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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6 13:43:05

심상희

<colcolor=#fff><colbgcolor=#0047a0> 국인(國仁)
출생 1861년 4월 5일
경기도 여주목 북면 외룡리
(현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외룡리)
사망 1931년 12월 25일 (향년 70세)
만주
본관 청송 심씨[1]
묘소 만주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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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심상희는 1861년 4월 5일 경기도 여주목 북면 외룡리(현 여주시 북내면 외룡리)에서 아버지 심재택(沈在澤, 1842 ~ 1904. 12. 17)과 어머니 밀양 박씨(1842 ~ 1915. 2. 13) 박계춘(朴季春)의 딸 사이의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심재택은 1890년 소령원 수봉관(昭寧園守奉官:종9품), 1891년 부사과(副司果:종6품)를 지냈다.

심상희 또한 일찍이 관직에 나아가 사과(司果:정6품) 벼슬을 지냈다. 그러나 1895년 을미사변 단발령이 잇달아 발발하자, 그는 관직을 내던지고 1896년 2월 5일 여주 장날을 이용하여 수백명의 동지를 모아 의병을 일으켜 전선을 끊고 일본인들을 살해했다.

이후 여주 일대를 휩쓴 뒤 충청도 일대로 나아간 그는 의병대장을 칭했다. 이때 김하락으로부터 연합의진에 대한 권유를 받자 자신의 병력 일부를 보내줬다. 이리하여 연합의진이 결성되면서 그 수가 2,000여 명에 이르게 되자, 의병 지휘부는 각 부서를 다음과 같이 재편성했다.
대장: 박준영(朴準英)
선봉: 김태원
여주대장: 심상희
중군: 구연영
군사 겸 지휘: 김하락
좌익장: 김귀성(金貴星)
도 소모: 전귀석
후군장: 신용희[독립유공자]

이처럼 심상희를 그대로 여주 대장으로 한 것은 심상희의 여주 의병이 그 다수를 점유했기 때문에 완전한 연합군이 형성되자 않고 여전히 심상희의 지휘권이 인정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들 경기 의진은 2월 말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그곳을 본진으로 하여 유진하면서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관군과의 전투에서 연이어 패전하고 일부 의병장들이 배신하자, 남한산성을 포기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특히 김하락은 영남 지방으로 진격하여 여러 의진과의 연합을 도모하였다.

이 시기 안승우는 심상희에게 원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이인영과 합진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심상희는 당시 경기지방 의병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던 만큼 받아들이기 어려운 제안이었다. 또한 그는 유인석과 안승우가 이끄는 제천 의진의 가흥 진격 등에 대하여도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결국 제천 의진의 선봉장 김백선은 본진의 증원병도 오지 않은데다가 심상희의 미온적인 태도, 그리고 심상희 의진의 참장 한동직(韓東直)의 방관 등으로 인하여 패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에 김백선은 안승우에게 지원병을 보내주지 않은 것에 대해 격렬하게 항의하다 유인석에 의해 총살형에 처해지고 말았다.

아관파천 직후인 1896년 2월 18일, 심상희는 조정으로부터 의병을 해산하라는 선유 조칙을 받았지만 2월 29일에 의병 해산 불가와 역적 처단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전 사과(前司果) 심상희(沈相禧) 등이 올린 상소(上疏)의 대략에,

"신들이 나라가 변고를 당하던 날에 죽지 못하고 초야에서 처분을 기다리면서 한 가닥 목숨이 아직까지 붙어 있는 것은 위로는 국모(國母)의 원수를 갚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고통을 구제하며 만 번 죽을 계책을 감히 내어 나라의 은혜에 만 분의 일이라도 보답하려는 것입니다.

삼가 칙교(勅敎)를 읽건대 경군(京軍)과 의병(義兵)은 각각 자기 처소로 돌아가라고 하였으니 폐하의 말씀이 대단합니다. 은혜롭게 생각해주는 것이 하늘과 같으므로 신은 감격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즉시 흩어져 돌아가지 않는 것은 왜놈들이 나라 안에 가득 차고 역신(逆臣)들이 말을 못하게 하면서 도덕이 있는 당당한 나라를 재물과 권세로 여기기 때문에 신들의 이 거사(擧事)는 다 죽은 뒤에야 그만둘 것입니다.

