승에서는 스타트를 1번 레인에 배정을 받았음에도 스타트는 세번째로 하여 샤를 아믈랭 프랑수아루이 트랑블레에게 뒤쳐졌고, 계속해서 트랑블레를 추월할 기회를 노렸지만 인코스패싱을 시도하려 할때 살짝 주춤하며 트랑블레를 제치는데 실패하고 3위로 골인했다.

1000미터 결승에서는 올 시즌 좋은 모습을 보이고 있는 샤를 아믈랭과 이때까지 대회 선두였던 빨간 캡을 쓴 아폴로 안톤 오노와 맞붙었다. 아믈랭이 경기를 초반부터 앞에서 빠른 페이스로 이끌었고, 경기 중반 오노가 아웃코스 패싱을 시도하다가 두번째에 있던 이탈리아의 유리 콘포르톨라의 팔에 걸려 휘청하면서 공간이 열린 틈을 타 안현수가 빠르게 치고 2위로 치고 올라왔고, 좋은 스피드로 두바퀴 남았을 때 아믈랭을 코앞까지 따라잡았다가 이때는 여의치 않았는지 추월 시도를 하지 않았다. 마지막 코너를 돌때 크게 돌며 인코스로 파고 들었고 아믈랭보다 먼저 결승선을 통과하며 짜릿한 역전승을 거두었다.[27] 이로써 1000m 우승으로 오노과 아믈랭보다 포인트가 앞서게 되었고, 셋 중 가장 유리한 상황으로 우승자를 결정짓는 슈퍼파이널에 출전하게 되었다.

3000m 슈퍼파이널에서는 송경택이 먼저 한바퀴를 잡는 전략을 취한 가운데 안현수, 오노, 아믈랭 이 세 사람의 눈치싸움으로 이어졌으며 네바퀴 남은 상황에 트랑블레가 앞서나가 레이스 템포를 빠르게 올리면서 선수들이 하나둘씩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우승경쟁을 벌인 세 선수 중 제일 먼저 빠르게 치고나간건 아믈랭이지만, 안현수도 재빨리 아웃 코스를 달리며 추격했고 이내 2위로 달리던 아믈랭까지 추월하는데 성공했다. 오노도 안현수를 따라 아웃코스로 치고 나갔지만 안현수만큼의 스피드를 내지 못해 마지막 코너 때 가서야 겨우 아믈랭을 추월했고, 결국 한바퀴를 먼저 잡은 송경택에 이어 안현수가 2등으로 들어오면서 남자부에서는 현재까지도 전무후무한 기록인 세계선수권 5연패를 달성했다.

9. 2007-08 시즌

9.1. 월드컵 시리즈

2007-08 시즌[28] 최고의 컨디션으로 다시 복귀하며 이호석, 송경택과 함께 무시무시한 기량을 보여주며 월드컵을 휩쓸었다.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남자 쇼트트랙 역사상 월드컵과 세계선수권을 모두 통틀어서 계주 무패[29]를 달성한 시즌이기도 하다. 당시 경기력이 너무나 좋았기 때문에 한국에서 열리게 될 2008 세계선수권에서 홈버프를 받아 6연패를 달성할 거라 보였을 정도로 기량만으로는 토리노 동계올림픽 시절보다도 물이 올라있었던 상황이었다.[30] 1차 월드컵 1000m 결승, 2차 월드컵 1500m 결승, 3차 월드컵 5000m 계주 결승, 4차 월드컵 5000m 계주 결승 영상을 보면 알 수 있다.

하지만 5차 월드컵을 앞두고 있던 2008년 1월, 훈련 도중 큰 부상을 당하게 되면서 시즌 아웃이 되며 결국 이것이 안현수가 대한민국 대표팀 선수로 활동한 마지막 모습이 되었다. 5, 6차 월드컵에 참가하지 못했음에도 최종적으로 월드컵 종합 2위를 기록한다. 이것도 사실 이호석과 랭킹자체로는 동률인 상황이었으나 이호석의 2006-07시즌 500m 출전이 반영돼서 이호석에게 종합 우승이 돌아간 것으로 안현수가 부상을 당하지 않았다면 우승했을 확률은 안현수 쪽이 더 높았던 상황이었다.

