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2 00:56:31
1. 소개2. 클럽 경력3. 국가대표 경력4. 플레이 스타일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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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전
축구선수로 포지션은
골키퍼였다.
이탈리아의 프로 축구 리그인
세리에 A에서 주로 활약하며 한 때는
세리에 A 최고의 골키퍼 중 한 명으로 간주될만큼 뛰어난 기량을 선보였다.
2. 클럽 경력
1980년
3월 18일
레만호를 낀 도시로 유명한
프랑스의
토농레뱅에서 태어나 1997년
AS 칸에 입단하면서 선수생활을 시작했다.
1997년 9월 20일 불과 17세의 나이에
RC 랑스와의
리그앙 경기에서 출전함으로써 1군 무대에 데뷔하였고, 훌륭한 활약을 보여주면서 당시 리그 앙의 수준급 베테랑 수문장이었던
그레고리 윔비를 벤치로 몰아내고 24경기에 출전했다.
칸에서의 이와 같은 맹활약에 감명받은
세리에 A의 명문 클럽들이 그에게 오퍼를 보냈고,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의 제의를 수락하며 프레이는 1998년 패션의 도시 밀라노로 떠난다. 하지만 19세의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인테르에서는
잔루카 팔리우카와 안드레아 마짜티니에게 밀려 3순위 골키퍼로 머물렀고 마짜티니가 1999년 겨울 이적시장에서
AC 페루자로 이적하고 난 뒤에야 2순위 골키퍼로 승격한다. 1999년 3월 21일
제노아 CFC와의 경기에서
세리에 A 첫 데뷔전을 치른 것을 비롯해 이적 첫 시즌 총 7경기에 출전했다.
인테르는 장기적으로 프레이의 실전 경험을 쌓아주기 위해
엘라스 베로나 FC로 프레이를 임대시킨다. 그리고 헬라스 베로나에서 30경기를 출전해 12 클린시트를 기록하며 강등권에 처져 있던 베로나를 세리에 A에서 잔류하는데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2.4. 인터 밀란(복귀)
2000-01 시즌 인터 밀란으로 복귀해 이번에는 주전 장갑을 끼었고,
UEFA 챔피언스 리그 3라운드 경기를 포함해 51경기에 출전, 11회의 클린시트를 기록하며 좋은 활약을 보였다.
그러나 인테르는 프레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유로 2000에서 최고의 활약을 선보인
프란체스코 톨도를 영입하였고, 2001년 여름 훗날 세계 역사상 최고의 골키퍼 중 한 명으로 꼽히게 되는
지안루이지 부폰이 당시 기준 골키퍼 사상 최대의 이적료에
유벤투스로 이적함으로써 골키퍼 포지션에 공백이 생긴
파르마 칼초로 이적했다. 그때만 해도 세리에
7공주 중 하나로 손꼽히며 잘나가던 파르마에서 없어서는 안될 핵심적인 존재가 된 프레이는 파르마가 재정난으로 강등권에 처한 뒤에도 빅클럽의 오퍼를 마다하고 2004-05 시즌까지 남아 파르마의 극적 잔류에 기여하였다. 파르마는 볼로냐와 승점이 같아 강등 타이브레이커를 치렀는데 1차전 홈에서 0-1로 패배한 뒤 2차전 원정경기에서 볼로냐의 슈팅들을 모조리 막아내며 2-0 승리로 뒤집기 생존을 이끌어냈다.
2.6. ACF 피오렌티나
2005년 여름 파르마를 떠나 피렌체의
ACF 피오렌티나로 임대이적한다. 2005-06 시즌 피오렌티나로 오자마자 좋은 활약을 선보였고, 이에 고무된 피오렌티나는 2006년 그와 정식계약을 체결해 피오렌티나로 완전히 이적했다. 그리고 피렌체에서 그는
루카 토니,
스테파노 피오레 등과 함께 피오렌티나의 상승세를 이끌었다. 이로 인해 많은 팬들과 전문가들로부터
세리에 A 최고 골키퍼 중 한 명이라는 찬사도 받았다. 2011년까지 피오렌티나에서 뛰면서 218경기에 출전해 72번의 시합을 무실점으로 막았다. 그러나 2010년 11월 얻은 부상으로 시즌아웃 되었고, 마침 영입된
아르투르 보루츠에게 주전 자리도 위협받자 2011년 피오렌티나를 떠났다.
2011년
제노아 CFC로 이적해 2시즌간 76경기에 출전했고 17차례의 클린시트를 기록하는 등 준수한 활약을 펼쳤다.
2013년
터키의
부르사스포르로 이적해 첫 시즌에는 39경기에 출전해 주전으로 활약했으나, 다음 시즌인 2014-15 시즌에는 단 한 경기에도 출전하지 못했으며, 2015년 부르사스포르로부터 방출된 후 현역에서 은퇴하였다.
3. 국가대표 경력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과는 인연이 없었다. 한창 파르마와 피오렌티나에서 잘 나갈 때는
파비앵 바르테즈와
그레고리 쿠페,
미카엘 랑드로에 밀려 A매치에서 단 2경기를 출전하는데 그쳤다. 사실 프레이가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의 프랑스 대표팀 감독이었던
레몽 도메네크는 이해할 수 없는 선수선발을 하는 기행으로 유명했는데
로베르 피레스와
루도빅 지울리를 월드컵 엔트리에서 선발하지 않고, 노화되어 기량저하가 뚜렷한
파비앵 바르테즈만 골키퍼로 주구장창 기용하는 등과 같은 식이었다. 결국 월드컵 이후 도메네크와 대판 싸운 뒤 "도메네크가 있는 한 프랑스 대표팀에서 뛰지 않겠다"는 선언을 했는데 문제는 도메네크는
유로 2008에서 그 삽질을 하고도 프랑스 축구협회의 재신임을 받아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공화국까지 잔류해버리는 바람에 대표팀에 뽑힐 일이 없게 되었으며, 도메네크가 떠난 후에는
위고 요리스가 포텐이 터지고 자신도 기량이 저하되는 바람에 대표팀에 선발되지 못하게 되었다. 이러나 저러나 참으로 좋은 기량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대표팀과는 궁합이 맞지 않았던 불운한 선수다.
4. 플레이 스타일
반사신경과 순발력이 대단히 뛰어나 화려한 선방을 자주 보여주었으며,
페널티 킥 선방능력도 준수한 편이었다. 또 침착한 성품과 높은 프로의식으로 머물렀던 클럽마다 많은 다른 선수들의 귀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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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파 온라인 2와
피파 온라인 3에서는 가성비 최고의 골키퍼로 유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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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동생인 니콜라 프레이, 아버지 레이몽, 할아버지 앙드레 역시 축구선수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