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유비로 천하쟁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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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 | 대체역사, 빙의 |
작가 | 간절히 |
출판사 | KW북스 |
연재처 | 문피아 ▶ |
연재 기간 | 2024. 12. 09. ~ 연재중. |
1. 개요
한국의 삼국지 대체역사물 웹소설. 작가 간절히가 2024년 12월부터 연재하는 작품이다.2. 특징
중국 중세사 석사 학위까지 받고 대학원을 졸업한 20년 진성 촉빠 곽선호가 웹상에서 촉빠들이 위빠와 오빠들의 공세에 밀리기 시작한 상황을 한탄하다가 싱크홀에 빠져서 입촉 직전의 유비에 빙의하는 소설.곽선호가 빙의한 시점은 유비가 익주 가맹현에서 한중의 장로를 친다면서 출병은 안하고 와병하는 척 군대와 물자를 모으던 건안 17년(212년)쯤 시점이다. 빙의한 곽선호는 일견 보기엔 제갈량의 융중대가 주장한 입촉이 합리적 전략 같지만 실제론 단점이 명확하다는 점을 파악하고[1][2] 입촉 대신에 유장과의 약속대로 장로의 한중을 공격하면서 소설이 시작된다.
3. 등장인물
3.1. 한중
본래 장로의 영지였으나 유비(곽선호)가 공격해 차지했다. 이후 유비의 서량 진출을 위한 발판이 되어주고 있다. 관우, 장비, 제갈량 등 유비군의 주축이라 할 만한 다른 인재들은 형주측에 남아있는 데다 익주, 상용 등은 아직 차지하지 못해 유비군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형북과는 분리되어 있다.-
유비(곽선호)
주인공. 진성 촉빠로 싱크홀에 빠져서 입촉한 후 유장의 뒤통수를 칠 준비를 하던 유비에게 빙의했다. 빙의해 상황을 파악한 이후 입촉은 장기적으론 악수라고 판단하고, 한중군을 공격해 한중을 차지. 이후 적극적으로 북중국의 정세에 개입하기 시작한다.
당시 조조의 필살기나 다름없는 헌제의 칙서에 면역력이 있는 유일한 인물로, 의대조 사건 당시의 유일한 생존자기 때문. 사실 현 호족들은 조조가 내린 천자의 표문을 보면 흔들리거나, 명분삼아 배신하는 등 답없는 태도를 보이는데 유비는 그것이 조조의 위조 칙서라고 당당히 주장할 만한 당위성이 있는 사람이다.
한중을 공략한 이후 마초의 거병과 반대파의 전쟁통에 6천 병력을 동원해 서량에 진입. 자신이 은혜를 베푼 마초와 상하관계의 동맹을 맺어 서량을 자신의 세력권에 편입하고 있다.
자신의 미래 지식을 원 역사 유비의 '사람보는 눈'으로 둘러대고 있다. 군사적 역량은 현장 야전 지휘관으로서는 조조나 주유 등의 인물들에 미치지 못하나 무용을 알아보는 눈과 원 역사처럼 인재를 보는 안목은 최상급으로 언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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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통
유비군의 책사. 정략과 군략 양측에 뛰어나 빙의 직후라 정신없는 유비 대신에 군사 작전 시에 총지휘를 담당한다. 본래 유비의 명령대로 입촉을 위해 준비하고 있었으나, 유비가 전략을 바꿔 한중 정벌을 주장하자 그쪽이 마음에 든다면서 바로 찬동한다.[3][4]
자기 눈으로 전장을 봐야 하는 현장파 책사라서 아직 전투 중인데도 말을 몰고 적진 가까이 가는 등 위험한 면모를 보여서 유비가 늘상 호위를 붙여놓는다. 원 역사에서 어이없이 유시에 맞아 죽은 이유도 마음이 급한 데다가 이런 성향의 탓도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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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충
유비군 장수. 노장임에도 병력을 이끌고 앞장서서 한중군 정벌에 공을 세운다. 이후에도 서량의 기성에 일꾼으로 위장하고 잠입해 마초의 가족들을 구해내며 활약한다. 천성이 선량한지 악행을 저지른 호족들과 조조군을 상대할 때 유독 의욕적인 모습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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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연
