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적의 축구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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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eeee,#191919><colcolor=#000000,#e5e5e5> 이름 |
안영학 安英學|An Yong-hak[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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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78년 10월 25일 ([age(1978-10-25)]세) | |
일본 오카야마현 쿠라시키시 | ||
국적 | 조선적[2] ( 일본 특별영주자) | |
본적 | 대한민국 전라남도 광양시[3] | |
본관 | 순흥 안씨 (順興 安氏)[4] | |
신체 | 182cm, 75kg | |
직업 |
축구 선수 (
수비형 미드필더 / 은퇴) 축구 감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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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도쿄조선제3초급학교 도쿄조선중고급학교 (졸업) 릿쇼대학 (학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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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
알비렉스 니가타 (2002~2004) 나고야 그램퍼스 (2005) 부산 아이파크 (2006~2007) 수원 삼성 블루윙즈 (2008~2009) 오미야 아르디자 (2010) 가시와 레이솔 (2011~2012) 요코하마 FC (2014~2016) |
감독 | 재일 한국-조선인 축구 대표팀 (2018) | |
국가대표 | 37경기 3골 ( 북한 / 2002~2012) | |
링크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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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재일 조선인 3세인 축구 선수 출신 감독 K리그와 J리그, 그리고 북한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뛰었다. 현재 일본 요코하마에서 유소년 클럽을 운영하고 있고 조선학교 후배들에게도 무료로 축구를 가르치고 있다.국내 축구 잡지 포포투에서 칼럼을 연재한 바 있으며 해당 칼럼 연재분을 묶어 夢に輝く 꿈은 이루어진다 라는 칼럼집을 출간하기도 했다. 현재 포포투와의 연재 계약은 종료되었으나 메일링 서비스를 통해 꾸준히 자신의 축구 인생 소식을 칼럼으로 전하고 있는 중.
2020년 9월 5일, 유튜브를 개설했다. #
2. 클럽 경력
2.1. J리그 1기
릿쇼 대학 시절의 안영학. 맨 앞 왼쪽에 있다.
5살 때 부모를 따라 도쿄로 이사해 도쿄조선제3초급학교, 중고급학교 중, 고급부를 거쳐 릿쇼 대학으로 진학하였는데, 그러던 중 대학 1년차 선배인 아라이 켄지를 확인하고 있었던 알비렉스 니가타 스태프에게 발견되어 졸업 후인 2002년에 입단하였다. 니가타에서는 미드필더로 활약하며 2003년에 J2리그에서 우승함과 동시에 팀의 J1 승격에 공헌하였으며 승격한 뒤인 2004년에는 팀의 주축 선수로 활약하였다. 그 후, 2005년에 나고야 그램퍼스로 이적하여 21경기에 출장하였다.
2.2. K리그
2006년부터 부산 아이파크에서 뛰면서 K리그에 입성했다. 사실 처음에는 인천 유나이티드로 이적설이 돌았으나 안영학 측에서 많은 계약금을 요구해 난항을 겪게 되자 협상이 결렬됐고, 이에 부산 아이파크가 적극 나서 영입에 성공하면서 2시즌간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다. 올스타전에도 선발되는 K리그를 대표하는 선수였다. 그러나 2007년 9월 22일 성남 일화 전에서 김영철과의 충돌로 인하여 신장에 부상을 입으며 선수생활에 위기가 찾아왔다. 부산에서는 2시즌 동안 39경기에 출전해 5골을 기록하였다.
2008년 안정환과의 맞트레이드 형식으로 수원 삼성 블루윙즈로 이적하였지만, 2008년에는 9경기 출장에 그쳤고, 2009년에도 9경기 1골에 그치며 별다른 활약이 없었다. 그래도 2008년과 2009년에 팀의 K리그, FA컵, 컵대회에서 우승을 경험하였다.
2.3. J리그 2기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을 앞두고 출장 기회를 얻기 위하여 오미야 아르디자로 이적해 5년 만에 J리그로 돌아왔다. 그러나 시즌 중반에 성적 부진으로 장외룡 감독이 사퇴하자 새로 감독에 취임한 스즈키 준으로부터 평가를 받지 못했고 남아공 월드컵이 끝난 직후에도 후반에 들어서 거의 나가지 못했다.2011년에는 가시와 레이솔으로 이적하였으나 8경기 출장에 그쳤고, 2012년 말 팀을 떠났다.
이후 2013년 1년간은 소속팀 없이 무적 상태로 보내다가 2014년에는 J2리그 소속의 요코하마 FC로 이적하였지만, 잦은 부상과 노쇠화로 인해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하면서 2016년 말 방출됐다. 이후에도 현역 연장을 노렸지만 결국 팀을 찾지 못하고 2017년 3월 현역 은퇴를 선언하였다. #
은퇴 후 현재 주니스타 축구교실에서 지도자 겸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
3. 국가대표 경력
2002년 9월 7일 서울에서 열린 남북 통일축구 경기 대한민국전에서 북한 대표로 데뷔하였다. 2004년 9월 8일 독일 월드컵 예선 태국전에서 A매치 데뷔 골을 포함한 2골을 기록했다. 이후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공화국 본선 엔트리에 정대세와 함께 포함되었으며, 주전 미드필더로 조별리그 3경기에 풀 타임으로 출전하였다.2008년 수원 소속 당시, 6월 22일 치러진 월드컵 3차 예선 대한민국전에 출전하며 북한 대표 유니폼 아래 수원 유니폼을 받쳐입은 것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수원 선수로서의 자긍심과 국가대표로서의 자부심을 함께 표현하고 싶었다고.
