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9-22 11:09:21

까오다이교

동아시아의 종교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한국
전통신앙 계통
· ·
삼교 계통
· ·
동학 계통
·
증산 계통
· · ·
중화권
삼교 계통
· ·
소수민족 계통
·
일본
신토 계통
·
교파신토 계통
· · ·
삼교 계통
·
베트남
·
몽골
}}}}}}}}}
파일:Temple_Cao_Dai.jpg
언어별 명칭
한국어 까오다이교
한자 道高臺
베트남어 Đạo Cao Đài
영어 Caodaism
1. 개요2. 역사
2.1. 50년대 주요 인사
3. 구성4. 여담

[clearfix]

1. 개요

호찌민시 근교의 떠이닌에 위치한 까오다이교 총본부.까오다이교는 그리스도교, 이슬람, 불교, 유교, 도교, 토속 신앙에서 모티브를 얻어 발전한 민족종교 베트남 중남부에 백만여 명의 신자가 있다.

2. 역사

파일:응오 반 치에우.jpg
창시자 응오민찌에우(1878-1932)

프랑스 식민 시절 응오민찌에우(Ngo Minh Chieu, 본명은 응오반찌에우)가 동서양 종교 서적을 탐독하고 베트남 민족에 맞는 종교를 창시하게 되는데 1919년부터 신자를 모집하기 시작했고 1926년에 공식적인 종교가 되었다.

이 종교는 1930년대부터 1956년까지, 베트남 남부 지역에서 호아하오교와 함께 내셔널리즘의 핵심을 담당했다. 당시 까오다이의 교주 팜꽁딱은 프랑스에 의해 마다가스카르 유배되었으나, 쩐꽝빈 장군이 대신 까오다이교 신자로 이루어진 군대를 이끌고 프랑스군과 싸웠다. 이때 베트남의 많은 반공 무장 독립운동 세력과 마찬가지로[1] 일본군과 협력 관계를 맺고 일본군에서 까오다이군의 훈련을 지원하기도 했으나, 1945년에 일본이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베트남에서 철수했다.

1947년, 베트민은 함께 프랑스에 맞서 싸우자는 거짓된 약속을 깨버리고 혼자 권력을 장악하려는 본심을 드러내었고, 곧이어 주요 비공산주의 내셔널리즘 세력들의 수장을 연이어 공격하기 시작한다. 호아하오교의 교주 후인푸소 Huỳnh Phú Sổ가 베트민에게 납치당해 사망한 것처럼, 까오다이교의 군사 지도자 쩐꽝빈 역시 베트민에게 납치당했다. 하지만 그는 후인푸소와는 달리 목숨은 건지는 데 성공했고, 쩐꽝빈은 결국 베트민을 베트남의 더 큰 위협으로 여기고 프랑스와 협력 관계를 맺기로 결정한다. 교주 팜꽁딱 역시 1946년 베트남으로 복귀한 뒤 쩐꽝빈과 같은 결정을 했다. 까오다이교 군벌 지도자들 상당수는 이 결정에 따랐으나, 이에 안 따른 젊은 장교가 하나 있었는데, 찐민테라는 인물이었다.

이렇게 45년까지의 반불 독립운동과, 이후 반공 민족주의 운동에 큰 영향을 끼친 까오다이교였으나, 55년에 큰 시련을 겪게 된다. 응오딘지엠이 독재자로 각성하면서 정치적 동맹이었던 혁명 위원회(Revolutionary Committee)를 숙청하기 시작한 것이다. 팜꽁딱은 캄보디아로 망명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59년에 사망했다. 까오다이교는 살아남았으나 지역 조직력과 군사력, 그리고 유망한 정치적 지도자들까지 한꺼번에 잃어버리고 말았다. 가장 유명한 찐민테는 종교파 숙청이 시작되기도 전 55년 5월 3일, 사이공 전투의 와중에 암살당했고, 그의 부관 니락은 팜꽁딱과 마찬가지로 캄보디아로 망명한다. 응우옌타인프엉은 63년 쿠데타까지도 살아남아 있었으나, 팜꽁딱이 캄보디아로 쫓겨나게 되는 데 너무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탓인지는 몰라도, 이미 인기를 상실해서 까오다이교인들의 정치적, 군사적 구심점은 전혀 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결국 캄보디아 국경 지역에서 공산주의 진영을 상대로 남베트남을 지키는 요새 역할을 하던 까오다이교의 역량을 최종적으로 무너트린 것은 응오딘지엠이었다.