9.2. 부상

2008년 1월 태릉 선수촌에서 훈련 중에 넘어져 펜스에 충돌하는 바람에 무릎 부상을 입었다. 쇼트트랙 종목 특성상 선수가 미끄러져서 펜스에 충돌하는걸 대비해서 쿠션을 해야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또한 안현수가 충돌했던 펜스는 당시 얼어있었다. #1 #2
부상만 해도 안현수 다치면 안되는 거에요. 미끄러질 수 있잖아요. 미끄러지는 걸 대비해서 펜스에 쿠션을 해야 하는데 그게 다 얼어 있었어요. 그럼 당연히 (무릎이) 나가죠. #

더군다나 잔부상 때문에 훨씬 허약해진 상태에서 당한 부상이라 수술이 아니면 다른 방법이 없었던 터라 결국 코 앞에 두고 있던 2008 세계선수권을 불참하는 바람에 양양(A)와 세계선수권 6연패 기록과 타이를 이룰 수 있었던 기회가 무산되었다.

결국 국가대표에서 4번째 순서였던 이승훈이 이호석, 송경택과 함께 개인전에 출전했으며 이승훈은 쇼트트랙 선수로는 정상급 선수였다고는 볼 수 없었고 의심의 여지 없이 당시 안현수 다음으로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 중 하나였던 이호석도 안현수가 빠지자 가장 큰 벽은 없어졌던 셈이지만 또한 서로 가장 큰 시너지 효과를 만들어냈던 최고의 파트너를 잃었던 셈이다.

더군다나 대회가 진행되며 이호석이 월드컵에서 해줬던 만큼 활약을 하지 못했으며 마지막 슈퍼파이널에서 여유를 부리다 오노가 스퍼트하는 걸 놓치는 바람에 오노에게 그것도 한국에서 그의 첫 세계선수권 종합 우승을 내줬다. 아폴로 안톤 오노가 한국에서 세계선수권 종합 우승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대표팀은 상당히 까였으며 안현수의 빈자리는 더욱 더 크게 느껴졌다.

안현수는 더 복귀가 늦었다면 밴쿠버 동계올림픽 진출에 힘들어지기 때문에 2008년 9월에 재활 치료가 완전히 끝난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서둘러 복귀를 했으며 오히려 자신의 몸에 더 해를 끼치며 완전한 회복을 늦어지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당시 그가 당한 부상이 선수생명을 위협할 만한 부상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재활운동에 더 많은 투자를 해서 2014 소치 동계올림픽을 노렸으면 어땠을까라는 의견들이 많다. 하지만 운동 선수가 2, 3년 재활에 몰두하는 것은 선수 본인에게 굉장히 힘든 일이며 한국은 세대 교체가 상당히 빨라서 다음 올림픽을 노리기에는 불안했을 것이다. 특히 강압적인 방식과 극한의 체력 훈련 등 부상당한 선수와 노장 선수들에게 좋은 훈련 환경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훗날 러시아로 귀화한 이후에 보여준 기량을 생각하면 재활에 더 전념했으면 하고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10. 2009-10~2010-11 시즌

전 시즌을 부상으로 인해 통째로 스킵했기 때문에 선발전 출전 가능 여부가 불투명했다. 국가대표 선발전에 출전하기 위해서는 국내 대회 기록[31]이 있어야 하지만 안현수는 국내대회에도 출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격 요건이 안 되었다. 다행히 빙상연맹이 자격 요건을 '동호인을 제외한 전 시즌 일반부 등록 선수'로 완화했고 선발전에 출전할 수가 있었다.

