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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28 07:58:44

빅 바유 캐넛 탈선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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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열차 설명3. 사고 진행 과정4. 사고 원인 조사5. 사고 이후

1. 개요

Big Bayou Canot rail accident

1993년 9월 22일 미국 앨라배마 모빌의 CSX 소유 구간에서 암트랙이 운영하던 선셋 리미티드(Sunset Limited) 대륙 횡단열차가 '빅 바유 캐넛(Big Bayou Canot)'이란 모빌강의 지류에서 다리와 충돌한 후 탈선을 일으켜 총 탑승객 220명 중 47명이 사망하고 103명이 부상을 입은 사고로, 암트랙에서 가장 많은 사망자가 발생한 열차사고다.

2. 열차 설명

선셋 리미티드는 미국 최초의 대륙횡단열차로[1] 3대의 디젤 기관차[2]가 견인하는 2층 슈퍼라이너 객차 7대로 이루어져 있다. 기존에 없던 조용하고 빠른 엔진을 장착했으며 72석의 식당차와 유리석으로 둘러싼 전망용 객차도 존재했던 선셋 리미티드는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부터 플로리다 마이애미까지[3] 약 4,900km를 달려가는 열차였다.

3. 사고 진행 과정

1993년 9월 21일 이틀간 달리고 중간지점을 지난 암트랙 열차가 승객과 승무원 총 220명을 태운 채 텍사스에 진입했다. 열차는 밤 10시 뉴올리언스에 도착해 음식과 물을 보충했고, 연료 22,000리터를 동력차에 공급하던 중 냉방장치 화장실에 문제가 발생해 수리를 하면서 당초 계획보다 34분 지연된 11시 34분에 뉴올리언스역을 떠난다.

같은날 모빌라 예인선은 선장 앤드루 스태블러(Andrew Stabler), 조타수 윌리어 오돔(Willir Odom)의 운행 아래 북으로 362 km 떨어진 터스컬루사에 바지선 6척을 예인할 예정이었다. 3×2 형태로 바지선[4]을 묶은 뒤 예인선에 고정하고 미는 식으로 오후 5시 반에 출항했다. 11시 반에 스태블러 선장이 잠을 자러 가고 오돔 조타수가 키를 이어받은 가운데, 모빌지역에 짙은 안개가 끼며 오돔은 정상적인 항해가 어렵다고 판단한다.

9월 22일 오전 2시 15분, 오돔 조타수는 다른 예인선과 교신한 뒤 배를 세우고 묶을 곳을 찾으러 나섰으나 못 찾고 다시 움직이다가 2시 45분 빅 바유 캐넛의 한 다리와 충돌한다. 이 과정에서 다리가 옆으로 1m정도 돌아가면서 다리 위에 설치된 철로가 휘어져버린다.

한편 암트랙 열차는 2시 30분 모빌에 도착하고 애트모어를 향해 나아간다. 이후 2시 53분, 빅 바유 캐넛의 한 다리로 진입하던 열차는 70mph(약 113km/h)의 속도로 다리와 충돌하며 동력차가 튀어올라 강가에 추락하고 다른 동력차 2대도 추락하고 승무원용 객차 1대와 승객용 객차 2대, 화물차 1대가 탈선했다. 늪지에 잠긴 1호차는 가라앉았고 차장 로널드는 불길에 갇힌 채 사망했다.[5]

동력차에선 충돌로 기름 탱크가 터져 화재가 발생했고 탈선하지 않은 뒷차량 4대중 한 곳에 있던 여객전무가 승객 탈출을 돕고 911에 신고했다.

새벽 3시 20분 모빌 남쪽의 도핀선 기지에서 해안경비대 3명을 태운 고무보트가 출동했다.

스태블러 선장은 바지선을 다시 연결한 뒤 강가에 배를 대고 구조를 도왔다. 불길 때문에 가까이 가는 게 힘들자 배에 달린 알루미늄으로 만든 작은 배를 띄워서 17명을 구조하고 다른 예인선에선 20명을 구조했다.

새벽 4시 25분 해안경비대가 도착하고 생존자를 임시 열차로 모빌로 수송했다. 승무원 5명을 포함한 47명의 사망자가 확인된 암트랙 역사상 최악의 사고였다.

4. 사고 원인 조사

미국 교통안전국에서 철도기술자, 교량기술자, 선박전문가 들을 불러 조사에 착수했다.