유비군 장수. 뛰어난 무예와 전술안을 가진 맹장으로 어지간한 무인이나 병사 몇 명 정도는 가볍게 참수할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가졌다. 한중군 정벌에 활약하고 이후 기성에 황충과 함께 가서 반란을 일으킨 호족들을 베어버리고 기성을 지켜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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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습
유비군 장수. 황충과 위연을 따라서 한중 정벌에 활약했으며, 이후 기성에서 마초의 가족들을 호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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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완
유비 휘하의 문관. 본래는 유비의 익주 정복 이후 두각을 드러낼 인물이나 이번에는 유비의 한중 정복에 따라와 행정 작업을 하고 있었다. 유비는 장완을 빨리 승진시켜 중하게 쓰고 싶지만 주변이 반발할 것을 우려해 위험천만한 기성 주둔을 자원하게 유도한다. 유비의 평가에 따르면 현령처럼 '심심한 일거리'보다는 실수하거나 늦으면 죽는 전쟁 보급처럼 스릴 있는 일이 적성에 맞는 인재라고 한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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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
한중을 장악한 오두미도 교주. 본래 유언의 지원을 받아 한중을 장악했음에도 현시점에선 유장과 대립하며 자치를 하고 있다. 당시 명사들은 익주의 군사력이 만만하지 않은데도 장로가 밀리지 않는 걸 보고 장로가 상당한 강병을 보유했다고 착각했으나 사실 유장이 동주병을 동원하지 못해서 2급 전력만 쓰다 보니까 밀린 것이다. 장로는 군벌보다는 교주로서의 성격이 강해서 종교서적을 편찬하거나 백성들에게 재정을 풀어 복지를 제공하는 등의 종교활동에 바빠서 그닥 눈여겨볼 정예군이 거의 없었다.[6] 이 사실을 미래지식으로 아는 유비의 급습으로 인해 패해서 한중을 빼앗기고 상용으로 도피한다. 이후 당시 한중군민 대부분이 오두미도 교도인 것을 의식한 유비가 민심을 얻기 위해 장로를 달래서 한중군에 돌아오게 하려고 계획을 세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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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위
장로의 동생. 오두미도 대좨주. 고령인 형 장로를 대신해 한중의 군사를 지휘하고 있다. 유비군이 쳐들어오자 2만 병력으로 양평관을 틀어막았으나, 사관계층이 부족하고 정병이 부족했던 탓에 유비군의 기습을 막지 못하고 퇴각한다.[7] 이후 정군산에서 군세를 정비하려 했으나 추격해온 황충에 의해 패배하고 도망치다가 포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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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앙
장로 휘하의 장수. 제대로 된 정병이 없는 한중에서 유일하게 제대로 된 병력을 이끌고, 병법을 아는 장수라고 한다.(유비 왈 오두미도 팔라딘) 그러나 유비의 급습 당시 유비가 익주를 노릴 거라 생각한 장로에 의해 수천 병력과 같이 마초를 도우러 북상한 상태였다.[8] 때문에 장로가 패배할시에 아무런 활약을 하지 못했다가 유비가 서량에 진입한 이후 재회하며 유비는 한중군민들의 편지를 주면서 양앙을 포섭한다.
