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중계 영상. 문제의 장면은 10분 32초부터 나온다. |
1. 개요
1954년 12월 22일 쿠라마에 국기관에서 열린 기무라 마사히코(37세) 대 역도산(30세[1]?)의 일본 프로 레슬링 챔피언 결정전. 에도시대에 미야모토 무사시가 사사키 코지로와 벌였다는 간류지마 결투[2]에서 이름을 따와 쇼와(시대)의 간류지마 결투 또는 쇼와의 간류지마 전투라고도 불린다.2. 배경
이 경기를 먼저 제의한 것은 기무라 마사히코였다. 역도산과 기무라는 그 해 2월 미국에서 '샤프 형제'를 초청, 14연전에서 승리하여 프로레슬링 붐을 일으키고 있었다. 하지만 유도계 제1인자였던 기무라는 프로레슬링 계에서는 역도산에 밀리면서 No.2이자 역도산의 태그팀 파트너 정도의 역할로서[3] 그다지 강함을 어필하지 못했고, 이에 울분이 쌓이게 된다.기무라는 아사히 신문 지상에서 "진검 승부라면 내가 더 위다."라는 식으로 토로하고, 역도산이 이에 응전하는 형태로 경기가 잡히게 된다. 경기 직전 각본 조정으로 무승부가 예정되어 있었다. 이 무렵에는 프로레슬링에 각본이 있다는 사실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았고, 모두 진검 승부라고 믿고 있었다. 아사히 신문, 마이니치 신문 등 일반 신문과 NHK에서는 '엔터'가 아닌 '스포츠'로서 보도되었다.
3. 경기 과정
도중까지는 서로 상대 기술을 주고받는 것을 반복했다. 그러다 경기 도중 역도산은 갑자기 각본을 깨고 기습적으로 기무라를 가라데 찹 연타로 다운시킨 후[4], 다운된 기무라의 안면에 사커킥과 손바닥치기를 연타하며 잔인하면서도 어찌보면 싱거운 KO로 끝나고 만다.참고로 역도산은 자신의 일대기를 다룬 다큐에서, 본인이 기무라에게 먼저 급소를 맞고 온몸이 붉어질 정도로 격분해서[5] 실전으로 가버렸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기무라가 역도산에게 발차기로 사타구니 부분을 가격하는 장면이 있어서 거짓말은 아니다.[6] 어찌됐든 대본에 어긋난 갑작스러운 공격에 당황하여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고 수없이 머리를 얻어맞은 기무라는 그로기가 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역도산은 기무라의 머리를 발로 짓밟고 걷어차는 등 격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결국 정신을 못차리던 기무라는 계속 공격만 당하다가 충격적인 KO패로 승부가 마무리된다.
지금와서 보면 상당히 잔인한 방식의 공격인데, 언뜻 보면 휙휙 날리는 따귀 같은데 저게 전부 귀를 노리고 있다. 기무라가 예상하지 못해 어안이 벙벙해져서인지 몰라도 따귀처럼 들어오는 고막치기를 그대로 맞았고, 크게 동요된 상태에서 다시 고막을 가격하는 모습이다. 고막을 손바닥으로 제대로 맞은 상태에선 누구라도 제대로 서 있질 못하는 법이다.[7] 격투기를 좀 아는 사람들이 보면 낭심 가격과 비슷한 급소를 공격하는 상태인 것이다. 기무라가 제대로 서 있질 못하고 기어가면서 테이크 다운을 시도할 수밖에 없는 것도 이미 상황 자체가 그럴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흑백 화면이라서 알아보기 힘들지만, 현장에서 직접 본 사람 말에 의하면 이때 기무라는 이가 부러지고 눈꺼풀이 찢어지는 부상을 입었으며, 링 위에는 직경 50cm의 피웅덩이가 펼쳐졌다고 한다.
