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중돈 孫仲暾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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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손중돈 |
출생 | 1463년 (세조 9년) |
사망 | 1529년 (중종 24년) |
대표관직 |
우참찬 공조판서 이조판서 대사헌 대사간 |
본관 | 경주(月星) |
호 | 우 제 |
자 | 대 발 |
시호 | 경절공 |
1. 소개
1. 소개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대발(大發), 호는 우재(愚齋). 등(登)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 병조참판 사성(士晟)이고, 아버지는 계천군(鷄川君) 소(昭)이며, 어머니는 유복하(柳復河)의 딸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회재
이언적(李彦迪)의 학문적 스승이자, 외숙부이다. 1482년(성종 13) 사마시에 합격하게되어 정계에 입문한다, 1489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과거), 예문관봉교(藝文館奉敎)로써 벼슬길에 나서게 된다, 청환직(淸宦職)을 역임하였다. 1497년(연산군 3) 양산군수, 이어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사복시정(司僕寺正)으로서 간관(諫官)들이 연산군 즉위로 인해 벼슬을 가지고 있던 대부분의 인물이 쫒겨 날때에 그는 임관 된다. 1506년
중종반정이 성공하고 경북 상주의 목사[1]로 부임하여 다시 정계에 복귀하게 된다, 선정 상주에 흉년이 든 상황을 보다못한 그는 자신의 녹봉(월급)으로 다리를 놓아 백성들이 걸어 다니도록 하였고,
양동마을에서 곡식을 풀어 백성들에게 봉야하여 1509년(중종 4) 에는 표리(表裡) 1습(襲)을 하사받고 좌승지로 승진하였다. 이조판서, 예조판서를 거쳐 1517년, 성절사(외교관)으로써 명나라에 다녀왔다. 후의 행적은
공조판서·
이조판서·세자시강원빈객(世子侍講院賓客)을 지낸 뒤 도승지를 3번, 대사긴을 4번 거쳐,
우의정에 이르렀다. 정치적 절정기를 보낸 그의 이후 행적은 경상도 관찰사, 전라도 관찰사, 충청도 관찰사, 함경도 관찰사 를 거쳐 중종때 청백리에 녹선된다. 척백리 신하로써 최고의 영광이자 당시 가문의 영광이였으며 사후 숙종 1704년 경주 유금리 동강서원 경주동강 서원에 배향 되었다.
[1]
지방수령, 현재로 치자면 시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