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고급 순양전함 | |||
공고 | 히에이 | 하루나 | 기리시마 |
1. 개요
공고급 순양전함의 2번함. 일본의 전함들중에서 기리시마, 공고, 하루나와 함께 몇 안되는 실전을 제대로 치른 전함이며, 1942년 11월 과달카날 해전에서 최후를 맞이하였다. 명칭의 유래는 히에이 문서의 1번.히에이는 야마토급 전함의 함교 디자인 설계를 위한 테스트베드로 활용되었기 때문에, 잘 보면 자매들과 함교 디자인이 다르게 생겼다.
건조 시작 | 1911년 11월 4일 |
진수 시작 | 1912년 11월 21일 |
취역 | 1914년 8월 4일 |
격침 | 1942년 11월 14일 |
2. 탄생, 그리고 시작된 1차 세계 대전
1910년, 일본 해군의 순양전함 건조계획의 일환으로 4척의 순양전함을 건조하는데 이 4척 모두가 공고급 순양전함이었다. 여기에는 히에이도 있었다.1911년, 일본 해군에 의해 건조명령이 내려졌고, 영국에서 건조된 뒤 일본에게 공여된 공고급 순양전함 1번함인 공고의 설계도와 자재를 영국에게 넘겨받아 자체적으로 건조했다. 히에이는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날 무렵인 1914년 8월 4일, 정식으로 취역했다. 제1함대에 배치된 뒤 10월 7일, 독일이 지배하고 있던 칭다오 요새 공략전에 포격지원을 했다. 그런데 유틀란트 해전 이후 순양전함의 문제점이 드러나기 시작했고, 공고를 비롯한 4척의 순양전함은 1선에서 2선급으로 물러났다.
3. 전간기
전쟁이 끝난 후,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으로 인해 더 이상의 전함 보유가 불가능해졌다. 일본은 어떻게든 남아있는 구식 전함들을 최적의 성능으로 끌어오르기 위해 갖가지 노력을 기울였다. 그래서 1923년 포탑 개량 작업이 이어졌고, 1927년 10월 일본 제국의 황자인 타카마츠가 히에이가 정박한 사세보 항에 방문한 것을 계기로 캐터펄트, 대공포 장착등의 소규모 개장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을 체결한 열강들이 일본 해군을 비난하기 시작했고, 설상가상으로 런던 해군 군축조약이 체결되면서 배를 강제로 폐함해야하는 상황이 다가오자, 일본 해군은 전함 한척이라도 아까운 히에이를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그래서 일본 해군은 히에이의 장갑을 떼어내고 속도를 18노트로 낮추는 등 훈련함으로 개조했다.[1]이때 2번함인 히에이를 훈련함으로 처리한 것이 공고가 영국제라 장갑재가 더 우수했었기에 그랬다는 일본측의 의견도 있는데, 사실인 듯 하다.[2]
훈련함으로 개조한 히에이. 자세히 보면 후면의 14인치 주포와 측면의 6.1인치(155mm)부포가 제거된것을 알 수 있다.
이후 무장이 일부 철거된 뒤로 함내 훈련용, 지휘용 공간이 넓어지면서 천황의 탑승함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여유공간을 개조하여 천황을 비롯한 주요 지휘부가 타고 머무를 공간을 확보한 것이다. 때문에 어소함(御召艦, 오메시)으로도 불렸다. 대강 에어 포스 원같은 느낌. 긴박한 사태가 벌어질 경우 천황이 히에이에 탑승하여 지휘를 맡는 계획도 있었다고 한다. 천황의 배로 언론에서 다뤄지며 당시 일본 내에서 나가토와 무츠 못지 않은 인기를 누렸었다. 일본인에게 가장 친근한 전함이었다고 한다. 때문에 당시 히에이의 보급 수준은 구형 훈련함치고는 상당히 좋았고 특히 식사의 수준이 매우 좋았다고 한다.
2년 뒤, 1931년 9월 일본이 중국 만주 지역에 침략한 뒤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웠다. 1년 뒤, 히에이는 일본 해군의 훈련 전대에 제편되어 만주국으로 병력과 물자를 수송했다. 이를 계기로 전세계 열강들이 일본 제국을 비난하기 시작했고, 1937년에 일본은 조약을 탈퇴했다. 이 때 일본은 편법으로나마 탈퇴는 했지만 워싱턴 조약은 자체적으로 충실히(?) 지킨다는 보고서를 제출했는데, 어이없게도 서구 열강들은 그것을 곧이 곧대로 믿어버린다.
4. 대개장
히에이는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에 의하여 연습함으로 변경되어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후에 조약 탈퇴를 하면서 히에이를 복귀시켜 동급함처럼 개장을 했는데 변경사양은 다음과 같다.- 철거되었던 4번 포탑 부활, 마찬가지로 철거되었던 현측장갑 재 장착
- 주포탑 장갑을 증대
- 주포는 양각 43도로 증대, 따라서 최대사거리인 35,450m를 확보한다.
