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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51:22

비류국

비류백제에서 넘어옴
1. 고구려에 합병된 국가
1.1. 역대 국왕1.2. 둘러보기
2. 백제에 합병된 국가
2.1. 역대 국왕2.2. 유사역사학에서의 악용

1. 고구려에 합병된 국가

예맥의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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沸流

건국년도 미상~기원전 36년

비류(沸流)는 고구려어로 소나무(松)를 의미하는 단어이다. 고구려가 최초로 복속한 국가이자 고구려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송양이 다스리던 나라.
비류수에서 채소가 떠내려 오는 것을 보고 강 상류에 사람이 산다는 것을 알았다.
王見沸流水中 有菜葉逐流下 知有人在上流者
과인(송양)이 바다의 한 구석에 치우쳐 있어서 일찍이 군자를 만난 적이 없었다.
寡人僻在海隅 未嘗得見君子

기록상 남아 있는 동명성왕과 송양의 말로 보아 비류수의 상류, 바닷가와 가까운 지역에 위치한 국가로 추정된다. 또한 채소가 떠내려왔다는 것을 보면 농사를 지었는 듯 하다.

삼국사기》와 《 구삼국사》 모두 송양이 "여러대 왕 노릇을 했다."라며 비류국이 고구려가 건국되기 이전부터 존재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 등장하나, 건국년도가 언제인지는 알수가 없다.

고구려에 편입되어서 후에 비류국의 땅은 되찾은 땅이라는 의미에서 다물(多勿道)라 이르게 되었고, 비류나부(다른 이름으로는 연노부)라는 이름으로 고구려에 편입된다.
(왕께서) 비류곡(沸流谷)에 있는 홀본 서쪽 산에 성을 쌓아 수도를 건설하셨다.
<광개토대왕릉비 비문> 중

비류와는 의외로 관계가 있다. 비류의 어머니인 소서노가 비류수 인근의 졸본성 출신이기 때문. 참고로 비류수 인근이라는 표현은 현대의 관점에서 자의적으로 파악한 것이 아닌 문헌에서 졸본성을 설명할 때 나오는 표현이다. 사실 기록에서 보면 알겠지만 초기 고구려가 비류수 하류에 있지 않았다면 동명성왕이 비류수에서 채소가 떠내려오는 것을 보고 비류국에 찾아갈 수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1.1. 역대 국왕

대수 시호 재위기간
말대 다물국왕(多勿國王) 송양(松讓) ? ~ 서기 37년

1.2. 둘러보기

원삼국시대 한국사 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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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백제에 합병된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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沸流國

백제 온조왕(溫祚王)의 형인 비류가 세운 나라라고 알려져 있다. 위치는 오늘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문학동과 관교동 일대인 미추홀[1]이었다. 인천 문학산 정상에는 삼국시대에 축조한 산성이 남아 있는데 《 동사강목》, 《여지도서》, 《 증보문헌비고》 등의 옛 문헌에는 이 성이 비류의 옛 성이고, 성 안에 비류정(沸流井)이라는 우물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온조와 같이 남하한 비류가 건국했다고 전해지나, 비류가 세운 비류국은 바다 근처라 땅이 습하고 물이 짜 편히 살 수 없어 비류가 온조의 위례성으로 돌아가보니 번성하는 것을 보고 부끄러워 후회하며 죽었다고 한다. 비류국은 십제(백제)와 합쳐진다. 그러나 이 전승은 정작 백제 초기 왕계 중 하나인 비류계가 아닌, 온조계가 다분히 악의적으로 전하는 전승에서 전하는 것이라 주의해야 한다. 즉 적어도 비류계는 이런 전승을 전한 바 없다는 것이다.

원래 온조 백제의 이름은 '십제'였기 때문에 이 비류국이 백제라는 명칭의 시초 아니었겠냐는 추측도 있지만, 기록상 온조계측 자료이긴 하지만 비류가 세운 나라가 망하면서 국명이 '백제'로 바뀌었단 얘기는, 백제가 온조왕계와 연관이 깊은 이름이라고 유추할 근거가 된다. 때문에 비류를 지도자로 하던 정권 혹은 비류를 기원으로 하는 나라가 실존했더라도 국명은 애초에 백제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미추홀이 같은 부여계 유이민이 건국한 한성(온조)백제와 훗날 통합되면서 백제 건국신화가 형제 설화로 발전했다고 보기도 한 견해도 있었으나, 적어도 현재 시점에선 연대기적으로나 지역적으로나 부여는 고사하고 아예 고구려하고도 고고학적인 근거가 전혀 없음이 치명적이다.

