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의 전투에 대한 내용은 사이공 함락 문서 참고하십시오.
사이공 전투 Trận Sài Gòn (1955) Battle of Saig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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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 ||
1955년 4월 28일 ~ 5월 | ||
장소 | ||
베트남국 사이공시 | ||
교전 국가 및 세력 | [[틀:깃발| | ]][[틀:깃발| ]][[베트남국| ]][[틀:깃발| | ]][[틀:깃발| ]][[베트남 마피아| ]]
지휘관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즈엉반민| ]] [[틀:깃발| ]][[틀:깃발| ]][[찐민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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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 | ||
베트남국군의 승리 빈쑤옌은 사이공에서 쫓겨나 밀림으로 패퇴 찐민테의 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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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향 | ||
응오딘지엠의 권력 강화 베트남 공화국 체제로의 이행 종교파 군벌들의 몰락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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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55년 4월부터 5월까지 사이공에서 진행된 대규모 시가전. 남베트남 내부의 내전으로, 남베트남 정규군과 반공주의 군벌 사이의 첫 교전이었다. 이 전투는 본질적으로 반공주의 베트남의 지배권을 둔 정치적인 전쟁이었다. 이 전투 자체는 불가피하게 발생할 수밖에 없었으나 이후 불필요한 내부 충돌의 발단이 되었다는 점에서 베트남 전쟁의 터닝 포인트라고 할 수 있다.2. 배경
2.1. 빈쑤옌의 역사
빈쑤옌(Bình Xuyên)은 흔히 까오다이교, 호아하오교와 함께 종교파(sect)로 묶이고는 하는데 사실 이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집단이다. 원래 1920년대 초반에 사이공 쩌런 지역의 수적으로써 처음 탄생한 조직이다. 수적이니까 범죄조직이긴 했는데 당시에는 나름 부자들을 털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의적 비슷한 조직이었던 모양이다. 사이공 사람들은 이들을 흔히 수호전의 양산박과 비교하곤 했다고 한다.1940년대에 빈쑤옌의 보스가 된 레반비엔, 속칭 바이 비엔은 빈쑤옌을 이끌고 프랑스와 맞서 싸우기도 했다. 그런데 1948년에 베트민이 연합을 깨고 그를 암살하려는 시도를 했고 바이 비엔은 간신히 프랑스군 진영으로 도망친 뒤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다.
여기까지면 좋은데 이후 바이 비엔은 카지노를 운영하면서 빈쑤옌의 수입을 벌어들이고 프랑스와의 거래를 통해 사이공의 경찰권까지 쥐고 흔드는 진짜 조폭 군벌 보스가 되어 버린 게 문제였다.
1949년에 설립된 베트남국의 정치 세력들은 크게 두 부분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식민지 시대에 프랑스에 부역하면서 부를 축적하던 기득권과 반불 성향이 강하고 주로 하층민으로 이루어진 다양한 세력들이었다. 이들은 반공주의자라는 것 빼고는 서로 간에 정치적 교집합이 크지 않았다. 한쪽은 기득권이라는 입장 때문에 반공주의자가 된 것이고 다른 한쪽은 공산주의자들에게 배신당해 공산주의를 증오하게 된 것이니 애초에 반공주의자가 된 이유조차도 달랐다. 빈쑤옌은 흔히 친불 부역 세력이라는 단순한 딱지가 붙긴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그 기원은 후자에 속했다. 링크
프랑스가 베트남국의 주권을 제약해 버렸기 때문에 후자의 세력들은 불만이 컸고 이들로 이루어진 여러 반공주의/반식민주의 연합들이 명멸해 갔다. 그들 중 가장 마지막에 존재했던 조직 중 하나가 일명 연합 전선이라고 불리는 세력이다. 이 세력은 주로 당시 남베트남에서 새로 총리가 된 응오딘지엠에 반대하는 세력이었다. 한편 응오딘지엠은 일부 종교파 및 다른 반공주의 정치가 및 군인들을 포섭해서 새로운 반공주의 연합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혁명 위원회다. 빈쑤옌은 전자 쪽에 속해 있었다.
빈쑤옌은 전체 규모로 보자면 호아하오교나 까오다이교 군벌보다 규모가 작았으나 호아하오교처럼 분열을 겪지 않고 하나의 군사 조직으로 남아 있었으며 무엇보다 농촌에 기반한 저들과 달리 사이공을 장악한 조직이었기 때문에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었다. 따라서 베트남국 정부와 혁명 위원회 양쪽에게 있어서 빈쑤옌은 최우선 토벌 대상이었다.