- 부포 역시 양각 30도로 증대, 따라서 사거리 19,500m를 확보한다.
- 그외 기관 및 함미 길이 연장은 동급함과 동일하다.
- 천황이 묵던 지휘실이나 불필요한 시설 철거
- 벌지 장착으로 부력 상승
- 127mm 연장 고각포의 지휘장치를 94식 고사장치로 함 (동급함은 9세트 고사장치)
- 파고다 마스트 대신 야마토와 비슷한 형태의 마스트로 개장
- 주포탑 선회용 유압 펌프에 야마토급 형식의 테스트로 브라운 보 베리 (현 ABB 그룹) 터보 펌프 1 대를 도입해 높은 평가를 얻었고, 이후 야마토급에 적용됨.
- 내부의 화약고, 냉장고, 응급 주 배수 장치, 급속 주 배수 장치를 야마토급이 채용 예정인 것을 탑재.
5. 2차 세계 대전
실전 배치후 진주만 공습에 참가했지만, 전투의 주역은 함재기들이라 활약할 기회는 전혀 없었고. 1942년 1월부터 다른 공고급 전함들과 함께 트럭 섬[3]을 근거지로 삼아 남방함대들의 호위및 포격 임무를 수행했다. 그리고 미드웨이 해전에도 참가했지만 별동대인 곤도 함대에 소속이 되어, 정작 아군 항공모함들이 터져나갈때 함대는 멀리 떨어져있어 전투에 영향을 주지 못했다.6. 최후
이렇게 하염없이 호위임무에 종사하거나 전면에 나서더라도 전투할 기회는 받지 못했지만, 1942년 8월부터 시작된 과달카날 전역으로 인해 기회를 잡게 된다. 호주를 압박할 목적으로 일본 해군은 과달카날 섬에 비행장을 건설했지만, 완공직전에 미 해병대에게 빼앗겼고 미군이 개미지옥처럼 일본군 육군과 해군을 계속 끌어들이는 바람에 대본영과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성질을 박박 긁었다. 1942년 10월에 핸더슨 비행장과 미 해병대원들을 날려버리려고 육군 38사단 전 병력을 보내 수송선 11척으로 수송을 하고, 곤도 노부타케 중장의 2함대에게 호위및 10월 14일에 공고와 하루나의 포격처럼 비행장을 갈아 엎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곤도 중장은 11전대 사령관인 아베 히로아키 중장과 함께 히에이, 기리시마를 보내기로 결정했고, 11월 초에 출항한 함대들은 12일에 미 공군의 정찰기에 발각되었다. 미 해군에서는 대니얼 J. 캘러헌 제독과 노먼 스콧 제독의 순양함 부대에게 요격을 맡겼지만, 아베 중장이나 태평양 함대 사령부도 미 해군이 저지할 것이라는 생각을 전혀 안했고, 미 해군은 아베 함대에게 반격하기 위해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와 전함 워싱턴, 사우스 다코다를 위시한 16 임무부대를 급히 출항시킨 상태였다.13일 새벽 양측 모두 서로의 존재를 인지했지만, 캘러헌의 현실성 없는 명령[4][5] 과 아베의 안이한 판단[6][7] 으로 인해 난전이 되었다. 문자 그대로 '불 나간 술집의 난투극' 수준의 난전 중, 순양함 샌프란시스코에서 좌현의 히에이를 발견하고 캘러헌이 전 함대의 공격목표를 히에이로 정했다. 히에이는 바로 반격해 샌프란시스코의 함교를 박살내고 캘러헌을 전사시켰으나 미 함대의 주 목표는 히에이를 향해 있었고, 히에이도 적의 공격을 맞아가면서 탐조등으로 함대의 공격 방향을 이끌었다.[8] 하지만 난전 중 어둠을 틈타 미군의 벤슨급 구축함 래피가 충돌 직전의 10미터 거리까지 접근, 히에이의 함교를 대공포로 긁어버려[9] 참모들이 전사하고 아베 역시 부상당해 일본 함대는 철수를 결정했다.[10]
그러나 이미 날은 밝았고, 전투로 인해 누적된 피해로 대공 전투가 어려운 상황에서, 이미 중순양함 샌프란시스코가 근거리에서 발사한 포탄에 손상을 입어 침수가 진행되던 타기실이 핸더슨 비행장에서 출격한 어벤저 뇌격기가 쏜 어뢰에 맞아 조타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채 직진을 하지 못 하고 빙글빙글 돌기만 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당연히 야마모토 제독은 귀중한 전함을 무슨 일이 있더라도 트럭까지 살려오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아베는 불가능하다는 회신을 보냈고 야마모토는 명령을 취소한다. 오후까지 전 승무원이 퇴함하자는 아베와 그 선택이 충분히 노력한 것인지 의문스러운데다가 황거함을 쉽게 포기하는 것이 불명예스럽기까지 하다고 주장하는 니시다 마사오 함장과의 논쟁으로 인해 시간을 낭비했고, 그 와중에 배치가 완료된 16임무부대의 엔터프라이즈로부터 공습까지 당한다.
