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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1 20:26:35

스탠더드 전투

무정부시대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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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더드 전투
영어: Battle of the Standard
파일:스탠더드 전투.jpg
시기 1138년 8월 22일
장소 잉글랜드 왕국 요크셔 노스앨러튼 인근 카우튼 무어
원인 마틸다의 잉글랜드 왕위 등극을 돕는다는 명분을 내걸고 노섬벌랜드를 자국의 영역으로 삼으려는 스코틀랜드 국왕 다비드 1세의 공세.
교전국 [[틀:깃발|]][[틀:깃발|]][[틀:깃발|]] 스코틀랜드 왕국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잉글랜드 왕국
지휘관 [[틀:깃발|]][[틀:깃발|]][[틀:깃발|]] 다비드 1세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윌리엄 르 그로스
병력 16,000명 10,000명
피해 큰 희생 작은 희생
결과 잉글랜드 왕국의 승리.
영향 더럼 조약 체결.

1. 개요2. 배경3. 전투 경과4.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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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무정부시대 시기인 1138년 8월 22일, 스코틀랜드 왕국의 국왕 다비드 1세가 잉글랜드 왕위를 찬탈한 스티븐 왕을 응징하고 마틸다의 잉글랜드 여왕 등극을 돕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침공하면서 벌어진 전투.

2. 배경

헨리 1세 시기, 잉글랜드 왕국과 스코틀랜드 왕국은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헨리 1세는 1100년 스코틀랜드의 마틸다[1]를 왕비로 삼았고, 마틸다의 형제인 알락산다르 1세와 데이비드 1세를 초빙해 런던에서 공부하도록 했으며, 잉글랜드 귀족 가문 여식을 아내로 삼도록 했다. 이 기간 동안 앵글로-노르만족의 영향력이 스코틀랜드에 적극적으로 침투하기 시작했다. 특히 1124년 집권한 데이비드 1세는 수많은 앵글로-노르만 기사들을 자신의 나라로 끌어들여 그들에게 땅을 부여하고 스코틀랜드의 국가 및 사회 시스템을 잉글랜드 봉건제로 개편하고자 노력했다. 또한 데이비드 1세는 노르망디 전선에 직접 가서 헨리 1세를 도왔으며, 그의 아내인 헌팅던의 마틸다의 권리로 잉글랜드에서 광범위한 토지를 보유하고 헌팅던 백작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여기에 1127년 헨리 1세가 딸 마틸다를 잉글랜드 왕위 계승자로 세우겠다고 선언했을 때, 그는 외조카인 마틸다를 잉글랜드 여왕으로 군림하도록 전적으로 돕겠다고 맹세했다.

그러던 1135년 12월 1일, 헨리 1세가 6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당시 마틸다는 남편 조프루아 5세와 함께 앙주에 있었으며, 3남 기욤을 임신 중이었기에 잉글랜드로 돌아가는 게 지체되었다. 그러는 사이, 블루아 가문 출신이며 헨리 1세의 조카인 에티엔이 소규모 병력을 이끌고 영국 해협을 건넌 뒤 런던에 입성했고, 1135년 12월 22일 윈체스터 주교인 남동생 앙리 드 블루아와 노퍽 백작 휴 드 비고의 지지를 받으며 잉글랜드의 스티븐 왕으로 즉위했다. 이 소식을 접한 다비드 1세는 스티븐 왕의 즉위를 찬탈로 단정하고, 1136년 1월 군대를 일으켜 잉글랜드 북부로 침공해 1월 말까지 칼라일, 워크, 알닉, 노럼, 뉴캐슬 성을 함락했다. 하지만 그 해 2월 스티븐 왕이 대군을 이끌고 반격하자, 다비드 1세는 그와 대결하는 건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협상을 제안했다. 스티븐 역시 갓 즉위해서 불안정한 왕권을 다질 여유가 필요했기에 받아들였다.

