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청양군 출신 독립운동가, 안창식
<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 순흥 안씨[1] |
출생 | 1838년 3월 20일 |
충청도
홍주목 화성면 행정리 (현 충청남도 청양군 화성면 신정리 청대골마을) |
|
사망 | 1899년 10월 30일 |
충청남도 청양군 |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한국의 독립운동가, 의병장.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안병찬은 그의 아들이다.
1.1. 초년기
안창식은 1838년 3월 20일 충청도 홍주목 화성면 행정리(현 충청남도 청양군 화성면 신정리 청대골마을)에서 유학자였던 아버지 안용(安溶, 1812 ~ 1884)과 어머니 전주 이씨 이남석(李南錫)의 딸 사이의 두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안용은 성근묵(成近默)의 문인으로, 1867년( 고종 4) 식년시 생원시에 3등 41위로 입격했지만 # 당대 과거시험의 폐단을 보고는 대과에 응시할 생각을 접었고, 이후 구화산(九華山) 아래에 거주하면서 자손과 인근의 학동들을 가르쳤는데 그 숫자가 수백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또한 그는 1882년 임오군란 이후 흥선대원군이 청나라로 압송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 울며 말했다."군부는 곧 일국의 신민들이 모두 부모로 모시는 바라. 국가가 기강이 점차 문란하고 사대부는 염치가 모두 없고 우리 오백년 소중화의 나라가 급속하게 어찌할 수 없는 지경으로 떨어지니 이를 장차 어찌하리오."
안창식은 이러한 부친의 밑에서 4살 때부터 한학을 수학했다. 그는 성장하면서 기개가 절개가 있었고, 독서 중에 옛 사람이 절개를 세운 단락을 보고 항상 찬탄하면서 이런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대장부가 입신하여 임금을 섬기는 데 마땅히 해야 할 말은 하고 죽어야 할 때는 죽어야 한다. 이해와 화복을 비교하여 계산함은 불가하다."
1.2. 을미의병
1896년 3월, 조선 정부는 흑색으로 된 두루마기를 입도록 한 '을미변복령'을 발표했다. 안창식은 이 소식을 듣고 중화가 무너진 것으로 보고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심했다. 그는 먼저 4월에 보령군 광천으로 가서 임정학(林廷學)과 함께 시장 상인들을 동원해 의병 계획을 추진하고자 했다. 여기에 5월 22일 박창로가 외사촌형인 안창식을 찾아와 장곡에서 의병을 일으킬 것임을 알리며 동참을 권유했다. 두 사람은 다음날 장곡에 가서 정산에 사는 이봉학(李鳳學)을 만났지만, 선달 이공렬( 李公烈)이 잘못 전달하여 부산과 홍산의 인사들이 장곡이 아닌 정예사에 모이는 바람에 일이 성사되지 못했다.이에 그들은 거사일을 6월 3일로 다시 잡고 봉수산성에서 만나기로 했다. 6월 2일, 안창식은 거사를 일으키기 위해 이세영(李世永), 이봉학(李鳳學), 정제기(鄭濟驥), 정영덕(鄭盈德) 등과 모임을 가졌다. 이때 그는 다음의 율시를 지어 자신의 뜻을 밝혔다.
본래부터 한 고을이 크게 된 것은 인물이 나서 울렸기 때문이네(元來大地以人鳴)
여기 모인 벗들도 또한 그러하니 이번 이 모임에 감사 드리네(還謝諸朋有此行)
우리나라 예부터 풍진도 많아 더러운 피비린내 겪었으며(箕甸風塵多穢臭)
중국의 문화를 우리가 빛냈으나 맑고 밝은 날은 얼마 없었네(中華日月少淸明)
차라리 세속의 흐름에 따라 친구의 굳은 우정 논할 것인가.(寧隨流俗論金契)
아직도 봄날의 성곽 안에는 벌목시의 소리가 들려오네(尙有春城伐木聲)
한조각 깊이 있는 마음과 마음이 서로 비치어 전하는 곳에(一片靈臺相照處)
자연의 정들을 자연히 끌어내네.(自然惹起自然情)
여기 모인 벗들도 또한 그러하니 이번 이 모임에 감사 드리네(還謝諸朋有此行)
우리나라 예부터 풍진도 많아 더러운 피비린내 겪었으며(箕甸風塵多穢臭)
중국의 문화를 우리가 빛냈으나 맑고 밝은 날은 얼마 없었네(中華日月少淸明)
차라리 세속의 흐름에 따라 친구의 굳은 우정 논할 것인가.(寧隨流俗論金契)
아직도 봄날의 성곽 안에는 벌목시의 소리가 들려오네(尙有春城伐木聲)
한조각 깊이 있는 마음과 마음이 서로 비치어 전하는 곳에(一片靈臺相照處)
자연의 정들을 자연히 끌어내네.(自然惹起自然情)
안창식과 참석자들은 서로의 뜻을 확인한 뒤 6월 9일 청양장터에서 의병을 일으키기로 했다. 그러나 당일 집결한 이는 안창식과 박창로 뿐이었다. 안창식은 아직은 의병을 일으킬 때가 아님을 깨닫고 의병 계획을 중지했다. 그러다가 8월 20일 명성황후가 일본인 낭인들에게 처참하게 시해당한 을미사변이 벌어졌다. 이 소식을 접한 이세영, 박창로, 정제기, 송병직, 조병고, 김정하 등은 9월 하순 이세영의 집에서 재집결했다. 이들은 앞으로의 군사활동에 대한 원칙을 재획안 하고 군사 모집과 무기 수집 등의 구체적인 행동에 들어갔다. 이때 안창식은 다른 곳에서 모임을 갖느라 직접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10월 2일 정제기를 찾아가 무기와 군사 모집에 관한 일을 협의했다.
