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진자동차가 일본
토요타와의 기술제휴를 통하여 당시 토요타의 소형 모델이었던
코로나 3,4세대 모델을 반제품조립생산(SKD, Semi Knock-down)방식으로 도입하여 일부 국내 부품[1]을 사용하여 1966년 7월부터 조립생산했던 소형차이다. 출시되자마자 폭발적인 인기를 끌며 상류층의 자가용 및 택시로 판매되었다. 초기 국산화율은 21%였으며, 정부의 강력한 국산화정책에 따라 1969년에는 국산화율이 39%까지 올라갔으나, 여전히 원자재를 수입에 의존한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저우 4원칙 때문에 계약기간 5년을 채우자, 토요타가 일방적으로 철수하는 바람에 1972년에 갑작스럽게 단종되었다.[2]
전기형의 계기판은 상자형 속도계와 원형 송풍구 등 5, 60년대 미국차의 것을 그대로 붙여 놓은 듯한 디자인이었다. 스티어링 휠에는 부채꼴형 스포크가 달려 있었는데, 이 부채꼴형 스포크에 경음기와 방향지시등 스위치가 일체로 되어 있었다. 부채꼴형 스포크의 양쪽 중 한쪽을 누르면 경음기가 동작하고, 부채꼴형 스포크를 좌, 우로 돌리면 방향지시등이 작동하는 구조였다. 변속기는 컬럼식[6][7]이 쓰였고, 이 방식은 70년 출시된 뉴 코로나가 71년 1600cc 로 업그레이드 되면서 플로어식으로 변경되기 전까지 계속 쓰였다.
중기형에서는 전면 방향지시등과 보조 그릴이 범퍼 아래로 내려가면서 헤드램프와 라디에이터 그릴이 범퍼와 맞닿은 형태로 변경되었다. 다만, 곡선적인 사각형이 좌우 헤드램프 베젤 주위와 라디에이터 그릴을 감싸는 전기형 디자인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테일 램프는 전기형의 것이 계속 쓰였다.
계기판은 전기형의 상자형 속도계의 디자인이 조금 변경되었으며, 전기형의 스티어링 휠에 일체로 달려 있던 경음기와 방향지시등 스위치가 분리되었는데, 스티어링 휠의 스포크가 부메랑 모양으로 변경되면서 경음기 스위치는 스포크의 양 끝단에 위치하였고, 방향지시등 스위치는 스티어링 컬럼에 레버 형태로 분리 장착되었다.[8]
1970년 6월에 출시된 완전변경 모델로, 원형은 토요타 코로나의 4세대(RT80)모델이다. 차체가 좀더 유선형에 가까워졌고, 1열 창문은 쪽창을 없애고 통유리를 끼웠다. 도어 핸들도 기존의 잡고 눌러서 당기는 볼품 없는 모양에서 잡고 당기면 바로 열리는 날렵한 디자인으로 변경되었으며, 앞선 모델에서의 마치 장식품처럼 느껴지는 소극적인 디자인이었던 C필러의 환기구는 도드라지는 세로형으로 변경되는 등, 이후 약 20여 년 간의 자동차 디자인의 흐름을 예견한 듯한 참신한 시도들이 보였다.
최초 출시 당시의 차량 가격은 83만 7,000원이었는데 당시 대통령 월급이 7만 8,000원, 쇠고기 한근이 200원, 택시 기본요금이 60원, 다방커피 한잔이 40원, 1967년 한국 근로자 평균 월급이 8324원이었던 걸 비교하면 매우 고가였다. 1966년의 1원은 2023년
소비자물가지수 기준 38.413원이다.
66년 최초 생산 후 그해에는 3,600대, 67년 5,000대, 68년 11,000대, 69년 13,000대가 팔렸으며, '뉴 코로나70'을 포함하여 72년 11월까지 46,000여대가 팔렸다.
출처
요즘 차들은 전자회로 장치가 없으면 차가 못 움직일 정도로 전자 장치가 광범위하게 적용되어 있지만, 코로나의 전자회로 부분은 고작 라디오 하나뿐이었다. 그나마도 AM만 수신되었고, 스피커도 대시보드 가운데 라디오 위에만 딱 한 개 뿐이었다.
라디오 수신을 위한 안테나가 동반석쪽 펜더의 앞 유리창 가까이에 달려 있었는데[12], 자물쇠가 달려 있었다. 안테나를 사용하려면 시동키와 함께 제공되는 별도의 작은 열쇠를 안테나 옆에 넣으면 안테나 머리가 조금 튀어 나오는데, 그것을 손으로 잡아서 끌어 올려야 했다. 당시에는 이마저도 사치품이었는지, 택시 등에는 그냥 굵은 철사로 된 수직형 안테나가 달려 있었다.