까오다이교의 이러한 역사는 당연히 북베트남 정권 입장에서는 눈엣가시였고, 따라서 통일 후 베트콩을 지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통일 후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젊은 신자가 잘 유입되지 않아 신도층의 고령화가 상당히 진행되었다.

2.1. 50년대 주요 인사

3. 구성

까오다이교의 교리는 대승 불교에서 기인했다. 따라서 최종 목적은 윤회의 사슬을 벗어나는 것이다. 그 외에도 유교의 윤리, 도교의 초자연적인 의식, 가톨릭의 위계 체계를 혼합했다. 이는 동아시아에 널리 퍼진 삼교의 영향이다. 하늘과 땅과 사람을 이루는 법칙은 모두 하나라는 천인합일(Thiên Nhân Hiệp Nhất)을 주장한다.

사원 중심 부분에는 예수, 무함마드, 석가모니, 공자, 노자, 토속신, 응우옌빈키엠이 함께 있는 초상화가 있고, 그 아래에 사람의 한쪽 눈이 그려진 천안(天眼)이 있다. 이 눈은 까오다이교에서 숭배하는 주신인 우주의 지배자이며 제삼천의 대도의 창조주 '천존' 혹은 '고대천옹대보살마하살(cao đài tiên ông đại bồ tát ma ha tát)'을 상징하는 신성안(神性眼)으로, 창시자인 찌에우가 하늘을 바라보다 목격한 환시에서 비롯된 것이다.[2] 이 눈 그림은 왼쪽 눈인데, 까오다이교에서는 왼쪽 눈은 양을, 오른쪽 눈은 음을 상징한다. 특이한 점으로, 상술한 초상화 중에는 나폴레옹 1세, 빅토르 위고도 그려져 있다. # 이렇듯 까오다이교는 모든 종교가 하나의 진리로 통한다는 만교일리(Vạn Giáo Nhất Lý)를 설한다.

사원에 들어갈 때는 남자의 경우 오른쪽 문으로, 여자는 왼쪽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 경내에는 신발을 벗고 맨발로 들어가야 한다. 관광객은 2층에서 예배 의식을 구경할 수 있으며 사진 촬영도 가능하다. 까오다이교의 성직자들은 자신이 맡은 직분에 따라 유/불/선을 상징하는 적/황/청의 도복 중 하나를 입고, 평신도는 흰색 도복을 입은 채로 예배를 집행한다. 수행법 및 명상법은 성직자들 사이에서만 공유되며, 평신도는 예배를 올리고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정도에 그친다.

까오다이교의 성립 초창기에는 천존의 뜻을 살피거나 계시를 받는 용도로 위자보드를 사용하기도 했다. 이는 까오다이교가 19세기 유럽의 교령술 및 심령주의 운동으로부터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3]

역사와 구성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이 페이지를 확인하면 좋다.

4. 여담



[1] 베트남 국민당 제외. 이들은 중국국민당과 동맹이었기에 일본과 적대 관계였다. [2] 이 환시는 두 번에 걸쳐 찌에우의 눈앞에 나타났으며, 그때마다 "이 눈을 신의 상징으로 쓰기를 원하시면 눈을 사라지게 해 주십시오"라고 찌에우가 기도했더니 두 번 모두 사라졌다고 한다. [3] 마침 동시대에 널리 퍼진 쯔꾸옥응으는 로마자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베트남인들은 유럽식 위자보드를 활용하기 어렵지 않았다. [4] 어린이를 보우하는 도교의 여신으로, 대만에서는 애정운을 담당하는 여신으로 숭배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