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안낙생(安樂生) |
생몰 | 1913년 6월 22일 ~ ? |
출생지 |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리 |
본관 | 순흥 안씨 |
사망지 | 미상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안낙생은 1913년 6월 22일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안중근의 동생 안공근의 둘째 아들로, 부친과 함께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1931년 부친과 함께 한인애국단에 가담했고, 이봉창이 일본으로 출발하기 직전에 침구를 건네받고 이를 김구에게 전달했다. 또 1934년 봄 김구가 한국과 중국 간에 국제적 연대를 형성하기 위해 중국 국민당정부 주석 장제스의 후원하에 낙양에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내에 한인특별반을 조직하자 여기에 입학했고, 12월 하순에 졸업한 뒤 한국특무대독립군(韓國特務隊獨立軍)에 소속되어 특무공작 활동을 전개했다.한편 안낙생은 1932년 4월 윤봉길이 훙커우 공원 의거를 감행하기 직전에 윤봉길이 태극기를 배경으로 양손에 폭탄을 들고 가슴에 선서문을 건 모습을 자신의 집에서 촬영했다. 또한 유상근, 최흥식(崔興植)이 거사하기 전에도 기념촬영을 담당했으며, 이덕주(李德柱), 유진만이 거사를 단행하기 위해 파견될 때에는 권총과 탄환 은닉 방안을 고안하여 이를 숙지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1938년 11월 28일 상하이에서 특무공작을 수행하던 중 상하이 일본총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인천으로 압송되었고, 1940년 5월 24일 해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그의 행적 및 사망년도, 사망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안낙생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