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태인 학살 피해자 무덤에 네오나치가 비웃듯이 하켄크로이츠 문장을 낙서한 것에 분노한 사진.
1. 개요
Simon Wiesenthalשִׁמְעוֹן וִיזנְטל
1908년 12월 31일 ~ 2005년 9월 20일 (향년 96세)
이스라엘의 유명한 나치 사냥꾼. 남미로 도주한 수많은 나치 잔당 전범들을 체포한 전설적인 인물이다. 본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현 우크라이나 테르노필 출생으로 건축공학 기술자를 하다가 홀로코스트에서 살아 남은 후 나치 전범들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특히 아르헨티나로 도주한 아돌프 아이히만을 체포한 것으로 유명하다.
2. 생애
전간기에는 건축가를 꿈꾸면서 시온주의를 신봉했는데, 오스트리아와 폴란드 및 체코슬로바키아와 소비에트 연방을 방랑하면서 대학교까지 공부하고 취직했다고 전해진다. 소련군이 르부프를 점령하자 우크라이나 소비에트에서 주경야독했다는데, 독소전쟁을 맞이하면서 자신의 친척 89명이 홀로코스트에 휘말려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만이 살아남아 1945년 5월에 미군에 의해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에서 겨우 해방되었다.1940년대 후반기에 나치 독일의 전범들은 남아메리카(아르헨티나, 칠레)와 중,동아시아 혹은 북아프리카(이집트, 시리아)를 중심으로 도망쳤다. 이들 나치 전범들을 잡기 위해 비엔나에 본사를 둔 유대인 박해 기록 센터에 들어간 비젠탈은 적극적인 행동력과 첩보망을 활용하여 도주한 나치 전범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 카를 질베바우어 (Karl Josef Silberbauer): 안네 프랑크와 은신처 사람들을 체포해 강제 수용소로 보냈던 게슈타포[1]
* 구스타프 바그너(Gustav Wagner) - 소비보르 절멸수용소의 간수.[2]
* 아돌프 아이히만: 이스라엘 첩보기관의 도움을 받아 1962년 체포.
* 마르틴 보어만: 종전시 음독자살한 걸로 알려졌지만 음모론 때문에 계속 추적했다.
* 요제프 멩겔레: 아이히만을 잡을 당시 이 자도 아르헨티나에 있었지만, 아이히만을 체포해 국외로 빼돌리는 것만으로도 힘에 겨웠기 때문에 멩겔레는 잡지 못하고 놔둘 수밖에 없었다. 이후 멩겔레는 아이히만 체포 뉴스를 듣고 도주, 후일 브라질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으며, 1979년 DNA가 확인됐다.
* 오토 스코르체니: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사나이"로 불렸던 인물. 물론 그는 홀로코스트랑 무관했지만 매우 유명한 인사였기 때문에 상징성 차원에서 올렸을 가능성이 높다.
2003년 4월 시몬 비젠탈은 은퇴를 발표했다. "살아있는 모든 전범들을 찾아냈다. 설령 아직 살아있다 하더라도 그들은 너무 나이를 많이 먹어 재판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나의 일은 끝났다" 이 당시엔 알로이스 브루너만이 그의 추적 대상이었다.[3]
은퇴 후 2004년 대영제국 훈장 명예 2등급(honorary KBE)을 받았고, 2005년에는 프랑스에서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은 후 같은 해 자택에서 향년 96세에 노환으로 사망했다. 이때까지 그는 1100여명의 나치 전범을 사로잡았다.
3. 비판
이런 류의 행동에 흔히 붙는 비판이지만, 모사드 항목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엄연한 주권국가들에서 사법체계를 무시하고 납치 및 사법행위를 벌이는 게 옳냐는 비판도 있다.4. 같이 보기
[1]
이 인물의 행위는 사실이지만, 행위에 있어서 불법성은 인정되지 않아 무죄판결을 받았다. 질베바우어 재판때 안네의 아버지 오토 프랑크가 증인으로 나왔는데 질베바우어에 대해 그의 행위는 의무에 의한 것이었으며 정당했다고 진술했다. 여담으로 질베바우어는 프랑크 가족 체포당시 1차 대전 독일 제국군 장교로 복무했던 오토 프랑크에게 호의를 베풀어 5분이라는 통상적인 시간보다 긴 1시간동안 짐을 쌀 수 있게 해주었고 안네의 일기를 챙긴 미프 히스가 자신과 동향인 빈 출신인걸 알고 수용소로 보내지않고 풀어주었다.
[2]
1987년 TV영화 소비보르 탈출(Escape From Sobibor)에서는 유대인 재소자에게 칼에 맞아 죽는 것으로 각색되었지만 실제로는 달아나서 브라질에서 숨어살다가 1978년 5월 30일 시몬 비젠탈이 추적 후 체포했다. 그러나 브라질 법무장관이 이스라엘, 폴란드, 오스트리아 정부의 범죄인 인도 요구를 모두거절했기 때문에 계속 브라질에 있다가 1980년 10월 자택의 화장실에서 가슴에 칼이 꽂혀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그의 변호사는 그가 자살했다고 발표했지만 의문스러운 점이 상당히 많다고 한다.
[3]
이 당시 브루너는 시리아 정부의 비호를 받아서 첩보 교육을 했다고 하며, 이스라엘
모사드에서 그를 암살하기 위해 1961년과 1980년에 걸쳐 폭탄 편지를 두번 보내 한 눈과 손가락 1개를 잃었지만 목숨에 지장이 없었다. 1985년에 사진을 찍으면서 유태인이 죽이려고 해도 못 이뤄서
야훼에게 징징거린다라고 비웃듯이 글을 써서 해외로 퍼뜨리는 배짱을 과시했다. 프랑스와 독일이 그의 소환을 요구했으나 시리아 정부에서 듣는 척도 안하고 그게 누구냐? 라고 무시하면서 국빈으로 우대했고 결국 2014년 12월 1일 외신 보도로 그는 2010년
시리아에서
천수를 누리고 98세로 사망했다고 보도됐다.
연합뉴스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