3.2. 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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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초
서량의 반 조조 군벌. 211년 관중제장의 난 당시 서량연합군 5~10만을 이끌었으나,[9] 한수를 비롯한 다른 군벌들이 마초를 견제한다고 말을 안 듣는 바람에 전력을 제대로 내지 못하고 조조의 공세로 인해 위수 전투에서 끝내 조조에게 패배했다. 그 이후 2년만에 재차 거병해 1만 병력을 몰아 위강과 하후연을 격파하는 기염을 토하고 천수군을 점령한다. 그러나 양부와 서량 호족들이 대적하며 들고 일어나자 출병해 끝없는 싸움 끝에 몰려서 후퇴하게 된다. 본래는 이 시점에서 기성의 조구에 의해 가족들을 잃고 서량에서 쫓겨났으나, 유비가 원군으로 오면서 가족들을 구하고 역으로 호족 연합을 격파하고 서량을 평정할 기회를 얻게 된다. 이 과정에서 유비에게 아내와 자식들의 목숨을 구원받는 엄청난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겉으로는 대등한 동맹 같지만 노성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하나의 세력으로서 구실을 제대로 못하는지라 실제로는 유비에게 서서히 종속되어 가는 중이다. 여담으로 유비는 마초를 버락 오바마에 비유했다. 물론 실패 버전.[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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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대
마초의 종제이자 부하 장수. 한중을 점령한 유비에게 사신으로 와서 군량 지원을 요청해 승낙을 받았다. 이후 호족들의 배신으로 가족들이 다 죽었다고 절망하던 차에 유비군이 지원을 와서 가족들을 구해줬다는 이야기를 듣자 진심으로 감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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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덕
마초 휘하의 장수. 마초 못잖은 맹장으로 유비가 욕심내고 있는 인재이다. 일단 유비가 마초를 서서히 종속시키고 있는 만큼 방덕도 자연스럽게 유비에게 편입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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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구
반마초 파벌 호족. 마초가 천수군을 점령한 이후 끌어들여 부관으로 삼아 기성을 맡겼으나, 사실 친조조 파벌이었기에 양부의 반란으로 마초가 출병하자 거병해 마초의 일가를 전부 죽여버리려 했다. 그러나 황충과 위연이 매복한 유비군과 같이 반격하면서 몰린 끝에 패배해 황충의 활에 맞아서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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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부
반마초 파벌의 맹주 호족. 조조가 직접 찍어서 자기 파벌로 만든 호족으로 직전 량주자사 위강의 패배 시 마초가 살려줬음에도 사촌 강서와 조조파 호족들을 모아 마초를 배신했다. 기성의 마초를 노성까지 끌어내어 야전을 벌이고 사촌형제 7명이 전사하고 자신도 중상을 입은 끝에 다른 호족들의 가세로 끝내 마초를 몰아냈으나 정작 자기 가족이 있는 역성은 유비가 점령해 가족들을 포로로 잡아버렸고, 기성에도 황충과 위연이 잠입해 마초의 가족들을 구해냄은 물론 조구 파벌을 참살해버리며 일이 제대로 꼬인다.
이를 전혀 모르고 7천에 달하는 호족연합군을 데리고 천수군의 치소인 기성을 공격했으나 황충과 위연이 버티는 사이 달려온 마초와 유비가 후방을 휩쓴 탓에 패배하고 포로가 된다. 그 시점에도 조조를 향한 충성을 유지했으나, 유비가 조조가 위공이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주며 "승상이야말로 한실을 위한 충신"이라는 양부의 논리를 박살내버리자 "위공께서는 할 만큼 했다"고 말을 바꾸는 추태를 보여준다. 결국 양부가 답이 없다고 여긴 마초와 유비는 양부를 처형한다.[11][12]
또한 원 역사에서 마초를 반역도라 비난하다 죽었던 양부의 고모는 여기서도 마초를 반역자라 비난했으나 유비가 의대조 사건과 조조의 협천자의 위선을 꼬집자 말문이 막혀서 비웃음을 사며 연금당했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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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
서량 제2의 군벌. 마등, 마초 시절부터 서량군벌 연합의 실세로 군림한 노회한 인물이다. 211년 관중제장의 난 당시 마초를 맹주로 추대했으나 그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멋대로 굴며 마초의 패배에 일조했다. 그 탓에 213년에 다시 거병한 마초도 병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마대가 유비를 불러오기 그렇다면 한수라도 부르자고 충고했음에도 한수를 부르지 않았다. 그러나 유비-마초 동맹이 위수 아랫쪽을 장악했을 무렵에 하후연과 장합의 맹공을 받게 되고[14] 한수의 능력으로는 하후연과 장합을 막는게 불가능 하다는 걸 알고 있던 유비-마초 동맹이 구원을 위해 출전한다.
