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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3 03:11:55

발리앙 디블랭

발리앙 드 이벨린에서 넘어옴


1. 개요2. 이벨린 가(家)의 배경3. 생애
3.1. 본격적인 활동3.2. 왕위 계승 분쟁3.3. 하틴 전투3.4. 예루살렘 방어전: 1187년3.5. 3차 십자군과 그 이후
4. 후손들5. 평가6.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1. 개요

Balian d'Ibelin
(1140? ~ 1193)

예루살렘 왕국 말기의 기사이자 십자군 전쟁의 주요인물.

십자군 이민(…) 1세대인 이벨린의 영주 바리정(Barisan d'Ibelin)의 막내아들로 출생연도가 약간 모호하다. 1158년에 성년이었다는 기록과 1155년에 미성년이었다는 기록을 바탕으로 아마도 1140년대 초반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위로 큰형인 위그(Hugues)와 작은형인 보두앵(Baudouin)이 있었는데, 위그는 1169년 사망하였고, 작은형은 당시 람라의 영주로 있었기 때문에 발리앙이 이블랭 성을 물려 받았다.

2. 이벨린 가(家)의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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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생애

3.1. 본격적인 활동

바리정은 세 아들을 두었는데 그중 막내 아들인 바리정이 부친과 구별하기 위해 프랑스식 발음인 발리앙으로 불렸고 바로 이 항목의 주인공인 이벨린의 발리앙이 되겠다. 이후 발리앙의 어머니인 엘비가 람라 영지를 상속으로 물려받았고, 첫째 아들인 위그가 어머니로부터 람라 영지를, 아버지로부터 이벨린을 상속받았다. 1169년 장남인 위그가 스페인 산티아고로 순례여행을 떠났다가 죽는 바람에 둘째 아들인 보두앵이 다시 상속 받게 되었는데 보두앵은 자기가 람라 남작령의 영주가 되었고 자기 동생인 발리앙에게 이벨린 남작령의 영주 자리를 봉신의 지위로 나눠 주었다. 야파 백작령은 예루살렘 국왕의 직할지이므로 람라령주인 보두앵은 예루살렘 왕의 봉신이 되었고 발리앙 역시 간접적으로 예루살렘 왕국의 봉신이 되었다.

발리앙은 1174년 트리폴리 백국 레몽 3세(Raymond III de Tripoli)를 도와 아랍 세력과의 전쟁을 지원하였으며, 1177년에는 몽기사르 전투에 참전하여 무슬림 세력의 방어선을 박살내는 전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리고 아모리 1세의 미망인이던 마리아 콤네나와 결혼을 하였는데, 이 여인이 누군고 하면 바로 동로마 제국의 황제 마누일 1세 콤네노스의 조카(!) 되시겠다. 그 덕분에 1179년 살라딘과의 전투에서 형 보두앵이 포로로 사로잡혔을 때, 마누엘 1세가 직접 몸값을 지불해 줘서 석방될 수 있었다.[1]

물론 마리아 콤네나가 동로마 황제의 조카라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마리아 콤네나가 예루살렘 국왕인 아모리 1세의 아내라서 예루살렘의 왕비였다는 점이다. 즉, 보두앵 4세 시빌라의 새엄마이며 유력한 왕위 계승자인 이사벨라의 친모이기도 하다. 신분 차이가 꽤 컸는데도 발리앙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넷이나 두었던 걸 보면 의외로 금슬이 좋았던 듯하다. 덤으로 마리아 콤네나는 아모리 1세에게 상속받은 나블루스 남작령도 가져와서 발리앙의 영지가 더 늘어나게 된다. 발리앙이 예루살렘 왕국의 중요 인물로 등장하는 건 이때부터다.

