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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대학교/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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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대학(1947~1955)2. 국제대학(1955~1992)
2.1. 국제학원 (1955)2.2. 감리학원 (1956 ~ 1958)2.3. 이화학당 (1958 ~ 1980)2.4. 삼문학원 (1980 ~ 1984)2.5. 명지학원 (1984 ~ 1988)2.6. 성한학원 (1988 ~ )
3. 서경대학교(1992~현재)

1. 한국대학(1947~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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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대학교의 전신은 1947년 10월 민족교육에 뜻을 둔 백범 김구 선생의 제자 한관섭(韓觀燮)이 미래의 지도자 육성을 위해 재단법인 한국학원을 설립하고 서울특별자유시(현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에 세운 한국대학(韓國大學)이다. 설립 초기에는 2개 학부, 5개 학과를 설치하였다.

한국대학은 낮 시간 동안 일을 해야 하는 근로자들을 위해 설립된 한국 최초의 4년제 정규 야간대학이었다. 그러나 한국대학은 6.25 전쟁으로 인해 제주도 임시교사로 옮겨야 했고, 부산 전시연합대학으로 합쳐져 운영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급기야 1954년 9월 30일에는 문교부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기존 이사진을 해임시키고, 김정실에게 학장을 위임한다. 한국대학 폐교로 인한 뒷정리를 맡긴 것이다. 그리고 1955년 2월 14일, 한국대학은 최종적으로 폐교의 운명을 맞았다. 이로써 한국대학은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폐교된 대학의 사례로 남게 되었다.

한국대학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한국대학 문서 참조.

2. 국제대학(1955~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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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대학 시절 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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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국제학원 (1955)

한국대학이 폐교되었지만 야간대학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1955년 3월, 김정실이 설립한 재단법인 국제학원에서 한국대학을 인수하여 성동구 신당동에서 국제대학(國際大學)으로 새출발하여 이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개교 석달만에 폐교 위기에 처하게 되었는데, 국제학원이 재산을 과장하여 허위로 신고했고, 학생 등록금을 빼돌려 사용하였으며, 교직원 봉급조차 지급할 처지가 못돼 사채 돌려막기하고 있는 막장 유령재단이라는 사실이 발각되었기 때문이다. 새로 이전한 신당동 교사도 원래 쓰지 않는 폐공장인데다 개발제한까지 걸려 있어 헐값에 빌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1955년 11월, 문교부는 부랴부랴 국제학원의 재단인가 처분을 취소하고 위원회를 구성하여 국제대학을 직접 관리하였다.

2.2. 감리학원 (1956 ~ 1958)

이듬해 1956년, 문교부는 같은해 4월 감리회에서 설립한 재단법인 감리학원(監理學園)에 국제대학을 넘겼다. 감리학원은 변두리에 위치한 국제대학을 중구 태평로 1가 64번지[1]에 이전하기 위해 교사를 신축하기로 하는 등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신생 법인이라는 한계로 인해 재단 운영이 원활하지 않았다. 감리학원은 교수 76명을 파면했다 다시 복직시키는 사건을 일으키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였다. 엎친데 겹친 격으로 재정까지 쪼들리게 되자, 1958년 4월, 금전지원을 약속받고 같은 감리회 소속의 학교법인 이화학당에 국제대학의 경영권을 양도한다. 이와 함께 중구 신축 교사로의 이전 계획 역시 배지화되었다.

2.3. 이화학당 (1958 ~ 1980)

파일:1978_kookjae_building.jpg
이화학당 시절 충정로2가 교사 (1960 ~ 1982) (사진: 1978년)[2]

1958년 4월 9일 국제대학 경영권을 인수한 이화학당은 인수하자마자 교직원을 대량 해고했다. 소규모 대학에 별도의 교직원을 채용하는 것은 수지타산에 맞지 않아 이화여자대학교 교직원을 국제대학에 겸직시키겠다는 것이었다. 이화학당이 인수, 운영하면서 그동안 파행으로 운영되던 국제대학은 정상화되어 갔다. 이화학당이 재단으로 있던 시기에는 때때로 채플이 진행되며 미션스쿨의 모습을 띠기도 했다.

1960년 서대문구 충정로2가에 교사를 신축하여 국제대학을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이화학당은 신축 교사를 효율적으로 사용하고자 국제대학의 주간 과정을 설치하려고 하나, 이미 서울에 대학이 많이 설립되었다는 이유로 문교부에서 반대하여 불허되었다. 그래서 대신 탄생한 것이 바로 금란여자중·고등학교. 충정로2가 교사에선 낮에는 중·고등학교 수업, 밤에는 대학 수업이 이뤄졌다. 1963년에는 한국외국어대학교에 이어 대한민국에서 두 번째 일어일문학과 신설되었다.