이때 체결된 더럼 조약에 따르면, 다비드 1세는 칼라일을 유지하는 대신 다른 성은 반납하고, 다비드 1세의 아들 헨리는 스티븐 왕이 다비드 1세의 침공에 보복하고자 몰수했던 헌팅던 백작에 선임되고 헌팅던의 절반을 돌려받는 조약을 맺었다. 또한 다비드 1세는 잉글랜드 국왕이 된 스티븐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았지만, 헨리는 칼라일과 다른 잉글랜드 영토의 영주로서 스티븐에게 경의를 표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렇게 합의를 맺은 후 부활절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스티븐의 궁정으로 떠난 헨리가 그곳에서 모욕당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다비드 1세는 분노해 아들을 스코틀랜드로 귀국시켰다.

1137년 봄, 다비드 1세는 잉글랜드를 다시 침공하기로 마음먹고 노섬벌랜드 국경에 군대를 집결시켰다. 잉글랜드 측은 이에 대응해 뉴캐슬에 병력을 배치했다. 이후 양자는 서로 대치했고 소규모 접전이 여러 차례 벌어졌지만 대규모 회전은 피했다. 그러다가 양자는 12월까지 휴전하기로 합의했다. 12월이 되었을 때, 다비드 1세는 스티븐에게 옛 노섬벌랜드 백작령 전체를 넘기라고 요구했다. 스티븐이 거부하자, 다비드 1세는 1138년 1월 3번째 침공을 감행했다. 헥섬 수도원장이자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인 헥섬의 리처드는 그의 군대가 노섬벌랜드 전 지방을 공격하고 남녀노소 모든 계층의 사람들을 도처에서 학살하고 마을, 교회, 집을 파괴하고 약탈하고 불태웠다면서, "신이나 인간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는 이교도 종족보다 더 잔인한 저주받을 군대"라고 비난했다.

이렇듯 행군하면서 심각한 약탈을 자행하던 다비드 1세는 1138년 1월 10일부터 3주간 워크온트위드 성을 포위했다. 그러다가 스티븐 왕이 군대를 이끌고 북상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우세한 전투력을 갖춘 잉글랜드군을 피하기 위해 국내로 철수했다. 그 후 스티븐은 스코틀랜드에 보복하고자 로디언 해안 지대로 진격해 약탈을 자행했다. 그러다가 돌연 잉글랜드로 귀환했는데, 이에 대해 또 다른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 헥섬의 존은 그가 군대 내부 인사들의 충성심을 의심했을 지도 모른다고 의심했다. 얼마 후, 잉글랜드 서부 지역에서 마틸다를 지지하는 대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반란군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서 잉글랜드 노섬벌랜드의 알윅 영지에서 군림하던 유스타스 피츠 존은 다비드 1세에게 구원을 청했다. 다비드 1세는 4월 8일 노섬벌랜드로 재차 진군했고, 유스타스는 동생 윌리엄에게 군대를 맡겨 다비드 1세와 합세하도록 했다.

1138년 5월, 다비드 1세의 군대는 스코틀랜드군 보급선을 지속적으로 습격하던 워크온트위드 성을 포위했다. 헥섬의 리처드는 공방전 초기엔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으며,스코틀랜드인들이 공성추와 기타 공성 무기를 사용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스코틀랜드군의 사상자가 눈에 띄게 늘어나자, 다비드 1세는 남작 2명에게 성을 계속 봉쇄하도록 한 뒤 자신은 본군을 이끌고 남하했다. 이때 모레이 백작 윌리엄 피츠 던컨[2]이 겔러웨이 부대를 포함한 스코틀랜드 분견대를 이끌고 크레이븐과 클리더로 지역을 급습하는 임무를 맡았다. 6월 10일, 클리더로로 진격하던 윌리엄 피츠 던컨의 스코틀랜드군은 리블 강 근처에서 사슬 갑옷과 투구를 쓴 중무장한 잉글랜드군과 마주쳤다. 이후 벌어진 클리더로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이 대승을 거두었다.