3.2. 왕위 계승 분쟁

1183년 나병으로 죽어가던 예루살렘 국왕 보두앵 4세가 5살짜리 조카 몽페라의 보두앵(Baudouin de Montferrat)을 공동 국왕으로 앉혀서 왕위계승을 시키려 하였고, 보두앵과 발리앙 형제를 통해 동생 시빌라의 남편이자 섭정인 기 드 뤼지냥(Guy de Lusignan)을 견제하려 하였다. 그리고 1185년 보두앵 4세가 죽고 뒤를 이어 보두앵 5세가 왕위에 오르자 발리앙 형제는 보두앵 5세에게 영원히 왕을 위해 봉사하고 보호하겠다는 맹세를 하였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보두앵 5세는 이듬해 사망하였다.

당시 왕위계승을 노리던 를 물먹이기 위하여 발리앙 형제는 마리아 콤네나의 딸이자 발리앙의 양녀인 이사벨라를 왕위계승 후보로 내세웠으나, 이사벨라의 남편이 에게 충성서약을 하면서 뒤통수를 후려갈겼고 캐스팅 보트를 쥐고 있던 시빌라가 를 배우자로 간택하면서 결국 왕위는 뤼지냥의 가 계승하게 되었다. 이에 반발한 보두앵은 에게 충성서약을 거부하고 자신의 아들과 영지 람라를 발리앙에게 위임한 후, 안티오키아로 떠났으며, 발리앙은 마지못해 에게 충성서약을 하고 고문역을 맡았다.

3.3. 하틴 전투

그해 기와 동맹관계인 르노 드 샤티용(Renaud de Châtillon)이 무슬림 상단을 습격하여 큰 피해를 입히자 살라딘은 보복을 선언하고 예루살렘 왕국을 공격하였다. 기는 병력을 소집하여 이에 맞서려 하였으나 발리앙은 강대한 살라딘의 군대와 맞서는 것은 자살행위라면서 반대하였고, 역시 같은 의견을 지닌 트리폴리 백작 레몽 3세가 나서서 중재를 하려 하였다. 하지만 르노의 처벌을 요구하는 살라딘과 그럴 수 없다고 맞서는 기의 의견차이로 인해 중재는 대실패. 결국 이런 대치상태는 1187년 초까지 계속되었다.

이에 발리앙은 성전기사단, 구호기사단, 시돈의 르노(Renaud de Sidon)과 함께 트리폴리로 향하였다. 하지만 5월 1일 크레송 전투에서 성전기사단과 구호기사단이 살라딘의 아들 알 아프달에게 발렸으며, 뒤늦게 도착한 발리앙은 패전사실을 듣고 즉시 생존자들을 수습하고 철수하였다. 역시 패전사실을 보고받은 레몽 3세도 뒤늦게 기와 손을 잡고 예루살렘 왕국을 지원[2]하기로 하였다.

기는 살라딘의 병력을 쫓아내기 위해 예루살렘을 떠나 북부로 진군하였으나, 황량한 대지였던 까닭에 물 부족에 시달렸으며 지속적인 공격으로 고전하였다. 결국 기가 이끄는 예루살렘군은 하틴 전투에서 살라딘의 군대에게 포위 섬멸당해 기 는 포로로 잡히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는 발리앙도 참전하고 있었으며 에데사의 백작 조슬랭 3세(Josselin III d'Édesse)와 함께 후미를 담당하고 있었으나 패배하였고, 패색이 짙어지자 레몽 3세, 시돈의 르노와 함께 티레로 철수하였다.

이 과정에서 놀라운것이 발리앙이 위치한 후미에는 집중적인 공격으로 사방을 분간하기 어려운 격전 중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발리앙은 그걸 뚫고 퇴각하는데 성공한다. 이 과정에서 그의 전술적 능력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보두앵 5세의 삼촌인 몽페라의 콘라드[3]와 협력하여 티레의 방어를 맡게 하였다.