1979년 4월, 이화학당은 서대문구 북아현동에 13층 규모의 신축 교사를 새로 지어 국제대학을 이전하기로 했고, 기존 서대문 충정로2가 교사 및 교지를 팔고 그 자금을 국제대학 이전, 신축에 보태려 하였다. 그런데 학생들이 반발하며 들고 일어났다. 학생들은 이화학당이 국제대학을 방관하고 있다고 주장하였고, 충정로2가 캠퍼스는 이화학단 재단 소유가 아닌 국제대학 고유재산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애초에 국제대학은 건물이 없던 채로 이화학당에 인수되었고, 충정로 교사는 이화학당 측이 지어준 것이기에 해당 건물의 소유권을 이화학당 측이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학생들은 충정로2가 캠퍼스가 당연히 국제대학 고유재산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북아현동으로 신축 이전하고 나서 북아현동 신축 캠퍼스와 충정로2가 기존 캠퍼스 부지와 건물 모두 국제대학이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1980년 4월 7일, 학생들은 수업을 거부하고 철야농성을 벌이며 이화학당과의 이화학당 재단 퇴진을 요구했다.

1980년 4월 11일, 학교법인 이화학당은 임시이사회를 열고 학생들의 재단 퇴진 요구를 수용하여 23년간 운영한 국제대학의 운영을 포기하고 다른 재단으로 넘기기로 결정하였다. 이화학당이 의외로 쿨하게 국제대학을 포기하자, 국제대학 학생 측은 내심 당황스럽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2.4. 삼문학원 (1980 ~ 1984)

1980년 11월, 동화 면세점 계열의 학교법인 삼문학원(三文學園)[3]에서 국제대학을 인수했다. 삼문학원은 국제대학 인수 당시 20억원 규모의 야심찬 마스터플랜을 내세웠다. 1982년에 마포구 공덕동으로 이전하고, 1984년까지 강남구 세곡동에 신축 교사를 세워 학교를 이전시키겠다는 내용이 골자였다.

하지만 삼문학원은 시교위로부터 몇 차례 대학인수 부적격 재단으로 판정되었고, 인수 당시 교사, 교지를 확보하지 못한 상황이라 분규의 불씨가 되었다.

결국 인수 반년만인 1981년 5월 학생들은 또다시 들고 일어났다. 학생들은 삼문학원이 약속했던 20억원 규모의 마스터플랜을 지키지 않았고, 앞으로도 지킬 능력이 없다고 주장하며, 재단 퇴진을 요구하였다. 파행이 지속되며 정상적인 수업이 힘들어지자 1981년 11월 학교 측은 가정학습 기간으로 들어갔다.

1982년 약속대로 마포구 공덕동에 소재한 구 수도중학교, 마포여자중학교 부지와 건물[4]이 국제대학 제2캠퍼스가 되었고, 1, 2학년을 대상으로 수업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후 제대로 된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재단이 약속한 강남 세곡동 신축 교사도 지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공덕동 제2캠퍼스는 노후된 기존 중·고등학교 건물을 재활용하여 사용한 것이었다.

학생들은 재단 퇴진을 주장하였고, 분규가 심해지며 정상적인 수업을 진행할 수 없는 파행에 이르렀다. 1984년 1월에는 문교부가 학장을 문책 해임하였다.

파행이 지속되자 1984년 2월, 결국 삼문학원은 국제대학을 명지학원(明知學園)에 넘기기로 합의하였다. 넘기는 조건은 1. 학교명칭을 국제대학 그대로 사용할 것 2. 교원의 신분을 보장할 것 3. 부족한 교육 부지 확보 4. 국제대학의 독립 캠퍼스 유지 등이었다.

2.5. 명지학원 (1984 ~ 1988)

파일:1987_building.jpg
1987년 당시 남가좌동 교사[5]

1984년 2월, 명지학원이 국제대학을 공식 인수하였다.

명지학원은 종합대학으로 승격된 명지대학교 경기도 용인시로 완전히 이전하고, 명지대가 쓰던 남가좌동 캠퍼스를 국제대학이 사용하게 할 계획이라고 밝힌다. 이에 따라 국제대학은 서대문구 남가좌동 교사로 이전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명지학원이 공덕동 제2캠퍼스의 임대계약을 해지하고 폐교시켜버린다. 게다가 명지학원이 국제대학을 명지대에 흡수합병시키려고 한 것이 드러나게 되면서 학생들이 크게 반발하였다. 명지학원의 계획은 일단 명지대학교 주간과정을 전부 용인시로 보내버리고 남가좌동에 국제대학을 이전시킨 뒤 명지대학교 야간과정을 세우려는 것이었다. 당시 서울에 추가로 대학 정원 증설이 불가하였기에 국제대학을 인수하여 남가좌동 캠퍼스를 쓰게 한 뒤 나중에 명지대학교 야간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하여 운영하려고 했던 것이었다.[6]