4. 플레이 스타일
활동양을 기반으로 안정적인 중원을 구성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하드워커 타입의 수비형 미드필더였다. 다만 부산 아이파크 말기에 입은 신장 부상으로 인해 기력이 떨어져 내리막길을 걸은 안타까운 경우.5. 여담
- 조선학교 출신으로 북한 국가대표로 활약했지만 대한민국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은 없는 듯. 그의 인터뷰를 봐도 한국에 대해 긍정적으로 이야기한다.[5]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홍명보 유니폼을 입고 대한민국을 응원했다고 하며 이탈리아전 안정환의 골든골을 보고 크게 감동받아 자신의 좌우명을 '꿈을 이루어진다'라고 정했다고 한다. # 인스타그램 계정은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의 주장인 손흥민을 팔로우하고 있으며 포르투갈을 누르고 16강에 진출한 포스트에 좋아요를 눌렀다.
- 오미야 아르디자 시절 팀 동료였던 이천수가 푼 썰에 의하면 팀이 괌으로 전지훈련을 갔는데 안영학은 이때 전지훈련을 못 가고 일본에 남아 개인 훈련을 했다고 한다. 괌이 미국령이라 조선적이라는 특수한 신분으로 비자가 안나왔기 때문이다.[6]
- 아내[7]와 아들, 어머니와 형님까지 가족들은 대한민국 국적으로 변경했다고 한다. 조선적은 무국적 신분으로 해외 출입국이 매우 힘들어 여러모로 불편하고 냉전시대의 종말과 북한의 몰락으로 남북한 간의 체제 경쟁이 의미가 없어지고 민단과 조총련간의 대립도 멈춘 90~00년대부터 이들의 다수는 한민족이란 정체성이 강하면 호적상 국적을 대한민국으로 변경하고, 아니면 본인이 태어나고 살고 있는 일본으로 귀화를 하여 조선적을 벗어나고 있다.[8]
- 정대세와 함께 재일교포 선수 최초 북한 국가대표로 월드컵 본선까지 참가하여 조선학교 출신 축구 선수들의 롤 모델이 되고 있고 현재 조선학교에서 축구를 지도하는 입장으로 여러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개인적 신념과 상징적 의미로 조선적을 유지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본인은 조선적으로 불편함이 없는 날이 올 거라 믿으며 그 날을 기다리고 있다고 밝혔다. #
- 2020년 나이키 광고에 나온 자이니치 관련 문제에 대한 BBC 뉴스의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 뭉쳐야 찬다 3의 2023년 11월 19일 방영분에 출연하여 레벨 테스트의 J1리그 대표와 FC 요코하마코리아 감독으로 출연했다.
6. 관련 문서
[1]
본인 유튜브에서는 'An Yeonghag'으로 표기
[2]
북한 국적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지만 일본과 북한은 미수교국으로 일본 거주 일본 영주자는 북한 국적을 취득할 수 없고 취득한다고 해도 일본에서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홈페이지의 질의응답에서는 남북의 축구협회가 재일동포를 내국인으로 취급하므로 북한 국가 대표가 되기 위해 북한 국적으로 "귀화"할 필요가 없었다고 한다. 조선적은 남북한 모두 국적법에 의해 내국인이므로 "귀화"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고 한다.
국내에서 편의상 조선적 재일동포를 북한 국적으로 간주하는 경우가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3]
기사
[4]
2023년 11월 19일에 방송된
뭉쳐야 찬다 3 7회에서 밝혔다.
[5]
부정적으로 생각했다면 K리그에서 뛰지도 않았을 것이다.
[6]
조총련 재일교포를 다룬
GO(영화)에서도 주인공의 아버지가 하와이를 가기 위해
조선적을 버리고 한국 국적을 취득하는 장면이 나온다. 여담으로 안영학의 조선학교 직계후배인 정대세는 부계 혈통주의 원칙 때문에
대한민국 국적이어서 북한 대표팀 전력에도 불구하고 미국령 입국이 가능하다(...)
[7]
2009년
수원 삼성 소속 시절 고교 동창인 같은 재일교포 아내와 결혼
[8]
대한민국 국적자라도 어쨌든 일본에선 외국인 영주권자 신분으로 투표권도 없고 전보다 많이 나아지긴 했으나 아직 한국인에 대한 차별적인 시선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기 때문에 일본 귀화를 해서 사는 것이 훨씬 편리하긴 하다. 아이러니하게도 민단계 재일교포보다 조총련계 교포들이 민족 정체성이 강해 일본 귀화에 거부감을 가지고 일본 귀화보다는 차라리 대한민국 국적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