그 후 스코틀랜드군은 노섬벌랜드와 더럼을 지나 요크셔로 진군해 노스앨러튼으로 접근하면서 심각한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당시 스티븐 왕은 잉글랜드 남부에서 마틸다를 여왕으로 세우기 위해 반기를 든 글로스터의 로버트와 대적하느라 정신이 없었기에, 스코틀랜드의 침략에 맞서는 임무를 잉글랜드 북부 영주들에게 일임했다. 하지만 요크셔의 거물들은 서로가 마틸다를 위해 스코틀랜드와 내통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한 데다, 총사령관이 딱히 정해지지 않아서 스코틀랜드군을 상대로 조직적인 저항을 하기 힘들었다. 이때 당시 68세의 고령이었던 요크 대주교 서스턴이 나섰다. 그는 요크셔의 성직자들에게 십자가와 깃발, 유물을 가지고 행진하고, 무기를 들 수 있는 모든 사람을 북부 영국 귀족들의 지휘 아래 서스크로 모으라고 명령했다. 또한 거물들을 일일이 찾아가서 이번 싸움은 일반적인 싸움이 아니라 성전이니, "완전한 야만인", "숨이 막히고 야만스러운 스코틀랜드인"에게 굴복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라고 요청했다.

그들은 이에 설득되어 사병대를 이끌고 요크에 집결했다. 서스턴 대주교는 군대를 지휘하기 위해 모인 고위 귀족들 중 요크 백작 윌리엄 르 그로스와 요크셔 보안관 월터 레스펙에게 자신의 깃발을 줌으로써 그들에게 지휘권을 맡기겠다는 뜻을 간접적으로 전달했다. 한편, 베르나르 드 발리올과 로버트 브루스가 이끄는 사절단이 스코틀랜드군 진영에 찾아가서 다비드 1세의 아들 헨리에게 노섬벌랜드 백작령을 주겠다고 제안했고, 앵글로색슨족 노르만족 게일인과 대적하는 그의 진정한 친구였으며, 자신들의 도움이 없이는 그의 왕국을 유지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다비드 1세는 전쟁을 계속 이어갈 뜻을 분명히 밝혔고, 결국 협상은 거친 말이 오고 가는 가운데 결렬되었다. 그 후 다비드 1세의 군대는 티스 강을 건너 남쪽으로 이동했고, 잉글랜드군은 북쪽으로 이동하여 노스앨러튼 북쪽에서 진영을 세웠다. 이후 양군이 마주치면서 스코틀랜드군과 잉글랜드군 사이의 대규모 전투의 막이 올랐다.

3. 전투 경과

1138년 8월 21일, 잉글랜드 정창별들이 스코틀랜드군이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에 잉글랜드군은 전투 대형을 편성했다. 당시 잉글랜드군은 언덕 위에 바퀴가 네 개 달린 수레에 배의 돛대를 매어 만든 깃발을 세웠는데, 수레 머리에 십자가를, 그 아래에 요크셔의 수호성인인 요크의 피터, 리폰의 윌프레드, 베벌리의 존의 깃발을 달았다. 이 장치들 때문에, 이 전투에 스탠더드라는 명칭이 붙었다. 그들이 포진한 언덕과 우측을 흐르는 스웨일 강 사이의 거리는 약 8마일(13km)이었는데, 그 사이의 땅 대부분이 낮고 배수가 잘 되지 않았다. 따라서 티스 강에서 노스앨러튼으로 향하는 도로(그레이트 노스 로드)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향하는 약간 더 높은 지대의 능선을 따라 마을에 접근했다.

잉글랜드군은 노스앨러튼에서 북쪽으로 약 2마일(3km) 떨어진 이 능선을 가로질러 단일 견고한 대형으로 배치되었고, 기갑병과 대부분의 기사는 말에서 내려서 말을 뒤로 보낸 뒤 최전선에 배치되었고, 궁수와 지역 징집병은 그 뒤에 배치되어 기사들을 지원했다. 영주들은 깃발 주위의 대열 중앙에 하마 기사들과 함께 서 있었다. 기사들이 말에서 내린 이유에 대해, 헥섬의 리처드는 스코틀랜드인의 소음과 함성에 말들이 당황해서 혼란에 빠짐으로써 전투 불능 상태에 처하는 걸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였다고 밝혔다. 총사령관 윌리엄 르 그로스는 낮은 언덕 위에 군대를 배치하고, 깃발을 실은 마차는 군대의 정중앙에 세웠다. 이를 통해 아군이 깃발을 잘 볼 수 있었다. 헥섬의 리처드에 따르면, 윌리엄은 이를 통해 장병들이 예수가 그들을 이끈다는 것 확신하길 희망했으며, 부하들에게 확실하고 눈에 띄는 집결 지점을 제공하는 목적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8월 22일, 다비드 1세는 안개가 낀 상태에서 행군을 이어가다가 전방의 언덕에 큰 깃발이 세워져 있고, 적병들이 배치된 것을 보고 즉시 전투 대형을 형성했다. 이때 다비드 1세는 기사들에게 궁수들과 함께 스코틀랜드 부대의 선두를 차지하고 공격의 선두에 서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갤러웨이와 하이렌더 출신 장병들은 저지대 출신 기사와 궁수들이 먼저 공격하는 걸 허용하지 않겠다며 강력히 반발했다. 다비드 1세가 강행하려 하자, 여러 귀족이 그가 '프랑스 기사'에 의존하는 걸 비난했다. 결국 다비드 1세는 계획을 포기하고, 갤러웨이 부대가 공격을 이끌도록 허용했다.