3.3. 익주
후한 13주에서 서남쪽에 위치한 주. 풍족하고 크지만 지형적으로 고립되어 있다. 낙양에서 내려온 유언의 뒤를 이어 유장이 통치하고 있다. 유장이 외부 진출을 하지 않은 데다가 폐쇄적인 곳이다보니 외부에선 이 곳의 정보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유장
당시의 익주목.[15] 선대 유언이 조직한 동주병을 이용해 익주를 통치하고 있다.[16] 그러나 당시에도 알려졌듯이 무능해 동주병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던 인물로 유비를 불러들여 장로의 상대를 맡긴 것도 이 탓이었다. 유비가 배신하는 척 백수관만 점령하고 한중으로 출병하자 안심하고는 유비를 방치해버린다.
야심이 없는 건 아니라서 더 골치아픈 인물인데, 유비가 한중을 점령하자 당연히 형주로 돌아가면 된다면서 한중을 얻으려 했다. 유비는 마초와 조조의 전쟁이 끝나지 않은 걸 명분으로 한중을 점거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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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권
익주 토박이 출신의 군인. 익주의 기재라고 할만한 재능을 가진 인물로 유비의 배신을 예상해 눈여겨보고 유장에게 조언하나 유장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거기다 유비를 견제하는 방법의 일환으로 백제성에 동주병을 파병하고자 하나 장송의 여론전에 밀려 동주병에게 경계 대상이 되는 등 마음 고생을 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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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송
익주 토박이 호족. 유비와 내통하던 인물로 본래 유비의 형주 복귀 뻥카에 낚여서 서신을 썼다가 걸리는 바람에 죽었으나, 여기선 유비가 이중 낚시를 한 덕에 살았다.[17] 이후 유비를 도와서 황권이 형주와 한중에 있는 유비의 연결을 끊기 위해 동주병들의 백제성 주둔을 추진하자 이를 거부하게 만드는 등 소소하게 활약한다.
3.4. 동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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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권
212년 유수구 전투가 시작되어 7만 병력을 이끌고 조조와 대치 중이었다. 안 그래도 열세한 전력 탓에 피말리는 중인데 유비가 전력을 다해 돕기는커녕 입촉을 노리자 분노한다.[18] 그러나 본 소설에서는 곧이어 현대인이 빙의 된 유비가 당초 표면상 목적대로 유장의 구원과 장로의 정벌을 성공적으로 완수하는 쪽으로 입장을 선회해버렸기 때문에 그 정도로 손유동맹의 사이가 파탄나지는 않은 것으로 묘사되었고 실제로 조조의 위공 즉위와 순욱의 자살을 손권측에서 유비에게 알리는 식으로 동맹이 아직은 건제함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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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
손유동맹을 추진한 동오의 대도독. 유비가 계속 손권의 심기를 거슬러 면목이 없는 상황이었으나[19], 유수구 전투가 시작되고 유비가 한중에 진출해 서량까지 연결되면서 장안을 위협하는 상황이 되자 안도하며 이를 속히 조조군에 퍼뜨려 그들을 동요시키자는 계책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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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대
익주로 파견된 유비를 만나러 온 동오의 사절. 유비에게 조조를 견제해 줄 것을 부탁하러 왔으나 빙의의 여파로 아직 몸을 제대로 못가누는 유비를 보고 정말 아픈 것임을 깨달아 당황한다.