연료주입구의 위치가
뒤 트렁크 패널 중간의 번호판 뒤에 있었다.[13] 따라서,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으려면 뒤 번호판을 아래로 열고 연료주입구 뚜껑을 열었다. 그나마 잠금장치도 없어서, 보안성이 매우 취약하였다. 그래서 일부 오너들은 두툼한 철판을 작고 길게 잘라서 번호판 뒤에 덧대고 볼트를 조였다. 이렇게 하면 번호판이 트렁크 덮개에 걸려서 열리지 않아서, 나름대로 도난방지가 되었다.[14]
4세대 코로나의 단종 1년 전인 1971년에는
진로에서 "집집마다 두꺼비의 幸運(행운)을!"이라는 문구와 함께 당시 26세였던 인기 탤런트
노주현을 모델로 내세워 경품 행사를 벌였는데 이 회사에서 내건 경품이 금두꺼비(1등, 3마리)가 당시 최신 승용차였던 4세대 코로나였으며, 은두꺼비(2등, 10마리)가 금성사 전기 냉장고, 복(福)두꺼비(3등, 20마리)가 같은 금성사의 흑백 텔레비전 수상기였다.
당시 신문 지면 광고 이외에도, 1966년 최초 출시 후에도 신세계백화점에서도 1등 경품으로 코로나를 냈었고, 롯데껌 에서도 코로나를 경품으로 낸 적이 있었다.
요즘의 대부분의 차량들은 본네트를 라디에이터 그릴 쪽에서 뒤로 열도록 설계하는데, 코로나는 반대로 본네트가 카울 탑(Cowl Top)[15]에서 앞으로 열리도록 설계돼 있다. 이 방식으로 열리는 국내 차량으로는
기아 브리사,
피아트 132,
현대 엑셀(X1)이 있었고, 외국 차량으로는 1986년에 등장한
BMW 7시리즈/2세대 E32 등이 이와 같은 방식이었다. 해당 방식은 주행 중 본네트 고정 장치가 풀리더라도 본네트가 올라와서 시야를 가리는 일이 없다는 장점이 있으므로 과거에는 많이 사용되었으나, 불편한 정비성이 치명적인 문제였고 60년대에 나온 차들의 경우는 전방 충돌시 본네트가 앞 유리창을 파손하고 객실로 침범하는 문제[16]가 제기되기도 했다. 불편한 정비성 때문에 이 방식의 설계는 근래에는 거의 자취를 감추다시피 했다. [17]
[1]
유리, 타이어, 배터리 등
[2]
코로나를 포함해서 퍼블리카와 크라운까지도 함께 단종되었다.
[3]
일본에서도 동일하게 마이너 체인지가 되었다.
[4]
국내 출시된 차량에도 장착돼 있었다.
[5]
이 디자인은 후에 토요타에서 코로나와는 별개의 모델인 '마크 II'로 계승되었다.
[6]
기어 레버가 스티어링 컬럼에 달려 있어서 이렇게 부른다.
[7]
운전 중에 손의 이동이 비교적 적고, 승차 정원이 1명 늘어나는 장점이 있으나, 노후화되면 구성 부품 중에 이른바 '삼발이' 라는 부품의 마모로 인하여 링크가 엉키는 증상이 자주 발생한다.
[8]
오늘날 대부분의 차량들에 적용된 형태가 이 때부터 시작된 셈이었다. 다만, 코로나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고 당시의 경향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9]
새한 제미니 최초기형의 계기판도 이런 모양이었고,
대우 매그너스의 계기판도 이와 비슷한 디자인이었다.
[10]
브리사 시리즈들과 포니 후기형 직전 모델들
[11]
특히,
현대 포니의 경우는 스티어링 휠 외에 라디에이터 그릴의 패턴과 옆 창문, C필러의 강조된 환기구, 심지어 비슷하게 들리는 엔진음 등.
[12]
텔레스코픽 로드 안테나였지만, 80 ~ 90년대에 유행했던 자동식은 아니었다.
[13]
코로나 1500은 물론이고, 뉴 코로나도 동일한 구조였다. 당시의
도요타 크라운도 이 위치에 연료주입구가 있었지만, 번호판이 범퍼 아랫쪽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별도의 커버가 있었다.
크라운의 연료주입구 모습 보기
[14]
기름을 넣으려면 당연히 시동을 끄고 내려서 트렁크 덮개를 열어야 한다. 주유 중에 엔진 정지는 기본 사항이지만, 시동키를 갖고 차 밖으로 나가야 했다.
[15]
앞 유리창 아랫쪽에 공기흡입구와 와이퍼가 있는 부분. 대략 80년대 중반까지는 이 부분이 본네트 바깥에 노출돼 있었는데, 이후로는 미관상의 문제와 풍절음 감소 등을 위하여 본네트 안쪽으로 넣는 설계가 보편화되어 있다.
