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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7-16 19:58:26

비첼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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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성인
성 비첼린
st.Vicelin
파일:vicelin.jpg
출생 1086년
독일 니더작센 하멜른
사망 1154년 12월 12일
독일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축일 12월 12일
종교 가톨릭
표기 비첼린, 비첼리노, 비켈리누스, 비체린, 비쩨린
Vicelin,Viceline,Vicelinus,Vizelin


파일:701px-Schwerin_Propsteikirche_St._Anna_Glasfenster_2014-05-23_1-2.jpg
▲ 슈베린의 성 안나 성당에 위치한 성 비첼린 스테인드글라스 (schwerin propsteikirche st.anna)

1. 개요

가톨릭 성인. 성 비첼린 외에도 성 비켈리누스, 성 비체린, 성 비셸린, 성 비첼리노로 불리기도 한다.

성인의 이름을 영문으로 기입할 때는 Vicelin, Viceline, Vicelinus, vitzel, Wissel라고 기입하고 있다. 성 비첼린은 지금의 독일의 북부지역인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의 남쪽지방인 홀슈타인 지역에서 살았던 살던 벤드(Wends)족의 사도이다.

2. 생애

1086년 태어난 비첼린은 니더작센 지역의 하멜른 출신으로, 부모가 일찍 사망하여 근처의 친척집에서 기거하게 되었다. 그 친척 역시 사제였고 이름은 루돌프(Ludolf) 였다. 그 후 니더작센의 도시인 홀츠민덴(Holzminden) 근처 에버슈타인(Everstein) 성에서 자랐다.

이 후 파더보른(Paderborn) 대성당 학교에서 사제수업을 받은 후, 1118년 브레멘으로 건너가 대성당 수도원에서 지내며 성가대 활동을 하였다. 또한 브레멘 대성당의 교장으로 재임했다. 활동 중 1122년, 함부르크-브레멘의 대주교였던 프레데릭 대주교로부터 사제로의 제의를 받았다. 같은 해인 1122년부터 1126년까지 사제서품을 받기 위한 신학공부를 마무리하기 위해 프랑스(Laon)으로 옮겨 수학하였다. 그곳에서는 중세 프랑스 철학을 대표하는 철학자이자 신학자였던 피에르 아벨라드(Abelard) 하에서 신학공부를 마쳤다.

1126년, 독일로 돌아왔지만 브레멘으로 돌아가지 않고 마그데부르크에서 의전수도회인 프레몽트레회의 창시자인 노르베르토 대주교[1]에게 사제서품을 받았다.

1126년 사제서품 이후 비첼린은 함부르크의 대주교였던 아달베로 대주교에 의해 슬라브족이 기거하고 있는 알트-뤼베크(Alt-Lübeck) 지역으로 보내졌다. 알트-뤼베크는 819-1138년까지 존재하였으며 현재는 뤼베크(Lübeck)로 불리고 있는 지역이다.

1126년 독일 브레멘 대교구의 대주교는 비첼린을 하인리히 공(아보트리테의 하인리히) 에게 파견하였다.[2]

목적은 이교도였던 벤드족(Wends)에 대한 선교사업을 설득하는 일이었다. 아보트리테의 하인리히공은 비첼린을 접견한 후 그의 임무를 허락하였다. 그리하여 비첼린 브레멘으로 돌아가 대주교에게 경과를 보고한 뒤, 선교사를 뽑고 파견 구역을 정하는 등 본격적인 준비를 시작하였다.

벤드족에 대한 선교는 성공할 가능성이 매우 높게 보였다. 이웃한 서구 세계에 호의적인 그리스도교 벤드족 군주의 승인하에 이루어지는 선교활동이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하인리히공은 당시 벤트족 사이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로 인정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창하게만 보였던 비첼린의 선교사업에 먹구름이 끼게 되었다. 가장 강력한 선교후원자였던 아보트리테 하인리히공이 1127년 봄에 사망했던 것이다.

뤼베크에서 선교활동을 한 후, 브레멘 교외에 있는 비펜토르프에서 선교활동을 이어갔다. 연속된 선교활동으로 그는 쉴 줄 모르는 설교가, 교사, 그리고 성공적인 선교사라는 칭호를 얻었다.