3. 전개
1955년 봄에 접어들면서 남베트남에서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은 긴장이 절정에 이르렀다. 그해 3월 까오다이, 호아하오, 빈쑤옌은 응오딘지엠을 중심으로 점점 확장되어 가는 사이공 정부의 권력에 대항하기 위해 '민족주의 세력 연합 전선'으로 뭉쳤으며, 응오딘지엠은 이 경쟁 세력을 분쇄하고 자기 권력을 확고히 하고자 했다. 사이공의 경찰권이 국유화될 기미가 보이자 바이 비엔은 처음에는 수긍하는 듯하다가 거부했다. 일개 군벌 조직, 그것도 정규군에 편입되지도 않은 군벌 조직이 수도의 경찰권을 쥐고 흔드는 상황은 당연히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었고 이걸 거부한다는 건 결국 양쪽의 타협이 불가능하다는 걸 의미했다.결국 1955년 4월 26일 응오딘지엠은 빈쑤옌의 경찰서장을 해임한다 발표했고, 바이 비엔의 부하 경찰국장이 해임됐다. 이틀 뒤인 4월 28일 빈쑤옌과 정규군 사이에 본격적인 교전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양측의 교전 즉 사이공 전투는 사이공 정부의 공수부대가 빈쑤옌 진지를 공격하고, 방어측이 응오딘지엠의 관저를 박격포로 공격하면서 시작됐고 전개됐다. 링크
격렬한 교전이 벌어졌는데 결국 장비와 숫자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정규군이 승기를 잡았다. 바이 비엔의 주요 수입원 중 하나였던 카지노가 정규군의 공수부대에게 점령당하면서 빈쑤옌의 재정적 기반이 약화되었고, 4월 30일 반란 세력은 결국 수도 사이공에서 후퇴하기 시작하여, 수도 남쪽의 늪지대에서 전열을 재정비했다. 결국 일주일 만에 사실상 응오딘지엠을 지지하는 정규군이 승리를 거두고 있었다.
비록 정규군의 승리이긴 했지만 어두운 면도 있었다. 영어 위키백과에 서술된 바에 따르면 베트남군과 빈쑤옌 중 어느 쪽도 제대로 된 전략 전술을 사용하지 않고 무식하게 힘으로만 밀어붙이는 모습이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시가전은 당시까지만 해도 제대로 된 해법이 나오지 않은 전투 방식이었다는 점에서는 참작의 여지가 충분히 있다.
한편 빈쑤옌의 토벌에는 정규군뿐 아니라 찐민테 장군의 군사 조직 리엔민(Liên Minh)도 지원 세력으로나마 참전했다. 아마도 종교파 군벌 중에서는 유일한 사이공 전투 참가 세력일 것이다. 그는 5월 3일에 누군가의 총에 맞아 죽었는데 이 죽음에는 논란이 있다. 해당 문서 참조.
4. 결과와 이후
빈쑤옌은 밀림으로 패퇴하고 지엠의 정부는 사이공을 장악한 뒤 혁명 위원회의 도움을 받아 바오다이를 축출하고,여론의 반대를 등에 업고 남북 총선거를 무마시키고 베트남 공화국 체제를 성립했다.빈쑤옌은 종교파 군벌 세력들과는 이질적이긴 했으나 빈쑤옌의 패퇴는 곧 종교파 반공주의 군벌들의 토벌로 이어졌다. 사이공 전투로 커리어를 쌓은 즈엉반민의 지휘 하에 호아하오교의 반정부 성향 군벌들이 토벌당하거나 항복했다.
찐민테가 전투 도중 사망한 것은 베트남 공화국의 미래에 악영향을 남겼다. 혁명위는 자신들의 중진이자 유력한 군사 지도자, 그리고 미국 정부(정확히는 에드워드 랜스데일)와 친분 관계를 가졌던 대변자를 잃었고 곧 지엠에게 숙청당했다. 찐민테의 부하들인 리엔민은 1951~1955년까지 베트민과 프랑스군을 상대로 교전 경험을 많이 쌓은 군인들이었으나 지엠에게 버림받고 이리저리 흩어져서 역사에 별다른 발자취를 남기지 못했다. 그리고 혁명위가 배신당하고 해산당함에 따라 지엠은 스스로의 동맹이었던 군벌 지도자들의 반게릴라전 역량, 그리고 정규군에게 항복한 반정부 성향이었던 조직들의 군사적 역량까지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 기회를 영원히 날려 버렸다. 그리고 그들이 있었던 자리에는 북쪽에서 내려온 베트콩이 자리잡았다.
전략 전술에서 혹평을 받기도 했지만 사이공 전투와 이후 호아하오 군벌 토벌전의 전개로 알 수 있는 사실은 1955년의 남베트남군은 수적인 우위가 보장된다면 충분히 적을 상대로 이길 수 있는 군대였다는 것이다. 이 능력이 유지되기만 했어도 압박 전투 같은 무능력함을 보이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엠은 정규군조차 못 믿었는지 능력보다는 충성심 위주로 장교들을 승진시켰고 이렇게 대통령이 반공 군벌의 흡수도 못하고 정규군의 질도 형편없이 하락시킨 결과 결국 남베트남군 막장 전설이 기어이 막을 올리고 말았다.
빈쑤엔의 잔당들은 사이공의 암흑가로 흩어져서 베트남 마피아의 일원들이 됐다. 이를 대한민국 역사 및 인지도로만 비유하자면 김두한이나 이정재급의 거물 조직폭력배 두목이 별개의 무력을 구성해서 국가의 패권을 군사적으로 노리다가 정부군에 소탕당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