인천에서는 3세기 중반까지도 드러나는 건 경기충청전라에 걸친 토돈분구묘제 공동체들 뿐이기에 이와 같은 견해는 고고학적으로 봤을 때 전면 부정된다. 이 상황은 그래도 고구려계 유적이 2세기 중후반부터는 연천군 임진강 유역, 그리고 3세기 중후반부터는 다름아닌 풍납토성, 몽촌토성 일대에서 발견됨과 대단히 대조적이다. 다시 말하면, 인천에 있었을 마한 공동체는 적어도 고고학적으로 봤을 때는 부여는커녕 고구려와도 아무 연관 없는 건 물론 백제 건국 사화와도 전혀 인연이 없는 것이다.

일각에선 '비류국이 《삼국사기》의 공백 지역인 충청도에 계속 존재하다가 광개토대왕의 원정 때 무너져 한성백제에 흡수되었다'는 주장도 하나, 이는 고고학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충청도 내륙 고고학적 계통은 고조선, 낙랑 그리고 목지국과 관계가 깊은 토광목관묘 - 석관묘 계열, 그리고 서해안은 침미다례 그리고 초기 한성백제의 두 주요 지배계층 중 하나의 묘제인 토돈분구묘 계열 중에 부여계나 고구려계가 들어갈 건덕지 자체가 없다. 광개토대왕 시절의 한성백제는 경기도, 강원도 영서 지역, 충청도 그리고 전남북 서해안 일대 및 전북 북부 지역을 직접 지배 아래 두고, 나머지 전남 지역은 간접 지배 아래에 둔 고대 국가였기에 당대 정치사를 보더라도 역시 충청도 지역에 비류국이 들어갈 부분은 없는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다만 고고학적으로도 한성백제의 초기 지배층의 기원이 이원적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게 된 현재, 고고학적으로 드러나는 적석총 묘제를 쓰는 고구려계 유민과 토돈분구묘제를 쓰는 경기도 서해안 해상 세력이, 현존하는 초기 백제 문헌 자료에 나타나는 인물들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만 규명하면 비류국과 초기 백제의 기원 문제는 더욱 분명해질 것으로 보인다. 앞서 고고학적으로 한성백제 건국 시기 당시 인천에 있었던 공동체는 부여나 고구려와는 무관한 게 사실이지만, 한성백제 두 지배층 중 하나였고 왕비까지 배출한 토돈분구묘제 세력과는 적어도 묘제로만 봐선 연관이 분명한데다 고고학적 한성백제 건국 시기 즈음에 별반 저항 없이 백제의 직접 지배 지역화하기 때문이다. 물론 마한 목지국과 위나라의 견제 탓에 늦어진 이유도 있었지만, 초기 한성백제가 경기 동부로의 진출은 다소 어려움을 겪은 반면 인천을 포함한 경기 서부 만큼은 거의 어려움 없이 대단히 일찍 직접 지배령으로 복속하는 것 또한 이 대목에서 특기할 사실이다.

2.1. 역대 국왕

대수 왕명 재위기간
초대 비류왕(沸流王) 해비류(解沸流) / 해피류(解避流)
,또는 우씨(優氏),
기원전 19년 ~ 기원전 18년

2.2. 유사역사학에서의 악용

재야사학자 김성호의 주장을 추종하는 유사역사학자들은 위의 내용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초기 백제의 실체는 비류백제라는 주장을 했다. 이것은 고스란히 이름이 비슷한 만화가 김산호의 작품인 대쥬신제국사 판타지적 설정으로 이어졌고, 형민우의 태왕북벌기에도 반영되었다. 하지만 유사역사라는 사실이 명백하여 지금은 믿는 사람이 거의 없다.


[1] 고구려에서는 매소홀현(買召忽縣)이라 불렀고, 신라에서 이를 소성(邵城)이라고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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