4. 논란
기무라의 스승인 우시지마 다쓰쿠마(牛島辰熊)는 놀라서 기무라를 일으키러 링으로 달려가지만, 기무라는 이미 의식을 반쯤 잃어 일어날 수 없었다.시합 후 기무라는 역도산이 무승부로 하기로 합의되었던 각본을 무시하고 자신을 기습하는 바람에 패배했다고 해 상당히 큰 논쟁이 야기되었다. 프로레슬링이니까 각본은 당연한 것이지만 당시에는 프로레슬링에 각본이 있었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 반대로 역도산은 기무라가 먼저 합의에 없는 공격을 하는 등 각본을 어겼기 때문에 자신도 실전으로 대항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어찌 됐든 대결 영상을 보면 각본이 있는 프로레슬링 승부로 봐도 재미를 주는 양상의 경기는 아니었기에[8] 어떤 형태로든 논란이 되었다.
이때 기무라와 선후배 관계로 기무라를 존경하던 최배달은 역도산의 수법에 분노하여 역도산에게 대결을 신청하였으나 응해지지 않았다. 이후 최배달은 한동안 기무라의 복수를 하기 위하여 역도산을 길거리에서 쫓아다녔고, 이 때문에 역도산이 상당히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한다. 일본 격투계에서도 유명한 이야기라고 한다.[9]
기무라 역시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역도산에게 재차 리매치를 신청하였지만 거부되었다고 한다. 이후 기무라는 복수의 기회를 노렸지만, 역도산이 어느 날 야쿠자랑 시비가 붙어 그를 두들겨패다 눈 먼 칼에 찔려 비교적 이른 나이에 허무하게 사망하면서 허사가 되고 만다. 허나 이때의 기억이 평생을 갔는지, 기무라 마사히코는 1993년 75세 나이로 죽기 전 역도산을 떠올리며 "역도산을 죽인 것은 야쿠자가 아니라 나다. 내가 죽음이라는 말을 빌어 그를 죽인 것이다."라고 인터뷰하기도 했다.
사실 이 논란의 흐름은 시대에 따라서 상당히 바뀌었다. 당시만 해도 일반 분위기는 '기무라가 역도산에게 졌다'는 평가가 일반적이었다. 실제 이 경기로 역도산은 이미지는 구겨졌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프로레슬링 스타의 입지를 굳힌 반면, 어찌됐든 경기에서 쓰러진 기무라는 프로레슬링계에서 잊혀지게 된다.
그러나 90년대 이종격투기 붐이 일어나면서 그레이시 가문이 주목받게 되고, 기무라가 과거 엘리오 그레이시에게 이겼다는 경력 때문에 기무라는 재조명받게 된다.[10] 반면 한반도 출신임이 밝혀진[11] 역도산을 옹호하는 의견은 일본 내에서 줄어들게 된다. 물론 무조건 역도산의 출신이나 성격 때문에 기무라만 응원하는건 아니고, 윗 영상 댓글에서도 보이듯 일본인들 중에서도 기무라의 느슨한 경기 자세를 지적하는 의견도 있는 등 다양한 의견들이 있다. 다만 역도산 승자라는 의견이 대세였던 당시에 비하면 각본 시합이였던 점 등으로 기무라 재조명 기류와 함께 그를 재평가하는 시선도 늘어났다고 보는게 더 맞을듯.
아무튼 결과적으로 링 위에서 얻어맞은 기무라는 무도가로서 망신을 샀다. 극단적인 일본식 무도지상론의 관점에서 보면 저 '쇼와의 간류지마 대결'은 각본이 무너진 시점에서 그 자체로 실전 상황이라고 볼 수도 있다. 최상단 영상 기준으로 10분 35초 대에 역도산이 기무라의 턱에 펀치를 날리는 것을 볼 수 있다. 본격적인 실전 상황은 이 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기무라는 후일 일격을 받은 순간 이미 정신을 잃어 대처할 수 없다고 했지만, 사실 시합 영상을 보면 첫 번째 공격에서 이미 그 정도로 강렬한 타격을 받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실제 이 대결에서도 기무라가 일격을 받은 다음 아예 반격을 안 한 것은 아니며, 도중에 기무라가 붙잡기를 시도하면서 반격을 시도하거나 심판의 수차례의 스톱 상황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얻어맞다가 결국 다운을 거듭한 끝에 그로기 상태가 돼버린다. 각본이 있는 시합이라고 방심한 것은 사실이겠지만, '무도가'로서는 수치스러울 정도로 너무 무력하게 무너진 것도 사실이다.