이들의 거사 계획은 11월 15일 단발령이 공포된 후 더욱 구체화되었다. 안창식은 단발령이 내려졌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 안병찬에게 "나는 늙어서 왕사에 전력할 수 없으니 너는 전력하도록 하라. 나는 뒤를 따라서 대책을 세워 응하겠다."고 말하고 의병 봉기를 지시했다. 이후 그는 청양 유생 채광묵과 장자 안병찬 등과 함께 1895년 11월 28일 화성에 사는 이인영의 집에서 '향회'를 실시해 홍주 일대 유생들을 집결시키고 군사 활동을 결행하기로 뜻을 모았다.
11월 29일, 안병찬과 채광묵은 의병 180명을 집결시키고 이들을 인솔해 홍주성에 먼저 입성했다. 안병찬은 관찰사에게 의리를 들어 의병에 참여할 것을 호소했고, 다음날 다시 부민을 단발시키지 말라고 내부에 건의할 것을 요구했다. 의병들은 12월 3일 홍주부 내에 창의소를 설치하고 김복한을 총수로 추대했다. 안병찬은 김복한과 함께 창의소에 있으면서 의병을 지휘했지만, 12월 4일 관찰사 이승우가 그들을 모조리 체포하면서 이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안창식은 아들이 체포되었으며 자살을 시도했다는 말을 듣고 애태우다가 12월 20일에 역시 체포되어 홍주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는 옥중에서 아들을 만나게 해주길 요구했으나 거부당하자 다음과 같은 내용의 한시를 지어 답답한 심정을 표현했다.
천지가 어찌 이리 어둡고 차기만 한가(天地何晦寒)
지사가 의리를 펴지 못하네(志士未申義)
후면에는 공자의 위패가 있고(後有文宣宮)
앞면에는 선생들의 위패가 있는데(前有先生殿)
뒤를 보아도 부끄러운 일 없고(後瞻無所愧)
앞을 보아도 저버린 일 없구나(前瞻無所負)
부자가 함께 옥에 있으니(父子同就獄)
도로 세인의 웃음거리가 되리라(還爲世人笑)
지사가 의리를 펴지 못하네(志士未申義)
후면에는 공자의 위패가 있고(後有文宣宮)
앞면에는 선생들의 위패가 있는데(前有先生殿)
뒤를 보아도 부끄러운 일 없고(後瞻無所愧)
앞을 보아도 저버린 일 없구나(前瞻無所負)
부자가 함께 옥에 있으니(父子同就獄)
도로 세인의 웃음거리가 되리라(還爲世人笑)
안창식은 홍주관찰부에 압송되어 관찰사 이승우의 문초를 받았다. 그는 이승우가 처음 창의한 뜻을 뒤집고 동지들을 배반한 것을 힐책했다. 이후 12월 26일 경무관 강호선의 문초를 받았는데, 그는 이 자리에서 '곤전(坤殿: 왕비를 달리 이르는 말)'이 역적의 무리에게 시해당한 일과 임금의 상투가 강제로 잘리는 변을 보고 창의했음을 분명히 밝혔다.