이러한 사실이 드러나자 국제대 학생들은 또다시 들고 일어났다. 그런데 국제대가 명지대 캠퍼스 안으로 이전함에 따라 국제대 학생들의 분규는 고등학교 만한 좁은 캠퍼스를 공유하고 있던 명지대 학생과의 마찰로 이어지게 되었다. 합병 문제를 둘러싸고 명지대와 국제대 학생간의 충돌이 빈번하게 일어나 국제대는 물론이고 명지대도 정상적인 학사 운영이 힘들어질 정도였다. 학생들의 반향으로 국제대는 물론 명지대까지 정상적인 운영이 어려워지게 되자 명지학원은 인수한지 1년만인 1985년 6월 국제대학을 포기한다고 공식발표했다.

이후 명지학원은 인수 의사를 내비친 의사를 내비친 학교법인 세방학원과 성한학원 중에서 학생들이 원하는 재단에 학교를 넘기겠다며 투표를 실시했다. 69.5%의 찬성으로 세방학원[7]에 이양되는 듯 했지만, 투표과정에 문제가 있었다는 어른의 사정으로 1986년 10월 국제대학은 성한학원(聖韓學園)에서 인수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그러자 학생들은 성한학원의 인수를 반대하며 또다시 들고 일어났다. 장기간의 농성 끝에 1987년 11월, 기본재산 확보 및 3억원 이상 자본 투입, 법인의 학교행정 불참여, 대일외국어고등학교 이전[8] 53개 조항을 조건으로 걸고 성한학원의 국제대학 인수를 받아들였다.

2.6. 성한학원 (1988 ~ )

국제대를 인수하게 된 성한학원의 설립자이자 이사장직을 맡은 김성민은 70년대에 유흥업으로 큰 돈을 번 후 이를 기반으로 사학 재벌로 성장한 케이스였다. 그는 경일고를 인수하여 대일고로 바꾼 것을 시작으로 은주여중, 정릉여상을 차례로 인수하고, 대일외고를 개교하였다. 고등학교로는 큰 돈을 벌기 어려웠기에 규모 있는 여러 사학재단들은 대학 설립 혹은 인수를 간절히 바라는 경우가 많았는데, 성한학원의 김성민 이사장 역시 대학을 간절히 바랬다. 그러던 와중에 국제대가 또다시 매물로 나오자 인수전에 참전했던 것이다. 하지만 성한학원이 명지대로부터 국제대를 인수하는 과정에는 입시비리를 포함한 수많은 비리와 의혹이 무성했다. 김성민 이사장은 70년대부터 공납금 유용, 탈세 등 각종 비리로 감옥 생활을 하기도 했고, 반대파 교사들을 강제 인사 조치 하려다가 이에 항의하여 교감이 자살을 기도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하였으며, 재단 학교에 다니던 아들의 내신을 조작하다가 발각되기도 하는 숱한 문제를 뿌려왔다.

1986년 6월, 성한학원이 국제대학을 인수하는 합의가 나왔지만, 국제대 학생들이 또다시 들고 일어나 농성을 펼치는 바람에 1988년 3월에야 공식적으로 성한학원이 국제대학을 인수할 수 있었다. 동년 8월 성북구 정릉동 교사로 이전하였다. 원래 성한학원의 대일고등학교가 쓰던 부지였고, 건물도 대일고등학교가 쓰던 30년 가까이 된 낡은 것을 개조해서 쓰게 되었다.[9]

하지만 성한학원에 인수되자마자 국제대 학생들은 또다시 들고 일어났다. 이에 학교는 또다시 정상적인 수업이 열리지 못하는 파행으로 치닫게 되었다. 학생들은 명지학원에서 성한학원으로 인수되는 과정이 의아하다고 주장하며 의혹을 제기하였고, 성한학원이 4개 조항에 대한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반발했다. 이러한 의혹과 불만을 제기하면서 국제대 학생들은 학교가 이전하여 첫 개강한 1988년 9월부터 들고 일어났다. 특히 9월말 총학 선거가 실시되어 총학 지도부가 결정되자 곧바로9월 25일부터 교내 주요시설 점거 농성에 들어갔고 수업을 거부했다. 학생들은 성한학원 재단퇴진을 주장했다. 1988년 11월에는 학생들이 출근 중인 김성민 성한학원 재단 이사장을 납치, 감금한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김성민 이사장은 학생들의 감시 소홀을 틈타 탈출에 성공하였고, 이후 재단 측은 학생들의 무지막지한 태도에 분노를 표출했다.