리보 수도원장이자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인 리보의 에엘레드에 따르면, 스코틀랜드군은 4개 대열로 구성되었다. 첫번째 대열엔 스코틀랜드 남서부의 갤러웨이인이 배치되었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옷을 별로 입지 않고 무척 민첩했으며, 검을 능숙하게 쓰고 투창 실력도 훌륭했다고 한다. 첫번째 대열의 우익에는 다비드 1세의 아들 헨리가 지휘했으며, 노섬벌랜드 출신 노르만 남작인 유스타스 피츠 존이 이끄는 잉글랜드 전사들이 있었다. 좌익에는 로디언의 잉글랜드인과 론, 아가일, 헤브리디스 출신의 하이랜더 전사들이 있었다. 두번째 대열은 방패, 양손 클레이모어 및 막대 도끼로 무정한 하이랜더와 아일랜드 출신 전사들로 구성되었다. 세번째 대열엔 로디언인과 아가일과 뷰트 섬 출신 및 론 병사들이 배치되었으며, 다비드 1세가 잉글랜드와 프랑스 기사 몇 명과 함께 이들을 이끌었다. 네번째 대열엔 모레이 출신 병사들이 예비대로 편성되었다.

전투 대형을 마친 뒤, 스코틀랜드군이 공세를 개시했다. 갤러웨이 출신 병사들은 적 전열의 중앙을 공격하며 전투 함성인 "알바나흐, 알바나흐"를 외쳤다. 최전선에 배치된 잉글랜드 일반병들은 갤러웨이 병사들의 무지막지한 공세에 크게 동요해 뒷걸음치려 했지만, 기사들이 도망치려는 자들을 죽이면서 독전하자 이를 악물고 공세를 버텨냈다. 잉글랜드군은 방패벽을 세워서 갤러웨이인들의 맹공을 저지한 뒤 역공을 가해 적군을 밀어냈다. 갤러웨이인들은 공격을 재개했지만,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했다. 그들은 몇 차례 더 공세를 가했지만 기세가 점점 떨어졌다. 그러는 동안 잉글랜드 궁수들이 끊임없이 화살을 쏴서 많은 적병을 사살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몇몇 스코틀랜드인은 몸에 화살이 너무 많이 꽂혀서 바늘꽂이처럼 보였다고 한다.

한편, 스코틀랜드군 우익을 이끌던 헨리 왕자는 기사 200명을 이끌고 돌격했다. 그는 요크셔 징집병대를 돌파했다. 이때 헨리는 잉글랜드군 기병 예비대가 전열 뒤에서 멀리 떨어져서 기수가 없는 채로 서 있는 것을 보고, 기사들과 함께 그쪽으로 달려갔다. 그러면서 나머지 보병대가 자기를 뒤따라올 거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잉글랜드 기사들이 적 기병대가 아군 대열을 돌파한 걸 보고 곧바로 대열을 좁힌 뒤 스코틀랜드 보병대를 몰아붙였고, 곧 격퇴했다. 좌익에서는 로디언과 론 출신 병사들이 미약한 공격을 한 번 가했지만, 잉글랜드군이 확고하게 버티자 물러났다. 그러던 중 헨리의 기사 한 명을 처단한 잉글랜드 기사가 머리를 벤 후 집어 올리면서 "다비드 왕이 죽었다!"라고 외쳤다. 이에 스코틀랜드 대열에서 신음이 터져 나오자, 다비드는 앞으로 나가서 부하들에게 자신을 보여줬다.