어미가 남에게 살 해되었는데 자식이 복수할 생각을 갖지 않는다면 자식의 도리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아, 슬프다. 우리 곤전(坤殿)은 30년 동안 군림한 어머니이다. 역적의 무리에게 시해를 당하으니 복수하고자 하는 것이다. 복수하고자 하는 사람을 역적이라고 하니 모후를 시해한 자를 충절이라고 말하느냐. 아래 사람이 윗사람의 상투를 잡고 수염을 뽑는 일도 오히려 패례(悖禮)로 말하거늘 황차 임금이 강제로 상투를 잘리는 변을 당했는데도 역적을 토벌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신하의 도리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역적을 치려는 사람을 역적이라고 한다면 강제로 상투를 자른 자가 충절이 된단 말이냐? 충절과 역적의 구별은 일반의 여론이 있을 터인데 어찌하여 감히 더할 수 없는 지존(至尊)에 하여 말만 하면 곧 역적 역적 하느냐?
그러자 강호선은 안창식에게 고문을 가했다. 그는 매질을 당해 다리가 부어올라 걸을 수 없어 사환들이 메다가 수감할 정도였다. 이후 12월 30일 경무청에서 수감자들을 경무소 밖에 칼을 채우고 손을 묶은 채 일렬로 앉혔다. 이때 안창식, 안병찬 부자가 상면할 수 있었다. 안병찬은 핏자국이 있는 바지와 저고리를 입고 있었으며, 수건으로 목을 싸고 있었으며, 채 아물지 못하여 뼈가 드러나고 살은 비틀리고 얼굴은 누렇게 떠 있었다. 안창식은 그런 아들의 모습을 보고 말했다.
"부자가 다 극형을 받는다면 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만약에 선택 구분이 있다면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옳다."
그러자 안병찬이 말했다.
"이 무슨 말씀입니까. 소자가 범한 일은 꼭 죽겠다는 뜻을 고수한 것이니 죽는 것이 당연하겠습니다. 또 윤리 면과 집안 형편의 처지에서 보더라도 만약에 부주(父主)께서 이 지경에 이르면 전 가족을 어떻게 꾸려가겠습니까. 마음을 너그럽게 하시고 너무 걱정하지 마옵소서."
이설(李偰)은 이 광경을 보고 찬탄했다.
“부자가 다투어 죽고자 하니 드문 일이다. 옛 사람 공포(孔褒)[2]와 비교하여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
1.3. 최후
안창식은 1896년 음력 1월 5일 방면되어 귀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고문의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3년 후인 1899년 10월 30일에 사망했다. 향년 62세. 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 안창식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또한 장자 안병찬은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고, 차자 안병림은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수안군 출신 독립운동가, 안창식
성명 | 안창식(安昌湜) |
생몰 | 1886년 2월 11일 ~ ? |
출생지 | 황해도 수안군 수안읍 석교리 |
사망지 | 미상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안창식은 1886년 2월 11일 황해도 수안군 수안읍 석교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천도교 신자로, 1919년 3월 3일 이경섭(李景燮), 안봉하(安鳳河) 등이 주도한 독립만세시위 계획에 참여했다. 그러나 헌병대가 이를 감지하는 바람에 체포되었고, 체포되지 않은 홍석정, 한청일 등이 계획대로 3월 3일에 수안군 읍내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이일로 재판에 회부된 안창식은 1920년 1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3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그의 행적 및 사망년도, 사망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안창식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참판공파-장사랑공파 26세 식(植) 항렬.
[2]
후한 말,
장검은 환관들을 비판했다가 쫓기는 신세가 되자 오랜 친구인 공포를 찾아갔다. 이때 공포는 집에 없었고 동생
공융이 그를 숨겨줬다. 나중에 공융이 장검을 숨겨준 일이 발각되자 장검은 도망쳤지만, 공융과 공포는 이에 대해 조사를 받기 위해 체포되어 송치되었다. 체포될 적에 공융은 자신이 장검을 받아들였으니 공포는 이 일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공포는 장검이 찾아온 사람은 자신이니 공융과는 무관한 사건이라 주장했다. 담당 관리가 누구를 죄줄지 정하지 못하고 공융 형제의 어머니에게 아들 중 누구를 죄줄지 묻자, 어머니도 집안 일은 주인이자 어른인 자신의 책임이며 두 아들은 죄가 없다고 주장했는데, 이토록 서로가 자신이 책임지고 처형받겠다고 다투는 전례 없는 일 때문에, 결국 군국에서는 판결을 못 내려 끝내는 사건이 조정에 보고되었다. 그 결과 공포에게 죄를 물어 처형하라는 조서가 내려와 공포가 처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