결국 히에이의 복구는 실패했고, 18시에 기관실이 침수가 돼서 함 자체를 못살리는 지경까지 가서야 퇴함을 하고 배수 밸브를 열어 자침시켰다. 마음이 바뀐 야마모토는 뒤늦게 히에이를 자침시키지 말고, 해상에 방치해 공격을 분산시키라는 명령을 18시 15분에 내렸으나 너무 늦은 명령이였다.
결국 순양전함 히에이는 과달카날 해전에서 가라앉은 다른 군함들과 마찬가지로 아이언 바텀 사운드에서 함생을 마치게 된다.
2019년 1월 31일 폴 앨런의 조사팀이 사보 섬 북서쪽 985m 심해에서 히에이의 잔해를 발견했다. NHK 보도 이번에 발견된 잔해는 함미쪽으로, 함수쪽 70m 가량이 사라져 있어 퇴함 이후 유폭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추정하고 있다. 히에이의 운명을 바꾼 방향타 손상 역시 확인되었다.
7. 관련 항목
[1]
배수량이 20,000톤 넘어가던 전함의 장갑을 떼어내고 속도를 낮추어 실전용으로 맞지 않게 훈련함으로 개조한 경우는 보유를 인정했다. 이를 이용해서 간신히 히에이를 살릴 수 있었다.
[2]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에서 합의한 내용에 따르면, 공고를 먼저 폐기하고 그 다음에 히에이를 폐기하기로 되어 있었다. 자매함이라 성능도 거의 동일했기에 다른 조약 당사국들도 공고 대신 히에이를 훈련함으로 처리하는 데 딱히 반대하지는 않은 듯하다.
[3]
원어로는 추크 제도이고 트럭(Truk)이 아니다. 1차 대전후 독일령이였던 추크 제도를 일본이 인수하면서, 섬들중 하나인 루크(Ruk)섬을 잘못 알아들어 트럭(トラック)으로 지은 것이다.
[4]
일본측보다 먼저 발견했는데도 아무런 명령을 내리지 않았고, 8분 후에야 공격을 명령했어도 비 현실적인 기동명령을 내려 혼란만 가중시켰다.
[5]
캘러헌을 위해서 어느 정도 변호를 해보자면, 우선 일본보다 먼저 미해군이 레이더로 상대를 발견한 것은 사실이나 정작 캘러헌 제독의 기함인 샌프란시스코에는 레이더가 없었다. 비록 미해군의 다른 함정들이 계속 보고를 올리긴 했지만 워낙 보고도 제각각이라 캘러헌이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엔 무리가 있었다. 차라리 레이더가 장착된 경순양함 애틀랜타에 승함했으며 야전 승전 경험이 있는 스콧이 지휘했으면 오히려 상황은 더 나았을 수도 있다. 더군더나 캘러헌은 참모장 경험만 있지 실전 및 수상함 항해 경험은 일천해 실전성 없는 명령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캘러헌이 비판 대상이라면 상황에 맞지 않는 지휘관을 인선한 미군 수뇌부 역시 비판을 피하기 힘들다.
[6]
휘하 함정들에게 대함공격에 효과적인 철갑탄 대신 지상공격용으로 삼식탄을 장전했고, 초계도 매우 게을리 했다.
[7]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반론이 있는데, 우선 본 작전에 참가한 일본 해군함들은 SG레이더가 있던 미군과 다르게 제대로된 레이더가 없었다. 또한 견시들을 활용하는 것도 문제가 있었는데, 그 이유는 이 날엔 달빛 한 점 없었기 때문이다. 즉 바로 앞에 가는 배도 안보이는 상황. 더군더나 지상 공격용 삼식탄을 장착한 것도 어느 정도 참작이 되는데, 애당초 일본은 정보 부족으로 과달카날 근해에 미군이 야간에 있을리 없다고 생각했고 작전 목표 자체가 비행장 포격이므로 삼식탄을 작계대로 장전한 것 뿐이다. 이것을 아베 제독의 잘못만으로 돌릴 수는 없다.
[8]
말이 '이끌었다'지 미 해군 함선은 '여기서 덩치가 가장 큰 놈=무조건 적', 일본군 함선들은 '히에이를 공격하는 놈=적'으로 여기고 싸우는 수준이었다.
[9]
래피는 히에이에게 대공포 공격 뿐 아니라 어뢰도 발사하여 명중시켰지만 너무 가까운 거리라서 불발되었다.
[10]
하지만 래피 역시 함포를 맞고 격침당해 함장
윌리엄 E. 행크를 포함한 승조원들이 전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