전투가 중반에 접어들 무렵, 갤러웨이인들이 연이은 공세에도 적 대열을 뚫지 못하고 지휘관이던 도널드와 울게리히가 전사하자 물러나기 시작했다. 이에 다비드 1세는 하이랜더를 이끌고 최전선으로 달려가 공세를 펼쳤다. 이때 그는 말에서 내려 도보로 공격을 이끔으로서 장병들의 사기를 끌어올리려 애썼다. 그러나 이것은 흔들리는 스코틀랜드의 사기를 회복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갤러웨이인의 패배는 다른 일족과 분견대에 공포심을 확산시키는 악영향을 초래했다. 하이랜더는 동맹군이 그들을 지나 달아나는 것을 지켜보다가 돌아서서 퇴각했다. 이에 다비드 1세는 남은 병력과 경호원을 모아서 인근 언덕으로 향한 뒤, 그곳에 깃발을 세우고 계속 항전했다.

그렇게 한 시간 내지 2시간 정도 버티던 그는 적이 공세를 중단하자 질서정연하게 철수했다. 잉글랜드군은 적을 추격하는 대신 중상을 입어서 낙오된 스코틀랜드군을 사살하고 목을 취했다. 한편, 헨리 왕자는 적 전선 뒤편에 고립되어서 잉글랜드 기병대의 집중 공격을 받고 부하 19명과 함께 가까스로 빠져나갔다. 그 후 그는 잉글랜드군으로 위장해 그들의 진영에 들어갔다가, 몰래 탈출한 뒤 사흘 만에 아버지 다비드 1세와 합세했다.

4. 결과

당시 추산에 따르면, 스코틀랜드군 사상자는 10,000 명에서 12,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 학자들은 스코틀랜드군이 손실을 입은 후에도 잉글랜드 북부에서 작전을 이어갈 수 있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신빙성이 없다고 간주하며, 갤러웨이인 1,500명과 다른 지역 출신 스코틀랜드군 1,500 ~ 3,000명이 죽거나 생포되었을 거라고 추정한다. 잉글랜드군의 손실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지만, 수백 명이 죽거나 다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요크셔 귀족들은 승리에 기뻐하며 스코틀랜드군을 추격하는 대신 군대를 해산하고 자기들 영지로 돌아갔다. 그 덕분에 다비드 1세는 칼라일에서 군대를 재편성할 수 있었다. 이후 1138년 9월 말 교황 특사인 오스티아 주교 알베릭과 만나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사이의 휴전을 협상한 그는 원정 중에 끌려간 모든 여성들을 돌려보내고 1139년 11월 11일 이전에는 잉글랜드를 다시 공격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워크 성은 이러한 조건에서 명시적으로 면제되었고, 다비드 1세는 이 성을 공략하기로 했다. 그는 수비대와 주민들은 결사 항전했고, 스코틀랜드 공성 장비 대부분이 파괴되기도 했지만, 스코틀랜드군이 성을 봉쇄해 식량난이 극심해지자, 11월에 리보의 수도원장이 다비드 1세를 찾아가서 협상한 끝에 수비군이 명예롭게 무장하고 떠나는 조건으로 항복하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워크 성을 접수한 다비드 1세는 성을 모조리 허물도록 했다.

이후 노럼 성을 짧은 포위 끝에 공략하고, 유스타스 피츠 존이 스코틀랜드에 넘긴 알닉 성을 점유하면서, 다비드 1세는 스탠더드 전투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노섬벌랜드 점유권 분쟁에서 유리한 입장에 설 수 있었다. 1139년 4월 9일, 다비드 1세는 스티븐과 더럼 조약을 체결했다. 스티븐은 다비드 1세의 아들 헨리가 헌팅던 백작의 명예를 계속 누리는 걸 허용할 뿐만 아니라 노섬벌랜드 전체를 다비드 1세에게 양도하기로 했다. 그는 이후에도 스티븐과 종종 전쟁을 치르면서도 마틸다를 더 이상 돕지 않고 노섬벌랜드와 컴벌랜드 지방을 계속 손아귀에 쥐었고, 칼라일을 자신의 거점으로 삼았다.


[1] 스코틀랜드 국왕 말 콜룸 3세의 딸 [2] 스코틀랜드 국왕 던컨 2세의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