3.5. 조위
작중 시작 시점에는 위공 즉위 이전이므로 조조군이었으나 213년 위공으로 즉위했다. 하북 4주(유,기,병,청) 서주, 예주, 낙양, 장안을 차지한 작중 최대세력. 량주의 마초, 양주의 손권, 형주의 유비, 익주의 유장 등만이 저항하고 있다.-
조조
현 북중국을 통일한 중원 최대의 세력가. 유비와는 긴 인연으로 유비와 몇 번이나 싸우면서도 좌장군으로 제수해 유비가 기반을 닦을 계기를 세워준 것도 조조다. 유비가 유장을 배신할 것이라 생각해 신경쓰지 않고서 손권을 제압하려 유수구 전투를 벌였으나, 도중에 유비가 뜬금없이 한중을 제압하고 서량과 연결되자 경악한다. 이후 원 역사대로 유수구 전투에서 손권 상대로 별 다른 실익은 못 거둔 채 213년 기주 인근의 10여개 군을 하사받고 위공국을 세워 위공이 된다.[20]
유비(곽선호)의 평가로는 능력은 삼국 군주 중 제일이나, 현재 통일보다 찬탈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어서 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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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욱
상서령. 조조군의 책사로 수십년간 조조를 도와온 거물. 그러나 조조의 위공 즉위 이후 실의에 빠져 자결했다.[21] 이후 순욱이 자결했다는 소식을 전한 손권의 편지를 보면서 유비가 분노하는 척하며 조조는 역적이라고 선동하는데, 실 역사에서도 유비가 순욱의 죽음을 손권에게 전해듣고는 '늙은 역적놈이 죽지 않으니 천하가 아직도 혼란하다'는 식으로 욕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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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황
유비가 당초 조조의 예상과 달리 한중과 양주 쪽으로 진출한다는 소식이 들리자마자 바로 주둔하던 장안에서 나와 서량과 장안 사이의 요충지인 진창으로 급히 진출해 이곳에 성을 쌓고 있다는 서술이 있다. 진창에서 길이 험하긴 하지만 한중을 칠 수도 있기 때문에 유비도 서황을 경계해서 한중에 있는 주력을 못 빼고 육천 정도만을 동원해 서량에 나온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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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후연
조조의 친위세력으로 조조의 동서이자 하후돈의 친척동생.[22] 조조가 강동정벌에 나선 사이 호군장군으로 서황, 장합의 보좌를 받으며 장안에 주둔해 있다. 관중제장의 난 이후 재기한 마초에게 격파당했다는 식으로 초반에 잠깐 언급된다.
유비와 마초가 서량 호족연합을 격파하고 숨을 고를 즈음에 기습적으로 출병. 한수의 군세를 격파하기 위해 현친현으로 출격한다. 원역사대로 한수의 조잡한 강족연합군 따위는 야전 한번에 대파할 수 있다고 비웃으나, 한수가 흥국성에 들어가 버티자 인근 부락을 파괴하며 야전을 유도하고자 하지만 유비가 이 작전을 간파하며 조조군의 기병대만 피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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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합
조조군 장수. 하후연의 부장을 하고 있으며, 조조의 친위세력인 하후연에게 아부한다. 하후연의 명령으로 인근 강족을 오천명 정도 죽이려고 했으나, 조조군의 이 수법을 알던 유비가 보낸 유격대에 의해 조조군의 기병대만 큰 피해를 입는다.
4. 개변된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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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의 한중 진출
당시 외부에선 거의 알지 못하는 한중-익주의 세력 구도를 정확히 파악한 유비의 결단으로 유비군이 한중으로 출진해 장로를 격파, 그대로 서량의 마초와 연결되면서 형익병진의 실현 가능성이 대폭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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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마초 동맹
본래 양부의 배신에 패배해 몰락한 마초였으나, 여기서는 유비의 원군으로 인해 역으로 호족연합군을 대파하고 천수군을 안정적으로 점령한다. 이후 유비는 치소 기성을 넘기고 상규성으로 거점을 옮기기는 했으나, 마초는 병력이 3천밖에 남지 않은 데다가 징병할 명분과 군량, 행정적 업무까지 전부 유비군에게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라 사실상 서량의 주도권은 유비군에게 넘어온 상황이다. 유비는 형주와 한중이 연결되지 않아 당장 동원가능한 인력이 부족한 만큼 마초에게 서량의 지분을 보장하고 대 조조 동맹에 끌어들일 계획이다. -
장리천 전투
원역사의 214년 한수를 대파하면서 서량을 안정화시킨 하후연이 서량이 유비군에게 넘어가는 걸 막기 위해 1년 빨리 출병. 기병 위주의 8천 병력으로 기습적으로 출병한다. 하후연과 장합, 주령 등의 위군에 마초에 비해 실력이 부족한 한수는 긴급히 마초에게 지원을 요청한다. 당시 한수 이남을 장악중이던 유비-마초 동맹은 후일 서량 북쪽으로 진출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한수를 돕기로 한다.