각본에 대한 논쟁은 결국 제대로 결판은 나지 않고 흐지부지하게 끝났지만, 과정이야 어쨌건 간에 링 위에서 피투성이가 되도록 얻어맞은 기무라는 무도가로서 망신을 당했기에 나이도 든 상태에서 이후 제대로 재기하기가 어려워진다. 이 때문에 역도산이 당시 유도 강자로 이름이 높았던 기무라를 박살내서 프로레슬링의 입지를 높히기 위해 혹은 본인 단체의 입지를 높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미리 합의된 각본을 어기고 공격한 거 아니냐는 루머까지 돈다. 실제로 역도산은 지랄맞은(...) 성격이긴 해도 영악한 면이 있었고.[12] 이 경기 후 결과적으로 패한 기무라가 창설한 프로레슬링 단체는 완전히 망해버리고[13], 역도산의 단체가 일본 부동의 프로레슬링 단체가 되었기 때문에 더 그럴듯해 보일 수도 있다.
다만 이 시합이 역도산이 기무라를 묻어버리기 위해서 파놓은 시멘트 매치였다고 해도, 프로레슬링은 어디까지나 1대1 경기의 형식을 띠고 있는 만큼 마에다 아키라처럼 실력으로 벗어나는 경우도 있는데 기무라는 그러지 못했다. 결국 당사자들이 모두 사망한 상태에서 따지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면이 있지만, 이 논란은 일본에선 21세기에도 잔잔히 이어지고 있는지, 2011년에는 마스다 도시나리 저 '기무라 마사히코는 왜 역도산을 죽이지 않았는가'라는 논픽션 검증이 가미된 책이 출판되기도 했다.
5. 진검승부라면 이길 수 있었는가?
사실 당사자들이 모두 다 사망한 오늘날 와선 부질없는 소리긴 한데, 그럼에도 역사적으로 유명한 시합이다 보니 당시 진심으로 승부했다면 누가 이길지에 관해 매니아들이 종종 토론하기도 한다.일단 기술적으로 보자면, 우선 역도산은 스모와 프로레슬러 출신이긴 하지만, 실전에서는 그다지 내세울 만한 것이 없다(?)고 보는 의견도 있다. 반면 기무라는 역대 유도 강자들 중에서도 손에 꼽는 테크니션이며, 주변의 증언에 따르면 가라테와 복싱 경험도 있어서 타격 기술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따라서 지금 시점에서 생각해보면 그래플링과 타격을 겸비한 종합격투가적인 면모도 있었다.[14] 고로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기무라가 우위라고 보는 의견이 있다.[15]
힘 측면에서 보자면, 기무라는 한손으로 동전을 구부리는 엄청난 괴력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역도산 역시 어디가서 힘으로는 밀리지 않을 만큼의 장사였다. 일단 현대적인 체급으로 따지자면 역도산 쪽이 15kg 이상 무거워서 2체급 이상 위이고 덩치도 더 큰 편이다.[16] 게다가 당시 기무라는 훈련량이 많지 않아서 이전보다 오히려 벌크가 상당히 줄어든 상태였다. 게다가 나이도 역도산은 논란이 있지만 일단 공식적으론 7세 아래로 젊었다.[17] 무엇보다 격투에서는 단순한 완력보단 무게가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힘 면에서는 역도산이 우위라고 추정된다.