심지어 학생들은 89학년도 신입생 원서접수를 방해했고, 이로 인해 국제대는 89학년도 신입생을 뽑지 못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1988년 11월 21일 재단은 급히 입시요강을 변경해 후기모집으로 바꾸어 신입생을 모집하기로 하였지만 이 역시 학생들의 방해로 인해 신입생 모집이 불발될 것은 뻔했다.

결국 학생과 재단이 서로를 도저히 용인할 수 없는 수준으로 갈등이 벌어졌다. 당시 언론 기사를 보면 학생측도 재단 측도 서로에 대한 맹렬한 적개심을 표출한 채, 문교부가 개입해주기만을 내심 바랄 뿐 스스로는 더이상 타협의 여지가 없는 상황에 봉착했다.

1989년, 마침내 학교법인 성한학원[10]에서 국제대학 인수 당시에 내걸었던 약속을 이행하여 학교법인 국제대학원을 분리 · 신설하여 국제대학을 전담해 운영할 수 있도록 하였다. 약속 이행과 함께 분규도 점차 사그라들게 되었다.

그래서 당시의 국제대학 학번은 이화학당 명지학원에게 휘둘린 역사 때문에 개신교 미션스쿨에게 반감을 가졌었고[11] 시간이 지났지만 지금도 이화여대와 명지대에게 적대적인 성향이 있다. 개신교도라도 이화여대와 명지대에게 반감을 가질 정도였다.

3. 서경대학교(1992~현재)

1992년 3월, 국제대학이 4년제 종합대학교로 승격되면서 법인명칭을 서경대학원으로 바꾸고, 동년 9월에는 교명을 서경대학교로 변경하였다.

2007년 3월, 한국철도대학을 인수하기 위해 제안서를 제출하고 인수전에 뛰어들었지만 결국 인수에 실패한다.

[1] 지금의 광화문빌딩. 당시 계획은 1층부터 3층까지 감리회관으로 사용하고 4층부터 5층까지는 국제대학이 사용하는 것이었다. [2] 현재 이 자리에는 KEB하나은행 서대문역지점이 있다. 사거리에 위치해 있어 당시 신문기사에서 가장 소음공해에 시달리는 학교로 선정되기도 했다. [3] 현재 미림여자정보과학고등학교를 운영 중인 학교법인 미림학원이다. [4] 그 과정에서 수도중학교와 마포여자중학교가 국제대학 시설로 유용하기 위해서 폐교당했다. 그리고 그 국제대학 마저도 얼마 후 명지학원으로 넘어가고 국제대학이 남가좌동 명지대 캠퍼스로 이전하면서 용도를 잃어버린 구 수도중학교, 마포여자중학교 부지는 매각되어 공덕, 마포 현대아파트 부지가 되어버린다. [5] 이 건물은 리모델링을 거쳐 현재 명지대학교/인문캠퍼스의 학생회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6] 이런 일이 발생하는 이유가 1970년대 중반부터 수도권정비계획법 때문에 서울에서 신규대학 인가 및 정원증원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학을 신설하거나 대학정원을 늘리고자 하는 재단으로써는 기존 대학을 인수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였는데 돈 많이 드는 대학 하드웨어 인수는 꺼리고 대학 인가와 대학정원만을 빼와서 기존 재단의 시설을 이용, 정원증원의 편법으로 쓰기 위해서다. 특히 국제대학은 야간대학이며 정원이 적당히 적어서 일반 종합대학이라면 밤에는 남는 기존 강의실을 이용하기에 수월했다. [7] 서일대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재단이다. [8] 실제로는 대일외국어고등학교 대신 대일고등학교를 이전시킨다. [9] 이후 새로 지은 건물도 있지만 아직도 많은 부분이 구 대일고, 대일외국어고, 구 정릉여상이 쓰던 건물을 개조한 것이다. 그 이유에는 학교 대지가 산꼭대기에 있고 주변이 주택가여서 확장 신축할 여지가 아예 없기 때문이다. [10] 이후 학교법인 대일학원으로 법인명 변경. 대일고등학교, 대일외국어고등학교, 대일관광고등학교를 운영한다. [11] 물론 모든 개신교 미션스쿨을 묶어서 판단하는 것은 좋지 못한 행동이지만 당시에는 미션스쿨에 대한 정보도 거의 없었고 선입견을 가지기 쉬웠던 시대였다. 개신교에서도 진영논리 때문에 해당 사건에 대해 명지대와 이화여대에게 온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존재했기에 이 선입견이 굳어지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