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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33:52

아카츠키(구축함)

파일:attachment/후부키급 구축함/akazuki.jpg
후부키급 특3형 1번함 아카츠키
아카츠키급 구축함
아카츠키 히비키 이카즈치 이나즈마
진수일 1932년 5월 7일
취역일 1932년 11월 30일
퇴역일 1942년 12월 15일
취역 기간 1932년 ~ 1942년
제원
전장 118.41미터
전폭 10.4미터
흘수 3.2미터
배수량 1,780톤
배수량(재건조) 2,050톤
보일러 함본식 보일러 4기
터빈 로호 함본식 증기터빈 2축
속력 38 노트
함포 127mm 50구경 2연장 함포 x 6문
어뢰 610mm 3연장 어뢰발사관 3기
610mm 93식 어뢰 24발
대공포 96식 25mm 대공포 28정
폭뢰 36개

1. 개요2. 성능3. 함생4. 매체에서의 등장

1. 개요

일본어:暁 (あかつき 여명)
일본군 해군 후부키급 구축함의 21번 함이자, 아카츠키급 구축함의 1번함.
아카츠키는 후부키급 구축함에 해당되지만, 서류상에서는 특3형 구축함으로 분류되어 있다. 기존의 함급의 문제점을 개선하고 각종 개량을 거치면 새로운 함급을 얻게 되는데, 아야나미, 아카츠키급 같은 경우 특형 구축함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유지했고, 개선 사항에 따라 특1형, 특2형, 특3형 구축함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특1형은 후부키급, 특2형은 아야나미급, 특3형은 아카츠키급으로 불리어지며, 지금은 특형 구축함 전체를 몽땅 통틀어서 후부키급이라고 불린다.

2. 성능

아카츠키는 기존의 후부키급 구축함에 몇가지 개량이 이루어졌다. 우선 당시 신형에 해당되었던 함본식 보일러를 장착함으로써 출력을 높임과 동시에 전방 연돌을 축소했다. 그리고 기존의 후부키급에 비해 포탑의 부앙각이 75도로 늘어나면서 대공사격에 유리해졌다. 게다가 어뢰도 기존의 8식 어뢰가 아닌 93식 어뢰를 장착함으로써 대함 화력을 높였다. 어뢰발사관도 대폭 개량해서 파편방지 어뢰 발사관으로 교체해 어뢰발사관의 신뢰성을 높였으며,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각종 포탄의 파편에도 어느정도 방호능력을 얻게 되었다.

3. 함생

아카츠키는 1930년에 건조명령을 받고 사세보 해군공창에서 건조를 시작했다. 여기서 아카츠키는 기존의 후부키급 구축함을 대폭 개량한 특3형 구축함으로 건조되었다. 1932년 5월 7일에 진수식이 이루어졌으며, 같은 해 11월 30일에 정식으로 취역하게 된다.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이 발발한 이후 아카츠키는 제1함대 제1수뢰전대 6구축대에 소속되고, 이후 남방작전 당시 말레이 반도 상륙작전에 지원한다.

정식으로 취역이 되는 동시에 이나즈마, 히비키, 이카즈치과 함께[1] 일본 해군 제1함대(일본군)에 소속된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되자 중국 양쯔강에서 초계임무를 맡았다. 이후 ABDA 통합작전사령부의 네덜란드 휘하의 자바섬 침공에 지원을 맡았다. 이때 미국의 잠수함 퍼밋 호(USS Permit,SS-178)를 발견, 공격했으나 격침에는 실패했다.

이후 1942년 3월 요코스카 해군공창에서 각종 정비/수리를 받았다. 이후 아카츠키는 알류샨 열도 점령 및 쿠릴열도 수호를 위해 북방함대에 소속되고, 알류샨 열도 점령 작전 도중에 큰 손상을 입은 히비키을 예인했으며, 이후에도 계속 알류샨 열도 근처로 순찰을 했다.

7월에 요코스카 항에서 정비를 마친 뒤, 항공모함 즈이호 운요를 트럭 섬까지 호위했다.

1942년 10월, 과달카날 전역으로 재배치되었다. 이후 대규모 수송작전 도쿄 익스프레스에서 고속 수송 업무를 맡았다.

1942년 10월 25일, 아카츠키는 이카즈치, 시라츠유와 함께 과달카날의 아이언 바텀 사운드에서 작전을 수행했다. 도중에 미 해군의 소해함, 예인선과 경비정 YP-284호를 격침시켰다. 이 와중에 과달카날에 설치된 미군의 해안포에 두들겨 맞았다. 그 결과 3번 포탑이 손상되었고, 4명이 사망하였다.

1942년 11월 12일 늦은 밤, 아이언 바텀 사운드에서 미 함대와의 과달카날 해전이 일어났다.당시 아카츠키는 일본의 공고급 순양전함 히에이 기리시마를 호위하고 있었는데, 처음 미 함대를 발견 한 뒤 적 경순양함과 구축함을 발견했고, 이후 이들을 향해 함포와 어뢰를 발사했다. 하지만 어뢰와 함포는 맞지 않았고 오히려 아카츠키의 함포 발사 위치를 간파해 미 함대는 아카츠키가 있는 쪽으로 집중포화를 개시했으며, 아카츠키는 얼마 안가 미 해군의 집중포화를 견디지 못하고 격침되었다. 격침 당시 소수의 생존자들만 살아남았으며, 모두 뉴질랜드의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
참고로 유다치의 오사로 격침됐다는 설도 있다. 당시 미군과 일본 양쪽의 전투기록을 대조해보면 아틀란타가 좌우로 각각 1500m 거리에 유다치와 아카츠키를 끼고 있는 상황. 그리고 이때 유다치의 전투기록에는, 아틀란타에게 어뢰를 발사해 명중시킨 뒤 '아틀란타의 건너편 3000m 거리에 있는 함'을 향해 이 배가 가라앉을 때까지 집중사격을 가한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당시 전투는 대단한 혼전이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이 보고서에 적혀있는 '거리 3000m', '탐조등을 비추고 있다', '불타고 있다', '오른쪽으로 기울고 있다', 등의 조건을 모두 충족시키는 것은 해당 전장에서 일본군과 미군의 함선 모두를 통틀어 아카츠키밖에 없다(…). 참고로 당시 유다치는 이 함을 뉴올리언스급 중순양함이라고 판단하고 있었으나, 해당 전투에 참여한 뉴올리언스급은 샌프란시스코 한척뿐이며, 이 함은 상당한 대미지를 입었지만 침몰하지는 않았다. 또한 유다치는 이 때 경순양함 나가라에게도 오사를 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가설이며 대다수 의견(위키피디아 등)은 오사 가설을 지지하지 않음에 유의.

1942년 12월 15일, 아카츠키는 해군으로부터 제적되었다.

4. 매체에서의 등장



[1] 4척 다 아카츠키와 같은 특3형 구축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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