3.4. 예루살렘 방어전: 1187년

발리앙은 살라딘을 찾아가 예루살렘에 있는 아내와 자식을 트리폴리에 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청하였고, 살라딘은 적대행위를 하지 않는 조건으로 이를 수락하였다. 하지만 예루살렘에 들어가자 주민들과 주교 헤라클리우스가 예루살렘에 머물러 방어전을 지휘해달라고 애걸하였고,[4] 결국 발리앙은 살라딘에게 약속을 어기게 되었다고 하고, 살라딘은 발리앙의 상황을 이해한다며 그걸 또 받아준다.[5] 당시 예루살렘에는 시빌라 여왕이 남아있었지만 방어전에는 일절 간섭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루살렘의 전권은 발리앙이 쥐고 있었으며, 총대주교 헤라클리우스와 함께 식량과 장비, 병력을 확보하는 등 방어준비에 박차를 하였다. 이 과정에서 기사가 부족하자 60명의 사람들을 임의로 선발하여 기사로 서임하기도 하였다.

한편 그 사이 예루살렘 왕국의 다른 영지들을 정복하고 예루살렘을 포위한 살라딘은 비록 발리앙이 약속을 어겼지만 그의 아내와 자식들이 트리폴리로 가는 것을 허락하고 아예 호위까지 붙여주는 대인배스러운 행보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치열한 공성전이 전개되어 살라딘의 군대가 예루살렘의 성벽 일부를 허물었지만, 발리앙이 이끄는 방어병력에 격퇴당해 도시로 진입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발리앙이 살라딘을 만나 30,000 베잔트의 금액과 도시를 그에게 넘기는 조건으로 7천 명의 기독교도 남자들의 안전을 보장받았으며, 나머지 사람들은 50일 이내에 몸값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협정을 맺었다. 당시 살라딘은 협정을 맺을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6], 발리앙이 나와서 "더이상 공격을 계속한다면 성지라 할지라도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것을 다 파괴하고 살라딘의 군대와 동반자살하겠다"는 거의 반 협박으로 협정을 성사시켰다.

이런 전후 사정이 살라딘의 넓은 자비로움을 상징하는 일화로 알려지고 있으나 실제로는 살라딘의 정치, 경제적인 문제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중세시기 서유럽과 마찬가지로 이슬람 세계에서도 주군이 가신들에게 병력을 동원하도록 명하는 것은 정해진 봉건적 의무기한에 따라 행해지고 있었고 의무기한이 넘기면 주군이 금전을 지급해 동원을 유지시켜야 했다. 자신의 자비로움으로 금전이 여유롭지 못했던 살라딘 입장에서는 이미 하틴의 뿔 전투 이후 예루살렘 공성전을 벌이는 동안 가신들을 동원시킬 기간이 한계에 다다른 상황이었고 발리앙은 이런 살라딘의 약점을 십분활용하여 예루살렘의 가치를 더해 최대한 관대한 조건을 얻어낸 것이다. 정치적인 관점으로 보자면 살라딘의 최종 목표는 서로 내전을 밥먹듯이 하던 이슬람 종파들의 통합인데, 발리앙의 협상을 무시하고 공격한다면, 예루살렘은 파괴될 것이 분명하고, 이슬람 교도들이 죄다 몰살당할 것은 뻔할 뻔자였다. 이렇게 된다면 예루살렘은 잿더미가 되어 성지의 의미가 사라지며 괜한 이슬람인들까지 죽어나가게 되거니와 그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수많은 정적들이 '성지를 파괴하고 교도들을 죽게 만든 원인제공자'라며 공격할 것이 뻔하였다. 범인이었다면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협상이냐며 몰아쳤겠지만, 현명하고 미래를 볼 줄 알았던 정치에도 유능한 살라딘은 그 미래를 단박에 파악했고, 예루살렘을 이런 식으로 함락시켜봐야 자기에게 실이 더 많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이런 큰 그림을 보는 살라딘도 대단하지만 이런 살라딘의 속마음을 꿰뚫어보고 자신이 무조건 불리함에도 상대가 절대로 하여금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게 하여 거절할 수 없는 협상을 제시하는 발리앙 또한 대단했다. 그 결과 예루살렘 함락 이후, 살라딘의 동원력은 크게 낮아지고 3차 십자군이 도착할 때까지 티레 공성전이 이어지게 되었다.