이 후 아달베로 대주교는 홀슈타인(Holstein) 지역의 마크라드 1세(Marcrad I)의 요청에 따라, 슬라브족과 색슨족의 국경지대에 있는 홀슈타인(Holstein) 에서의 선교를 위해 비첼린을 파견했다.

1127년, 비첼린은 선교를 시작하고 같은 생각을 가진 사제를 모아 그들과 함께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노이뮌스터 아우구스티누스의 규칙을 지키기로 하는 아우구스티노회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1135년, 바트제게베르크 (Bad Segeberg) 에 수도원과 교회를 설립하였다.

새로운 함부르크-브레멘의 대주교 하트비히 1세(Hartwig I)는 1066년 슬라브 봉기로 소멸되었던 올덴부르크, 라체부르크, 슈베린 교구를 복구하기위해 노력하였다.

비첼린은 하트비히 대주교에 의해 1149년 9월 25일 올덴부르크 교구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하트비히 대주교와 하인리히 사자공 사이의 갈등에 휘말리게 되었고, 1150년 뇌졸중을 앓기 시작하였다.

그 이후 비첼린은 보사우(Bosau)와 독일 슐레스비히 홀슈타인에서 가장 큰 호수인 Großer Plöner See 지역을 새로운 선교기지로 삼고, 1151년~1152년 그곳에서 새로운 교회인 보사우의 페트리 교회를 짓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성 페트리 교회는 존재하고 있으며, 개신교의 한 분파인 루터교에 속하게 되었다. ( 독일 보사우 성 페트리 복음주의 루터교회)

1152년 비첼린은 노이뮌스터에 머무르는 동안 2번째 심각한 뇌졸중을 겪게 되었다. 비첼린은 1154년 12월 12일 노이뮌스터의 팔데라(Faldera) 에서 2년 반 동안의 투병생활을 마치고 선종, 그곳에 묻혔다.

그가 시성된 후 1332년 성 비첼린의 유해는 노이뮌스터에서 보르데즈홀름(Bordesholm) 의 아우구스티노회 수도원의 성당 제대 앞으로 옮겨졌다. 성 비첼린의 무덤은 더 이상 확인할 수 없으나, 그를 기억하고 있는 바로크시대의 명판은 보르데즈홀름 수도원에서 확인할 수 있다.

파일:1920px-Bordesholm_Klosterkirche_Hinweistafel_Vicelin_img02.jpg

3. 시성과 그 이후

비첼린은 시성되어 성인이 되었다. 성 비첼린은 독일 북부에서 여전히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의 이름을 딴 많은 교회와 종교단체가 있다. 비첼린의 이름은 Vicelin, Vizelin, Vicelinus, Wissel, Witzel, Wizelin 등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그의 이름은 현재 독일어로 현명한 이를 뜻하는 Der weise의 어원인 Wizo에서 왔다는 설이 있다.

4. 성인의 발자취

파일:20211002_131940.png
https://www.vicelinweg.de/
■ 성인 비첼린 순례길
비첼린성인의 발자취를 따라 도보, 자전거, 대중교통을 이용한 순례가 가능하다.

weg는 독일어로 길(road)를 뜻하며, 비첼린 성인의 길을 따라 걸어볼 수 있다. 비첼린을 본명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가볼 만한 코스이다.

파일:20211002_132254.png
https://www.kirche-st-maria-st-vicelin.de/
■ 성모마리아-성비첼린 성당
비첼린 성인이 활동하셨던 노이뮌스터에 있는 가톨릭 성당으로, 세인트 마리아-세인트 비첼린 성당 (st.maria-st.vicelin)이다. 성모마리아-성비첼린 성당은 1983년 네오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1966년, 성모 마리아 성비첼린에게 봉헌되었다.

파일:20211002_135506.png
https://www.erzbistum-hamburg.de/
■ 함부르크 대교구
비첼린 성인이 활동하셨던 노이뮌스터 지역을 관할하는 교구로, 함부르크 대교구 관할 성당 및 순례지에 대해 확인해 볼 수 있다.
[1] 마그데부르크 샨텐의 노베르베르트. 6월 6일. [2] 후술할 하인리히 사자공과는 다른 하인리히 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