유비군은 유비를 포함해 황충, 위연. 책사 방통. 마초도 부장 방덕과 대부분의 병력을 모아 출진했다. 방통의 책략으로 수천의 가축을 풀어놓아서 인근 강족민들을 대피시킨 유비군은 한수의 구원은 마초에게 맡기고, 하후연군의 요격에 나섰다. 당시 조조군은 적군을 상대할 때 주변 마을을 습격해 현지 군사들이 뛰쳐나오게 유도하는 병법을 자주 썼는데 유비는 이를 알고 있었다. 조조군의 기병은 마을에 불을 지르다 황충과 위연의 요격을 맞아 장합의 지도 하에 급히 퇴각한다.
한방 먹은 하후연은 한수보다 유비군을 먼저 공격하려고 하나 장합의 계책을 맞아 천천히 유비군을 한수의 지류인 장리천을 끼고 남쪽으로 유도한다. 한참 후에 방통이 이 계획의 의도를 눈치채는데, 다름아니라 유비군은 강을 낀 쪽을 두고 전력을 분할했는데, 상류는 물길이 좁고 세서 사람은 못 건너나 말은 건널 수 있는 부분이 있었다. 유비군이 이 부근에 도착했을 때. 하후연은 빠르게 속도를 내서 유비군을 사면에서 포위해버린다.
5. 평가
전작 '강감찬 천지를 껴안다'의 실패로 절치부심하던 간절히가 비장의 수로 '유비 빙의'를 선택했다는 평가가 많다. 간절히 작가의 경우엔 그 동안의 삼국지물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인물들을 선택한 적은 많았어도 이렇게 삼국 군주 중 하나인 유비 같은 거물을 주인공으로 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덕분인지 연재 15화만에 선작 1100명을 넘는등 초반부터 화제는 제법 끌어 유지하는 중이다.
[1]
의인으로 소문난 유비의 평판이 크게 깎였고, 3년간 촉 정벌에 집중하느라 위-오 전쟁, 위-서량 전쟁 등 천하의 대세를 기울일 만한 시점에 파촉에서 관여할 수 없었다. 인재 시점에서도 손해인 게 방통은 이 전쟁에서 활에 맞아 죽었고, 한중공방전의 주역으로 활약한 사방장군인 황충도 220년에 죽기에 210년대 초반에 3년이나 되는 시간을 서촉에서 낭비할 수 없다.
[2]
사실 일단 큰 틀에서는 제갈량의 전략도 어느 정도 따른것이긴 하다. 제갈량은 익주와 형주를 아우르고 서쪽의 융족(혹은 양주 군벌 마초)와 접촉하면서 관중으로 유비가 진격하면 된다고 했는데 그 대전략 자체는 충실히 따르고 있기 때문. 사실 그렇기 때문에 원 역사에서도 방통이 바로 유장 참수작전으로 입촉에 드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자고 제안했는데, 문제는 유비가 그걸 거부하고 벌인 익주 정벌전쟁에 시간을 너무 끌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당시 익주에서 유비군을 관찰한
여대가 유비군이 대패해 백제성으로 도망갔다는 증언을 하는 등 유비 본인이 익주의 군사적 역량을 잘못 재는 실수를 한 것이다. 주인공이 이 점을 대놓고 지적하면서 원역사 유비의 선택을 까는 쪽으로 정책방향을 정한것이나 유비의 군사적 능력이 대놓고 별로라는 서술한 것으로 보면 간절히 작가 역시 유비가 굳이 방통의 중책을 선택한 것은 결과적으로 실책이라고 보는 것으로 보인다.