주(周) 나라에서는 흉노(匈奴)를 친 후에야 선왕(宣王)이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웠고 한(漢) 나라에서는 역적 왕망(王莽)을 처단한 후에야 광무제(光武帝)가 다시 번창하였으니 적을 토죄하고 역적을 주륙하는 데에 신들이 이 일을 담당하기를 원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의병이란 핑계 아래 소동을 피우니 그 죄를 자초하는 데서 벗어나기 어렵다. 그러나 그 떳떳한 마음을 근원하면 참작하여 용서할 만한 점이 없지 않으니 즉시 서로 타일러 가지고 흩어져 돌아가 생업에 길이 안착함으로써 왕사(王師)를 수고롭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고종실록 48권, 고종 44년 3월 11일 양력 5번째기사

그러나 4월 중순경에 이르러 결국 선유조칙을 받아들인 심상희는 부하 포군들을 이끌고 4월 16일부터 5월 5일 사이에 귀순하여 관포군(官砲軍)이 되었다. 그가 귀순을 선택한 것은 자신의 일가인 심상훈이 귀순을 권고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후 그는 개화파와 타협하고 후사를 도모하자며 이인영 의병진 중군장이자 자기 친지인 한진국을 설득하다 여의치 않자 한진국을 죽여버렸다. 핵심 지휘관을 허무하게 잃은 이인영 의진은 한결 강력한 심상희 군세에 차마 덤벼들진 못하고 일부만 남아 유인석이 이끄는 제천의병에 합류했다.

이 소식을 접한 유인석은 대노하여 장문의 격서(檄書)를 보내어 책망하였고, 며칠 후 심상희 의진에 속했던 참장 한동직과 전군 전규석(全圭錫) 등이 해산 당한 의병을 이끌고와서 제천 의진에 대거 입대하였다. 1896년 12월, 유인석은 다시 전귀석을 심상희에게 파견하여 창의할 것을 권유하였고, 심상희는 이를 받아들여 여주 의진을 일으켰지만 별다른 활동을 보이지 않고 곧 해산시켰다.

이후 향리로 내려간 심상희는 1899년(고종 36년) 1월 2일 독립협회에서 활동하는 윤치호 등에게 역적 법률을 적용하여 참형에 처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전 사과(前司果) 심상희(沈相禧)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이 삼가 폐하의 명령을 보니 저 역적들이 범한 열한 가지 죄목은 뚜렷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앞뒤로 범한 죄에 대하여 일체 면제할 데 대한 명령이 있었는데, 신은 그것을 여러 역적들의 악행을 길러주고 만백성들의 의혹을 몹시 불러일으킬까봐 걱정됩니다.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 가운데서 남궁억, 조한우(趙漢禹), 유맹(劉猛), 이승만, 최정덕(崔廷德), 변하진(卞河璡), 정항모(鄭恒謨), 어용선(魚瑢善), 홍정후(洪正厚), 신해영(申海永) 등 10여 명은 여러 역적을 대신으로 추천하였으며 윤하영(尹夏榮), 윤시병(尹始炳), 유학주(兪鶴柱) 세 명은 여러 역적들을 위하여 고발하도록 청하였으니, 이 무리들이 어찌 우리나라의 신하라 할 수 있겠습니까?

저 역적인 윤치호, 고영근 그리고 앞서 감금한 17명과 추천한 10여 명, 고발한 세 명은 며칠 안으로 기찰하여 체포해서 빨리 적률(賊律)을 하여야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너희들의 말은 정말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으로서 매우 가상하도다."

하였다.
고종실록 39권, 고종 36년 1월 2일 양력 2번째기사

이후 귀향하여 여생을 보냈으며, 1902년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에 임명되기도 했으나, 이튿날 사직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경술국치 후에는 만주로 망명했다고 하며, 1931년 12월 25일 그곳에서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심상희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안효공파-정랑공 지겸(智謙)파 23세 상(相) 항렬. [독립유공자] 신용희와 동명이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