2009년 4월에 열린 올림픽 시즌 국가대표 선발전에는 한참 주가를 올리고 있던 이정수 성시백, 곽윤기, 송경택, 이승훈 등등 쟁쟁한 경쟁자들이 있었다. 그의 몸 상태가 100%였다면 걱정할 일이 없었으나 2년 동안 세계 무대에서 스케이트를 타지 못해 감각을 많이 잃은 상태였고 근육량도 현저히 줄은 데다 양쪽 다리 근육량마저 자신의 스케이팅에 맞는 밸런스가 붕괴되어 체력과 스피드가 불완전한 상태였다. 더군다나 이호석 2009년 세계선수권에서 종합 우승을 해서 자동 선발되었기 때문에 남은 네 자리를 두고 경쟁해야 했고 개인전에 출전하기 위해서는 2위 안에 들어야 했다. 올림픽 시즌을 위한 선발이었던 만큼 경쟁이 상당히 치열해졌다. 결국 종합 7위에 머물렀지만 선발된 선수들에게 다가가 모두 축하해 줬으며 인터뷰에서는 2014 소치 동계올림픽에 출전하겠다며 긍정적인 마인드를 보였다.

이후 2010년 이정수 측이 빙상연맹 윗선의 압박으로 세계선수권 개인전에 출전을 못했다고 문제를 제기했는데, 대한빙상경기연맹 측이 빙상연맹의 압박이 아닌 선수들의 자의로 선수들에게 세계선수권 출전포기 각서를 받았다고 이정수와 김성일 선수에게 받았다는 각서를 언론에 급 뜬금 공개하면서, 2010년 벤쿠버 올림픽 선발전 짬짜미가 있었음이 확인되었고, 빙상연맹 지도부 윗선에 대한 승부조작 국가대표 선발전 개입과 이로인해 선수들에게 압박을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으며 이에 대해 대한체육회의 감사가 이루어지게되었다. (2010 벤쿠버 올림픽 국가대표 선발전 짬짜미와 이후의 과정은 이정수 곽윤기의 선수경력 항목에서 자세히 확인이 가능하다.)

2010년 4월 8일 대한체육회가 발표한 감사 결과에 따르면 2009년 4월 국가대표선발전 3000m 슈퍼파이널 경기를 앞두고 일부 코치와 선수들은 서로 1~5위 랭킹 안에 들어갈수 있도록 협조하고 시즌 국제대회에서 모두 메달을 획득할 수 있도록 합의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1 #2

당시 안현수의 아버지는 이정수의 아버지 측 국가대표를 지냈던 권수현 선수의 아버지 권금중의 요청으로 이를 공론화 시켰다. 하지만 이는 선수들과 일개 밑선의 코치들을 저격했던 것이 아니라 빙상연맹 윗선들의 병폐에 대해 저격한 것으로 선수들간의 짬짜미를 폭로했던 것이 아니라, 이정수 선수가 출전포기 압박을 받았다는 것을 공론화한 것이었다. 실제로 선수들이 자의로 세계선수권에 출전하지 않겠다고 썼다는 각서를 언론에 공개한건 당시 대한빙상연맹이었다.

대한빙상연맹의 이 언론플레이를 시작으로 '이정수 선수의 출전포기 압박 문제제기'는 이후 '선수들이 짬짜미 했다고' 사안이 바뀌게 된다.

실제로 그 각서를 빙상연맹이 선수들에게 받았다는 것과 '출전포기 압박' 문제가 제기되자마자 그것을 바로 내밀었다는 것 자체가 빙상연맹의 윗선이 '짬짜미'와 '선수출전권' 문제에 개입되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오히려 당시 여론을 악화시키고 사건을 크게 만든것은 대한빙상연맹이었다.

이때의 아버지의 역할로 특정 일부 몇몇 언론들이나 몇몇의 일부 세간의 말들은 이것을 안현수의 탓으로 몰고 가기도 한다. 하지만 당시 안현수 아버지가 사건을 공론화 하기전에 주변에서 아들을 위해서 사건을 공개하지 말라는 주변의 만류도 있었고, 이는 무엇보다 안현수의 의지가 아니었다. 안현수는 2011년 귀화직전 인터뷰나 이후의 인터뷰에서도 선수들의 잘못은 없다고 여러번 밝힌바 있다.