[3]
본래 역사에서도 방통은 유비의 의견에 다른 의견을 내기보다는 군말없이 충성하는 측이었으나, 익주 정벌을 두고서는 유장의 장수들을 꺾고 부성에서 술에 취해 기뻐하는 유비를 보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 좋아하시는 모습만을 보이는거 아닙니까?' 라고 불평을 하는 모습이 보이는 등 별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유비가 방통에게 화를 냈다가 다시 불러들이면서 봉합되긴 했다.
[4]
방통이 입촉을 찬성했단 기록도 있지만 본래 방통의 상책은 정병만을 모아서 성도를 기습해 제압하는 것인데 유비는 이를 거부하고 백수관 등의 성도 주변부터 차례대로 제압하는 중책을 썼다. 방통 입장에선 속전속결하자는 상책도 이미지 관리, 도박수라는 이유로 거절하고는 시간 걸리는 중책을 채택하더니, 아직 끝난 것도 아닌 마당에 긴장이 풀린 모습을 보인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즉 입촉 찬성이든 반대든 간에 자기의 상책이 채택되지 않으니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던 것.
[5]
실제 역사상으로도 한번 물길을 타고 내려가면 다시 군대를 되돌리기 쉽지 않아 위험하다는 이유로 기각된 상용점령작전을 기획한 사람인 만큼 어느 정도 이런 기책이나 도박을 즐기는 성격으로 작가가 설정한 것으로 보인다.
[6]
그래도 실 역사에서는 동주계의 유력인물인
방희 상대로 파군쪽을 두고 자웅을 겨룰 만큼 유장에게는 만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7]
원 역사에서는 아예 남진하는 조조군의 진입로에 토성을 쌓아버리는 대공사로 조조의 기를 죽였으나, 본작에서처럼 한중군민들이 경계를 유지하지 못한 탓에 패했다.
[8]
실제 역사에서도 213년, 마초가 기성을 공격할 때 장로는 양앙을 대장으로 삼아 마초를 돕게 했고 마초가 기성을 점령하자 그의 명령대로 위강 등 위나라의 관리들을 죽인다.
[9]
배송지의 기록으론 10만. 작중에선 5만 내외로 서술한다. 아무래도 작가는 전근대 병력 서술이 늘 그렇듯이 이 당시 10만을
호왈십만으로 본듯 하다.
[10]
뛰어난 학력과 가문, 소수민족의 핏줄까지 가졌다. 마초는 복파장군 마원의 후손이며 강족의 피가 섞여 이민족들과도 연줄이 있었고, 무엇보다 군재도 뛰어났다. 만일 동관대전에서 이겼다면 적벽에서 이긴 손권처럼 군주가 되었을 거라고 한다.
[11]
사실 양부 입장에서는 기성 전투에서 일족이 몰살당하다시피 했는데 이제와서 일족을 다 죽인 마초와 화해하라는 것도 말이 안되는 소리긴 하다. 애초부터 양부는 조예 시절까지 조위에 충성하면서 조예에게 온갖 충언을 아까지 않았던 골수 친조조파-조위 충신이기도 하니 일찍부터 한실에 대한 기대는 버렸다고도 볼 수 있다.
[12]
원 역사의 양부는 조예 시기 구경에 오를 정도로 출세하나, 끝내 조예가 자신의 충언을 무시하자 홧병으로 죽는다. 즉, 여기서는 조예가 즉위하기도 전에 죽었으니 원역사보다 빨리 죽은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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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렇게 되냐면 양부 고모의 논리대로 조조가 충신이라면 헌제가 외척인 동승에게 몰래 조조를 죽이라고 명령하는 의대조 사건이 일어날 수가 없기 때문. 원역사에서는 마초가 이를 알지 못해 그냥 말없이 죽여버리지만 여기서는 의대조 사건의 당사자인 유비가 있다보니 완벽하게 카운터를 쳐서 양부의 고모를 데꿀멍 상태로 만들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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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역사보다 1년 빨리 침공이 벌어졌다.