컨디션 측면에서 보자면, 회고시 기무라 마사히코는 프로레슬링을 말 그대로 '쇼'라고 생각하여 연습도 그다지 진지하게 임하지 않았고[18], 캬바레 클럽 운영을 하는 등 다른 일도 하고 있었다. 실제로 당시 경기 영상을 보면 기무라의 신체는 유도가 시절에 비해 벌크가 그리 크지 않다. 심지어 경기 전날까지 술을 마시고 놀았다는 증언도 존재한다. 반면 역도산은 기무라를 꺾기 위해 유도 기술에 대응하는 훈련까지 했다고 하며, 게다가 역도산은 말년으로 갈수록 경기에서 흥분제와 진통제 등의 약물 도핑을 한 경우도 많았다고 하니 기무라와 임하는 자세부터 달랐다고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기술 면에서는 기무라가 우위에 있었을지 모르나, 체급에서 꽤 밀리는 상태였고, 당시 회고를 봐도 기무라는 컨디션이나 경기를 임하는 자세에서 아마추어적인 시각을 비췄기 때문에 진검승부였다고 할지라도 역도산한테 이기긴 어려웠을 것으로 보는 시선이 더 많은 편이다.[19]
설령 이런 식의 기습이 아니라 정식으로 싸우라고 판을 깔아줬어도 기무라가 역도산을 이길 가능성은 낮았는데, 정황상 기무라는 역도산을 얕보고 방심해서 시합에 임했을 가능성이 높고 반대로 역도산은 치밀한 성격답게 기무라와 싸울 것을 대비해 모든 안배를 해놓고 싸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쇼와의 간류지마 사건은 기습적으로 일어난 사건이기는 해도 당시 역도산이 기무라를 어떤 눈으로 보고 있었을지 예측하는 게 전혀 어려운 일도 아니었을 텐데[20] 기무라는 전혀 대비도 해놓지 않고 술만 퍼마셨다고 하니 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일은 아닌 것이다.[21]
이러한 관점으로 본다면 일본인들이 이를 '쇼와의 간류지마'사건이라 부르는 것은, 건곤일척의 승부라는 상징성 외에, 세부적 의미로도 상당히 들어맞는다 할 수 있다. 실제, 미야모토 무사시도, 당대 부동의 장검의 달인 사사키 코지로를 무너뜨리기 위해 교활하고 비열한 책략을 깔아놓고 승부에 임했기 때문이다.[22]
[1]
다만 역도산의 실제 나이는 이보다 많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2]
진위 여부는 불명확하다.
[3]
기무라가 거구의 서양 레슬러에게 쳐맞고 태그하면 역도산이 상대를 물리치는 식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4]
일단 프로레슬링 경기이므로 '가라데 찹'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역도산이 평소 프로레슬링에서 사용하던 찹 기술보다는 '
스모'의 손바닥 치기에 더 비슷하다.
[5]
실제
분노조절장애도 좀 있어보이던 역도산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고의적으로 각본을 깼다기보단 진짜 '열받아서' 폭발했을 가능성도 있다.
[6]
다만 해당 영상을 보면 기무라가 급소를 발로 찬 것은 관계자의 증언처럼 실수(?)일 수 있는 여지가 있다.
[7]
귀는 중심을 잡는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8]
쉽게 말해 애들한테 보여줄만한 경기가 아니다.
[9]
소설 <바람의 파이터>에서는 역도산이 자신의 장기인 춉을 최배달에게서 배운 것으로 나온다.
[10]
다만 상술한 대로 기무라는 엘리오보다 체중이 많이 나갔다.
[11]
한창 활동할 당시 역도산은 한반도 출신임을 숨겼기에, 일본 대중들에겐 걍 일본인으로 알려져있었다. 다만 스모 시절부터 함께한 몇몇 주변인들은 그의 출신을 알고 있었고, 역도산 역시 생전 내한했을 땐 본인의 한반도계 정체성을 숨기진 않았다.
[12]
사실 그 정도가 아니었다면 전후 조선인이 타향에서 이렇게 성공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심지어 이런 영악한 면모는 최영의도 어느 정도 갖고 있었다.
[13]
물론 이전에도 역도산 단체에 밀리는 신생 단체긴 했다. 그래서 흥행을 위해 역도산과의 매치도 준비한건데, 결과적으론 악수가 됐다.