2010년 벤쿠버 올림픽 남자대표팀에서의 안현수의 부재에 대해 빙상연맹은 크게 걱정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 비록 남자대표팀이 1500m에서 이호석과 성시백 충돌 사건 등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여자 대표팀에 비하면 훨씬 좋은 성적을 거뒀던 시점이었기 때문에 안현수가 밴쿠버 동계올림픽에 출전했어도 3관왕은 힘들었을 것이라는 언급도 있었다. 이후 그 다음 시즌인 2010-11 시즌에도 선발에 실패했는데, 2010-2011 국가대표 선발전은 원래 예정되어 있던 선발전 날짜가 아닌 안현수의 군사훈련 뒤로 갑자기 이동되었다. 안현수의 아버지가 빙상연맹 윗선과 감독과 코치들이 개입되었던 짬짜미를 공론화 한 직후였기에 빙상연맹이 안현수에게 불이익을 주는 것이라는 의혹이 당시 제기되기도 하였고, 성남시청 빙상팀이 해체되면서 국내대회 성적이 나쁘지 않았음에도 다른 실업 팀을 구할수 없었다. 이 2010 벤쿠버 올림픽 남자대표팀 선발전 짬짜미 사건이 터진 이후의 과정 속의 여러 논란과 이슈들 그리고, 성남시청 빙상 팀의 해체 이후 실업팀을 구할수 없었던 현실 등으로 안현수는 선수생활을 유지하기 힘들었고, 은퇴를 권유받기도 하였다. 선수생활을 계속하고 싶었던 안현수는 이로인해 러시아 귀화를 결정하게된다. #

