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8-09 17:06:50

권희경



1. 개요2. 생애3. 여담4. 참고문헌

1. 개요

북한의 정치인, 외교관.

2. 생애

1928년 2월 19일, 강계에서 태어났다. 김일성종합대학 졸업 이후 1953년 중앙위원회에 배치되었으며 전문 외교관의 길을 걸었는지 1965년 외무성 부상으로 나타났다. 1972년 1월, 렴태준의 뒤를 이어 주소 북한대사로 임명되어 1976년 7월까지 재임하고 김재봉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1972년 12월, 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으며 1973년 6월, 북한 스칸디나비아 4국과 동시에 수교하면서 스웨덴 대사를 겸하였다. 1973년 10월, 28차 유엔총회에서 북한 대표단장으로 출석하였으며, 1974년 9월 61차 IPU회의에 북한 대표로 참석했다. 소련 대사 해임 후인 1977년 국제부 부부장에 임명되었다. 북한에서 공식적으로 발표를 안해서 확실하진 않지만 6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1980년 4월, 김재봉의 뒤를 이어 다시 한번 소련 대사에 임명되었다. 소련대사로 재임하면서 소련으로부터 핵기술을 들여오라는 김일성의 지시를 수행하였고 그 공으로 영웅 칭호까지 받았으며 외화조달에 탁월한 능력을 보여 김정일의 측근 대열에 합류하였다.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982년 2월, 7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다. 1982년 4월, 김일성 칠순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았으며 1986년 11월, 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다. 1988년 3월, 조선로동당 6기 13중전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하였다. 1989년 12월, 소련대사에서 해임되어 손성필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귀국했다. 1990년 4월, 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다. 7월에 리용철의 뒤를 이어 대외정보조사부장에 임명된 것으로 파악되었다. 1991년 5월, 허담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1992년 4월, 김일성 팔순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으면서 이중수훈자가 되었다.

1994년 7월, 김일성 장의위원, 1995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을 지낸 것을 보아 이때까진 잘 지낸 것이 확실하다. 하지만 1997년, 소련대사 재임 중에 공금을 횡령했다는 사실이 들통나면서 간첩 혐의를 뒤집어쓰고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후지모토 겐지의 증언에 따르면 이미 김일성이 죽던 시점부터 김정일이 어찌된 일인지 권희경을 멀리했으며 1997년에 안기부와 접촉한 증거가 나와서 체포됐는데 처형됐는지 자살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이한영은 권희경이 1980년에 술에 만취해서 오스트리아 공작원에게 지도자 동지에게 마누라도 바칠 수 있겠냐고 난동을 부리다가 자신에게 두들겨 맞은 일화를 소개했는데 이한영 책을 북한에서 안봤을리 없으니 이것도 한몫 했을 가능성이 있다. 1998년 11월, 이종찬 안기부장은 권희경이 숙청당했다고 국회 정보위 감사에서 보고하였다. 이후 북한 매체에서 그의 이름이 기록말살되는 등 숙청당한 것이 확실하다.

그가 숙청당한 이후 35호실로 개편된 대외정보조사부는 10년 넘게 부장이 임명되지 않다가 통일전선부와 정찰총국으로 통폐합되었다.

3. 여담

유일하게 2번에 걸쳐서 주소 대사직을 수행하였다. 이후 주 러시아 북한 대사들까지 다 합쳐도 유일하다.

4.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