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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0 03:50:08

서동성(1895)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1895년[1] 12월 13일
대구부 대구군 동상면 남성리
(現 대구광역시 중구 공평동 21번지)[2]
사망 1941년 1월 8일[3] (향년 45세)
경상북도 대구부
(현 대구광역시)
본관 달성 서씨[4]
현수(玄水), 적파(赤波)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255호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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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제3·5대 국회의원을 지낸 서동진은 첫째 남동생이다.

2. 생애

1895년 12월 13일 대구부 대구군 동상면 남성리(現 대구광역시 중구 공평동 21번지)에서 아버지 소주(小洲) 서기수(徐琦洙, 1868 ~ ?.4.3)[5]와 어머니 파평 윤씨 윤매주(尹梅周, ? ~ ?.2.11) 사이에서 4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6] 아버지 서기수는 대구군 지역 유지였고, 외조부 윤성항(尹成恒)은 1886년( 고종 23) 사헌부 감찰(監察)[7], 1887년(고종 24) 예안 현감(禮安縣監)[8], 1895년(고종 32) 장기 군수(長鬐郡守)[9] 등을 지낸 관료 출신이었다. 이후 경상북도 대구군 서상면 남중동(현 대구광역시 중구 장관동 48번지)[10]로 이주하여 본적을 두었고, 대구부 봉산정(현 대구광역시 중구 봉산동) 52-7번지[11]에 주소지를 두기도 하였다.[12]

일본 도쿄도에서 유학하던 중 흑도회(黑濤會) 소속 회원 박열· 김정근(金正根)·이홍근(李弘根) 등과 함께 새로운 무정부주의 단체 흑우회(黑友會)를 결성하였으며[13], 기관지 《불령선인(不逞鮮人)》을 발간하는 불령선인사(不逞鮮人社)의 기자로 활동하였다. 이후 1923년에는 박열· 육홍균· 김중한(金重漢) 등과 함께 산하 단체 불령사(不逞社)를 조직하였다. 그러던 1923년 8월, 당시 일본 제국 천황 다이쇼 덴노와 황태자 히로히토를 암살하려는 계획에 참여했다는 혐의로 불령사 동지들과 함께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었고, 이후 예심에서 면소 판결을 받아 석방되었다.

귀국 후 1925년 9월 29일 경상북도 대구부에서 신재모· 방한상(方漢相)· 정명준(鄭命俊) 등과 함께 무정부주의 비밀결사 진우연맹(眞友聯盟)을 조직하였다. 이후 1,100여 명의 회원을 갖춘 대구노동친목회(大邱勞動親睦會)과 연계하여 진우연맹의 세력 하에 두었고, 또한 흑우회의 후신인 흑색청년연맹(黑色靑年聯盟)·반역아연맹(反逆兒聯盟) 등 일본에서 주로 활동하던 무정부주의 단체와도 계속 긴밀한 연락을 유지하며 연계투쟁을 꾀하기도 하였다. 또한 1927년까지 대구부 내 경상북도청, 대구경찰서, 대구우편국, 대구지방법원 등 일제 주요 관서 및 일본 점포를 파괴하는 한편, 경상북도지사, 경상북도경찰부장을 비롯한 관청의 수뇌부를 암살할 것을 계획하면서 파괴단(破壞團)을 조직하고 중화민국 상하이시에서 활동하던 아나키스트 유림(柳林)을 통하여 폭탄을 입수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을 추진하던 중 진우연맹 회원 안달득(安達得)이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어 집이 가택수색을 당하면서 조직이 발각되었다.

이에 1926년 8월 23일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었고[14], 안달득을 비롯해 신재모·방한상·정명준·김정근·김동석(金東碩)·마명(馬鳴)· 우해룡(禹海龍)· 하종진(河鍾璡)[15]· 쿠리하라 카즈오(栗原一男)·무쿠모토 카즈오(椋本運雄) 등 관련자 11명이 연이어 체포되었다.[16] 1927년 3월 7일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의 예심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대구지방법원의 공판에 회부되었다. 1927년 7월 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미결 구류일수 중 100일 산입, 법정 통산 64일)을 선고받아[17] 옥고를 치른 뒤 1929년 4월 만기출옥하였다.

이후 영천군(현 영천시) 청통면 치일리 은해사에서 4명의 동지와 함께 은거하던 중 1930년 9월 5일 모종의 이유로 영천경찰서에 검거되기도 하였다.[18] 그 뒤 1941년 1월 8일 경상북도 대구부에서 사망했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고,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유해는 당초 대구광역시 수성구 연호동에 안장되었으나 1990년 12월 7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에 이장되었다.

[1] 달성서씨세보 권10 890쪽에는 1897년생으로 등재되어 있다. [2] 1927년 7월 5일 수형인명부 [3] 달성서씨세보 권10 890쪽에는 1942년 12월 11일 사망한 것으로 등재되어 있다. [4] 현감공파(縣監公派)-순수공계(舜壽公系) 24세 동(東) 항렬. [5] 족보명 서상기(徐相琦), 자는 기옥(奇玉). [6] # [7] # [8] # [9] # [10] 독립유공자 공적정보 [11] 또는 52-2번지. 형사사건부 [12] 1927년 7월 5일 수형인명부 [13] 흑우회 회원으로는 서동성과 위 세 명 외에도 육홍균· 홍진유(洪鎭裕)· 서상경(徐相庚)· 김중한(金重漢)·한현상(韓現相)·장찬수(張讚壽)·정태성(鄭泰成)·최규종(崔奎棕)·하세명(河世明)·김형윤(金亨潤) 등이 있었다고 한다. # [14] # [15] 배우 박횐희의 외조부이다. [16] # [17] 1927년 7월 5일 수형인명부 [18] 1930년 9월 5일 동아일보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