[15]
유장의 선대인 유언이 자사를 목으로 바꿀것을 영제에게 건의하고 익주목으로 임명받았던 것을 계승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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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주병은 유언이 익주에 몰려든 난민들을 이용해 만든 정병으로 타 군벌들의 정병에 지지않는 강병이었다고 한다. 수도 최소 3만~5만에 달해 누구라도 얕보기 어려운 전력이었다. 원역사에선 이 동주병들이 유비를 막아서느라 유비 옆에 방통, 법정 같은 우수한 참모가 있었고 유장의 세력을 알음알음 사전에 강탈했음에도 연 단위로 고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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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가 장송에게 단순히 안부 편지를 보내는 방식이었지만 어쨌든 경계 대상 1호인 유비와 서신을 주고받은 것이니 황권은 이 기회에 장송을 조지고자 했다. 그러나 장송이 진짜 내통을 했다면 이렇게 대놓고 편지를 주고 받겠냐고 반박하자 황권도 아무말을 못했고 일단 죽음은 피한 채 옥에 수감된다. 물론 이후 유비가 양회와 고패를 풀어주면서 유장에게 해명하는 서신을 보낸 덕에 곧장 석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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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역사를 보면, 손권이 먼저 유장을 치자고 유비에게 제안했었는데 유비가 '지금 조조와 맞싸우는데 같은 반조조연합인 유장을 치면 안되고 또 유장은 자신과 동족이니 신의를 저버릴수 없다'면서 군사를 동원해 길을 막고 '나는 유장을 치느니 머리 풀고 입산하겠다' 드립을 쳤었다. 그런 인간이 이제는 대놓고 유장의 통수를 치고 자기가 입촉을 하면서 손권의 통수도 같이 쳤으니 손권 입장에선 분노하지 않을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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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역사에서도 손권이 나중에 주유, 노숙, 여몽, 육손 등의 도독들을 평가한 바가 있었는데 노숙이 여러 부분에서 잘한게 많으나 유비에게 형주를 빌려줘서 통수를 맞은 건 실책이라고 평가하여 주노여육 네 도독 중 가장 평가가 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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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공작이지 기주 10개 군은 군사경제적으로 핵심지역이기도 하고 일반적인 왕공작의 봉작 영역을 한참 넘어서서 사실상 한실을 찬탈하겠다는 예고나 다름 없었다. 비유를 하자면 큰 공을 세운 장군이 수원, 화성, 성남, 군포, 안양, 오산, 용인, 평택, 여주, 안성이라는 경기도 대부분을 자기의 땅으로 만든 꼴이라고. 실제로 이후 선양으로 가는 길을 여는 찬탈자들이 이런식으로 왕공작을 받아 선양을 받는 식으로 일을 진행하기도 했다.
[21]
사실 이 부분은 본 소설의 시계열이 좀 꼬인 상태인데 본래 순욱의 자결은 한창 조조의 위공 즉위 논의가 진행되던 212년에 있었던 일이고 조조의 위공 즉위는 213년에 있었던 일이다. 아마도 이 세계관에서는 소식이 뒤늦게 전달됐거나, 혹은 조조가 위공을 칭하자 순욱이 그제서야 죽은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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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조등의 양아들이자 조조의 친아버지
조숭이 본디
하후씨였는데 조등에게 입양되었다고 알려져 있어서 하후연이 조조의 사촌동생 정도로 여기지는 경우가 많은데, 패현 조씨와 하후씨가 가까운 사이는 맞았지만 정말 조숭-조조 가문과 하후씨의 관계가 혈연 관계 였는지 어땠는지는 지금도 설이 분분한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조숭 문서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