2010-2011 시즌 동안에는 쇼트트랙 해설위원으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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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02년에 대표팀에 합류해 2008년 초 중부상을 당할 때까지 7시즌 동안 대한민국 쇼트트랙 국가대표 에이스로 활약했다. [2] 기사로 확인되는 대한빙상연맹 추천 선수 명단은 다음과 같다. 1.1995-1996 시즌 추천 국가대표 선수 #1 #2 : 채지훈, 전이경, 김소희, 이성욱(고려대) 2.1996-1997 시즌 추천 국가대표 선수 # : 최민경 3.1997-1998 시즌 추천 국가대표 선수 # : 김선태, 단 김선태는 나가노 올림픽 후보선수에 이름을 올렸으나 부상으로 경기는 뛰지 못하였고, 1998년 세계선수권과 팀 선수권 계주멤버로 활약하였다. 4.2002년 솔트레이크 올림픽 추천 국가대표 선수 # : 안현수 5. 2002-2003 시즌 추천 국가대표 선수 # : 김동성, 안현수 6. 2003-2004 시즌 추천 국가대표 선수 # : 김동성, 김현곤, 고기현, 김민정 7.2006년 토리노 올림픽 국가대표 추천 선수 # : 이호석, 최은경 [3] 민룡은 5000m 계주에서 러스티 스미스의 반칙과 니콜라 로디가리와 겹쳐 넘어지면서 큰 부상을 입어 선수생활에 타격을 입게된다.자세한 상황은 민룡 문서 참조 [4] 이사건 이후로 해외에선 안현수와 오노를 경쟁자로 인식하였다. 당시에 미국의 해설들은 안현수가 왜 실격을 받지 않는거냐고, 떠들어댔지만, # 비디오로 확인해보면 오노가 먼저 안현수를 걸어버린다. 즉, 만약 올림픽이 열린 장소가 미국이 아니었다면 리자쥔과 함께 실격을 당했을 수도 있다. [5] 결승선을 통과한 후 아쉬워하는 그의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6] 경기 종료 후 미국 코치진에게 궁시렁대는 오노는 덤이다. [7] 6차에서의 맞대결에서는 오노가 살짝 우세했다. [8] 아믈랭은 어드밴스로 결승에 진출했다. [9] 역대 최고 기록은 양양(A)의 6연패 기록이다. [10] 2010년대 후반 대한민국 여자대표팀 에이스인 최민정이 500m를 타는 방식이기도 하다. 이쪽도 스타트가 다른 500m 강자들에 비해 약한편이다. 남자부는 여자부보다 스타트가 더욱 중요하게 먹고 들어가기 때문에 2000년대 중반 이후로는 이런식으로 좋은 성적을 실현시키기는 굉장히 어렵다. [11] 1500m 초대 우승자였던 아폴로 안톤 오노는 준결승에서 중국 선수를 추월하려다가 삐끗하는 바람에 Final B에서 레이스하는 굴욕을 겪었다. [12] 참고로 여기서는 고글 착용을 하지 않았다. [13] 이후 파벌 문제와 여러 사건들이 조명받으며 이 인터뷰가 오히려 본인에게 마이너스가 됐고 잘못 알려져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 당시 이호석이 '양보할게'라고 하는 짤방이 나돈 것도 한 몫 했다.) 까이는 요인이 됐다. 이호석은 밴쿠버 동계올림픽이 끝나고 나서도 "토리노 동계올림픽 때도 이번에도 이정수에게도 양보한 적 없다"라고 해명했다. [14] 다만 안현수는 러시아 귀화 후 주종목을 1000m, 1500m에서 500m, 1000m로 변경했고, 2014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결국 500m 금메달을 따냈다. [15] 그 당시 레이스 경기는 부정 출발이 2번까지 허용되었으며 2010년부터는 한 번만 해도 실격된다. [16] 참고로 토리노 올림픽까지 자리배정은 "랜덤"이었으며 준결승 성적을 기준으로 하면 트랑블레에 이어서 2레인을 받았을 것이기 때문에 자리 배정도 따랐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라 추측된다. [17] 송석우는 2004년 세계선수권에서 종합 2위를 했을 정도로 실력이 있는 스케이터고 오세종도 각종 대회 개인전에서 수상 경력이 있는 스케이터이다. [18] 심지어 미국에서 열렸던 세계선수권 대회다. [19] 사실 사고가 아닌 이상 선수들이 고의로 블록을 건드린다는 건 굉장히 드문 일이다. 블록을 건드려서 상대의 실책을 유도하느니 자기 레이스에 집중하는게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에서 판커신이 이를 실현했다. '아이템전' 사건으로 많이 알려졌다. [20] 더군다나 이호석은 마지막 코너 이전 코너에서 안현수에게 인코스 각을 내어주지 않기 위해 인코스에 바짝 붙어 코너를 돌았는데, 이렇게 되면 인코스 방어에는 유리해지지만 코너를 크게 돌 때보다 가속은 떨어지게 된다. [21] SBS에 해당 장면이 방송됐다. [22] 도대체 누구를 죽였다는 건지 모르겠다... [23] 기사를 보면 알겠지만, 담합설 때문이 아니라 빙상연맹 부회장을 상대로 멱살 잡은 것 때문에 받았다. [24] 이호석 항목에서 볼 수 있듯이 안현수와 이호석의 친분은 상당히 좋은 편이다. [25] 그 밖에도 김현곤, 오세종, 이승훈, 송석우, 서호진, 이승재, 송경택 등이 최종 15인 안에 들었다. [26] 흔히 나도는 2006-07 시즌 2차 월드컵 1000m 3차 월드컵 1000m다. [27] 아믈랭이 경기가 끝난 후 다가와서 악수를 청할정도의 명승부였다. [28] 흔히 황금세대로 일컬어지는 한국 남자대표팀 최전성기로 꼽히는 시즌인데 우선 멤버들이 안현수를 필두로 이호석, 성시백, 곽윤기, 송경택, 이승훈이다. 장거리부터 단거리까지 모두 커버할 수 있는 멤버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당시 이 선수들이 모두 세계랭킹 10위권(1위~5위, 7위) 안에 들고 있는 정상급 선수들이었다. [29] 모두 금메달을 가져왔다는 얘기다. [30] 상대가 되는 선수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황제라는 별명이 괜히 생기는 게 아니다. [31] 중등부는 1위 입상 기록, 고등부는 3위 이내 입상 기록, 대학/일반부는 결승 진출 기록이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