[16]
물론 당연히 70년대 말 이후에 만들어진 자동차에서는 힌지 위치와 상관없이 그런 문제는 다 해결이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떡밥을 80년대 중반에 기아자동차가 이용하기도 했다. 기아자동차의 프라이드 1세대 카탈로그에는
타사의 전륜구동 소형차와는 달리 전방 충돌시 본네트가 객실을 침범하지 않는다 고 설명되어 있었다. 브리사와 피아트 132를 생산하면서 경험했을 문제점을 알고 있었을 것이기에 저런 내용을 그냥 생각 없이 넣었을 리가 없기 때문에, 전혀 근거가 없거나 상상으로 쓴 이야기가 아니다. 이는 기아자동차의 홍보팀이 근거없이 상상으로 쓴 이야기이다. 80년대 중반 기아자동차 홍보팀의 설명을 곧이곧대로 믿으면 안된다. 프라이드의 스타일을 '후론트노즈 패스트백'이라는 해괴한 용어로 설명하던 이들이 당시의 기아자동차 홍보팀이며, 힌지 위치가 어쩌구 객실 침범이 어쩌구 하는 것은 남의 차를 깎아내리기 위해 마구 집어넣었던 개소리에 불과하다. 기아가 그렇게 깎아내린 '타사의 전륜구동 소형차'는 물론이고 그 기본이 된 원형 자동차인 미쓰비시 미라쥬 1세대도 당연히 전방 충돌시 본네트가 A자 형태로 꺾이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이는 당시 현대자동차가 배포했던 홍보자료에도 나와 있던 내용이며 현대자동차는 A자로 꺾이는 필러를 장점으로 설명하기도 했다. 그리고, 본네트 한쪽에 힌지가 있으면 반대쪽에는 고정장치가 있고, 이 고정장치는 생각보다 튼튼하다. 본네트가 앞으로 열리는가 뒤로 열리는가와 안전성은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훨씬 뒤에 나온 BMW의 플래그십도 앞으로 열리는 본네트를 채택한 것이다. 앞으로 열릴 경우의 단점은 정비성 뿐이며, 타사 소형차의 본네트가 객실을 침범한다는 것은 기아의 억지 주장 이상 아무 것도 아니었다. 80년대에 전방 충돌이 일어났던 현대 엑셀과 프레스토의 사고를 보면 예외없이 본네트가 꺾여 있었으며, 객실로 침범한 예는 단 한 건도 없었다. 본네트가 객실을 침범하면 미국의 충돌테스트를 통과할 수가 없으나 엑셀과 프레스토는 잘만 통과해서 미국에서 판매를 했던 차들이다.
이 영상을 보면 힌지가 앞에 있어서 본네트가 객실을 침범한다는 얘기가 말도 안되는 헛소리임을 알 수 있다. 힌지 위치 때문에 그런 문제가 발생하면 1980년대 말까지도 그런 방식을 사용했던 BMW는 1990년대 전에 미국에서 자동차를 팔 수 없었을 것이지만 실제로는 충돌테스트 문제없이 통과하여 잘만 팔았다.
[17]
열리는 방향과 상관없이 지금의 자동차의 본네트는 전방 충돌시 카울 탑 부분의 힌지에 걸려서
Λ 형태로 꺾이며 충격을 흡수한다. 본네트 안쪽에 덧대는 프레임의 구조도 중간에서 잘 꺾이도록 의도적으로 米 형태로 설계돼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본네트가 앞으로 열리는가 뒤로 열리는가와는 상관이 없고 70년대 후반 이후에 나온 자동차라면 당연히 다 그렇게 설계되어 있다. 기아자동차 홍보팀에서 경쟁사 차량을 깎아내리기 위해 본네트가 앞으로 열리는 차는 충돌시 본네트가 객실을 침범한다는 개소리를 홍보자료에 써 놓았었고, 이후 잘 모르는 사람들이 이를 곧이곧대로 믿는 경향이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당시의 기아자동차 홍보팀은 그야말로 차알못이라는 것을 인증하는 말을 홍보자료에 당당하게 써 놓곤 했던 사람들이다. 프라이드의 스타일을 패스트백이라고 설명했으며, 앞부분의 스타일은 후론트 노즈(Front Nose)라는 해괴한 용어로 설명했던 사람들이다. 기아자동차가 깎아내렸던 경쟁차는 전방충돌시 본네트가 A자로 잘만 꺾였다. 애초에 힌지가 앞에 있어서 본네트가 객실을 침범할 정도면 그걸 미국에 갖다 팔 수가 없다. 그런데, 힌지가 앞에 있는 채로 미국에서 잘만 판매했던 차가 포니 엑셀과 프레스토이다.
[18]
기어가 컬럼식이 아니라 플로어식이다.
[19]
이후
GMK,
새한자동차,
대우자동차,
GM대우,
한국GM을 거쳐 현 GM 한국사업장 부평 공장으로 변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