[14]
물론 당시 수준에선 타격, 그래플링 다 배운
최영의(유도 4단이었다)도 극진공수도에선 타격기 위주로만 대응한 것에서 알 수 있듯, 실전에서 둘 다 섞는다는 관점 자체는 상당한 시간이 걸려서야 정립된다. 애초에 실전 싸움은 깨물기 등도 있어서 현대의 종합격투기식 대결과는 다른 양상이 벌어질 가능성도 높았으며, 또한 당연하지만 당시엔
종합격투기가 전혀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복싱을 배웠다고 해도 그걸 유도 선수가 제대로
연계해 응용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15]
물론 기무라의 유도만큼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았을 뿐이지 역도산도 무술 수련을 했다. 장기인 가라데춉을 연마하기 위해 가라데에 입문했다는 말도 있고 또 후술되었다시피 기무라를 상대하기 위해 유도 훈련도 했다. 그리고 역도산도 미국 흥행을 하러 가면서 스스로의 몸을 지키거나 도장깨기하러온 뜨내기를 상대하거나 시멘트를 방지할 필요도 있았으므로 적어도 호신술 이상으로 수련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실제로 루 테즈나 안드레 더 자이언트도 폴리스맨이라 불리는 이런 가드 역할을 한 적이 있었다.
[16]
사실 기무라도
엘리오 그레이시와의 대결 당시 체급 면에서 더 높았기 때문에 승리한 측면도 있다.
[17]
그리고 역도산은 이미 한참 전성기 시절이었던 것에 비해 기무라는 전성기를 지났던 시기였다.
[18]
유도가 시절엔 기무라가 시합에서 지면 할복한답시고 배에 칼로 상처내는
자해성 행동까지 했었다는걸 보면, 멘탈이 많이 느슨해진 것을 추정할 수 있다. 참고로 유명 프로레슬러
루 테즈는, 자서전에서 (각본이 있는 프로레슬링일지라도) 반칙을 포함한 모든 것에 대응하는 마음의 준비를 해, 항상 긴장감을 가지고 경기에 임해 왔다고 말했는데, 설령 쇼일지라도 승부는 승부인 것.
[19]
심지어 본 항목 영상 댓글에도 비슷한 일본인들 의견이 있다.
[20]
역도산은 자신이 꼭대기에 서지 않으면 성이 차지 않는 성격이었던 데다가 애초에 프로레슬링 업계도 비록 이전에 어느 정도 기반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실질적으로 일본의 프로레슬링 업계를 여기까지 세운 건 역도산의 업적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기무라가 선배랍시고 갑툭튀해서 참가했으니 역도산이 기무라를 어떤 눈으로 봤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당장 역도산은 숨기고 있었다고는 해도 재일 한국인인데 이 사실이 드러날 경우 기무라를 순수 일본인 영웅이라는 명목으로 앞세워서 역도산의 자리를 뺏으려 하지 말라는 보장이 없었던 것. 애시당초 역도산 자체가 일본인 레슬러가 서양인 악역을 혼내주는 국뽕 각본으로 성공한 사람이기도 했는데 그 자리에 순수 일본인인 기무라로 채우려는 이들이 없었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그러니 역도산 입장에서는 구밀복검(口蜜腹劍)이라는 말처럼 겉으로는 프로레슬링 업계에 입문한 기무라를 웃으며 환영했다고 하더라도 속으로는 처음부터 칼을 갈고 있었을 게 뻔했다.
[21]
물론 상술한 대로 순수 격투가로서 기량은 기무라가 역도산보다 위일 수는 있겠지만 의미없는 소리에 가깝다. 싸움이 그것만으로 결정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
[22]
다만 무사시와 간류의 결투도 여러 버전이 있고 어떤 것이 사실인지는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무사시가 책략을 쓴 것 자체는 그럴 수 있다고 해도 비열한 짓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불명이다. 간류지마 문서에 나온 것처럼 무사시가 제자들을 데리고 다구리를 쳤다는 내용도 어디까지나 설 중의 하나로 꽤나 마이너한 편이며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무사시가 약속시간보다 일부러 늦게 가서 배에서 노를 깎아 만든 몽둥이로 칼집을 버리고 성급하게 달려든 간류를 때려죽였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