빅 바유 캐넛은 상업용 수로가 아니었음에도 오돔 조타수는 이쪽으로 배를 끌고 들어왔는데, 조사 결과 오돔 조타수가 레이더를 잘못 보고[6] 갈림길을 강둑으로 보고 이 수로로 들어온 것이 확인됐다. 이후 교각에서 콘크리트 조각이 떨어진 것을 통해 배가 다리에 충돌한 것이 확인되었고, 왼쪽의 바지선이 교각과 부딪친 뒤 가운데 바지선이 다리와 충돌하며 다리가 1m 가량 돌아가고 이게 사고를 부른 것으로 밝혀졌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20px-MovableBridge_swing.gif
다리가 '돌아갔다'라는 표현이 어색해보이는데, 당시 바지선이 충돌한 다리는 선회교(Swing Bridge)[7]로 만들 예정이었던 다리로, 교량 가운데에 축을 설치해 다리가 돌아갈 수 있게 해 놨으나 해당 수로에 배가 통과하지 않도록 정해지자 선회교로 만들 필요가 없어져 축을 움직여주는 유압장치는 설치하지 않은 채 일반교량처럼 사용하기로 하고 다리를 완공했다.

이때문에 선박이 충돌하면 다리가 돌아가버릴 가능성이 있었는데, 여기서 또 하나의 의문점이 발생한다. 바지선의 충돌로 다리가 돌아가기엔 충돌이 너무 약했던 것이다. 충돌 당시 배 안에 흔들리은 있었으나 안의 물건은 움직이지도 않을 정도로 충돌 강도는 약한 편이었다.

그리고 조사 결과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지는데, 교량 양쪽 상판의 거더가 고정되지 않은 상태였다. 본래 선회교로 사용하기 위해 거더를 고정하지 않았더라도 나중에 일반교량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안전을 위해 이를 고정했어야 하는데, 이 과정이 생략된 것. 더 무서운 건 이 상태로 84년을 버텼으나(...) 아무도 대들보가 고정되지 않은 걸 몰랐고, 결국 바지선이 약하게 충돌했음에도 거더가 고정되지 않은 교량은 그대로 1m가량 돌아가버렸다.

거기다 선로가 충돌로 휘어지긴 했으나 끊어지지 않았는데 이 경우 선로 경고장치가 작동하지 않는다. 1974년 유타주에서 발생한 탈선 사고 이후 선로가 휘어도 끊어질 때와 마찬가지로 빨간불을 켜서[8] 열차에게 경고를 줘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으나 비용 문제로 계획이 폐기됐는데 이러한 사고를 부르게 된 것이다.[9]

5. 사고 이후

이 사고로부터 11일 후 다리가 재건되었는데 이번엔 회전장치가 제거되고 고정식 대들보로 다리를 고정했다.

선셋 리미티드는 운전을 재개했고 여객전무는 4개월 뒤 열차에 복귀했으나 한동안 여객열차 가까이 못 가는 트라우마를 보였다. 모빌라호의 조타수 윌리도 이 사고로 트라우마를 겪고 은퇴했다.

승객들 중에는 10년이 지난 후에도 TV에서 화재현장을 보다가 사고가 떠올라 공황증세를 보이는 PTSD에 시달린 승객도 있다고 한다.

[1] 서비스 개시 연도가 무려 1894년 11월이다! [2] P40DC 1기, F40PH 2기. [3] 현재는 루이지애나 뉴올리언스까지만 운행한다. [4] 강철판과 코크스, 각종 중금속 합성물들이 실려 1,400톤 가랑의 무게였다. [5] 생존자 말에 따르면 죽기전 주기도문 시편23편을 읊었다고 한다. [6] 당시 조타수 자격증을 따는 조건에 레이더를 볼 줄 아는 조건은 없었다. 사고 이후 추가됐다. [7] 교각에 설치된 축을 중심으로 다리가 90도 돌아가면서 배가 통과할 수 있게 해 주는 다리. [8] 레일을 전기회로의 일부로 사용한 궤도회로의 원리이다. 평상시에는 레일을 통해 전류가 흐르지만 해당 궤도 위에 철도차량이 운행중이어서 차축을 통해 전류의 흐름이 바뀌거나 레일이 끊어졌을 경우 전류가 흐르지 않아 계전기 동작으로 신호기에 정지신호를 현시하는 방식. [9] 1982년 이후 이 사고를 포함해 26건의 사고가 선로 변형으로 발생했으나 아직도 경고장치는 휘어졌을 때 작동하지 않는다. 궤도회로의 원리상 휘어졌을 때는 작동하기 힘들다. 차축이나 궤도 절단에 의한 회로 단락으로 동작하는 방식인데 레일이 휘는 것 만으로는 신호기의 계전기를 동작시킬 만한 전기적 변화를 일으키거나 감지하기 힘들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