발리앙은 살라딘과의 협정이 이행되는 동안 몸값을 마련하지 못한 기독교도들의 신변을 보장받기 위해 총대주교 헤리클리우스와 함께 인질이 되겠음을 자청했으나 살라딘은 이 요청을 거절하고 자신의 재산에서 몸값을 대신 내주었다. 이후 발리앙은 11월 20일, 예루살렘을 빠져나가는 마지막 행렬을 따라 가족들이 있는 트리폴리로 향했다.

3.5. 3차 십자군과 그 이후

이후 1190년 예루살렘 왕국의 남은 땅인 아크레 공성전에 참가하였고 리처드 1세가 도착한 이후 3차 십자군에 참가하며 크고 작은 공을 세웠다. 이 기간에 여왕 시빌라가 사망하자 또 다시 왕권분쟁이 벌어졌다. 발리앙의 양녀 이사벨라가 이번에도 후보로 올랐지만 가 왕위를 내놓지 않았고, 이사벨라의 남편인 토롱의 옹프루아 역시 기에게 계속 충성할 것을 맹세하는 바람에 또 다시 물거품이 되었다. 결국 발리앙과 마리아는 이사벨라를 옹프루아와 이혼시키고, 몬페라토의 콘라드와 재혼시켰다.[7] 이를 통해 예루살렘 왕국의 왕권을 다시 한 번 주장하게 될 수 있었으나, 당시 제3차 십자군 원정을 이끌던 잉글랜드 왕국의 사자심왕 리처드 1세를 지지하고,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가 콘라드를 지지하면서 대립각을 세운 까닭에, 왕권분쟁은 쉽사리 해결이 되지 않았다.

결국 1192년 선거를 통해 콘라드가 차기 왕으로 선임되었지만, 공교롭게도 며칠 후 무슬림 암살단 어새신에게 암살[8]당했다. 이후 이사벨라는 사자심왕 리처드 1세의 조카인 상파뉴의 앙리 2세(Henri II de Champagne)[9]와 재혼하였고, 이에 따라 발리앙은 앙리 2세의 고문역이 되었으며 야파 전투에도 참여하였다.

나중에 리처드 1세의 사절로 임명되어, 살라딘과 만나 람라 조약을 성사시켰다. 이를 통해 원래 영지인 이벨린은 영구히 상실하게 되었지만, 살라딘은 리처드 1세가 탈환한 해안가 지역을 기독교도의 영토로 인정하였고, 그중에서 아크레 외곽의 케이몽(Caymont)과 그 인근 지역을 발리앙의 영지로 인정해주었다. 그리고 3차 십자군 원정이 마무리 된 그해 1193년에 사망하였다.

4. 후손들

이후 그의 후손들인 이벨린 가문은 발리앙의 분투와 살라딘을 비롯한 이슬람계 군주들의 호의로, 예루살렘 함락 후의 십자군 국가군 중에서 꽤 높은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바이바르스가 집권하면서 십자군 국가군에 대한 이슬람의 태도가 적극적인 적대로 변하자, 영지를 잃으며 다른 십자군 귀족들처럼 키프로스 왕국으로 망명하였다. 이벨린 가문은 키프로스 왕비를 배출하는 등 키프로스에서도 고위 귀족으로 살았으나, 오스만 제국의 침공으로 키프로스 왕국이 멸망하자 함께 몰락하고 말았다.[10]

훗날 발리앙의 자손들은 유럽 각지로 퍼져나가 번성하였고, 프랑스 국왕의 자리에까지 오른다. 샤를 8세는 발리앙의 피를 이어받은 첫 번째 프랑스 국왕이다.[11] 샤를의 뒤를 이어 즉위한 친척인 루이 12세는 발리앙의 후손이 아니지만 루이 12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프랑수아 1세는 외할아버지 필리포 2세가 샤를 8세의 어머니였던 카를로타의 남동생이었기 때문에 역시 발리앙의 후손이다.

부르봉 왕조의 초대 국왕인 앙리 4세 또한 발리앙의 후손인데, 앙리 4세의 외할머니인 마르그리트 당굴렘 프랑수아 1세의 친누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프랑수아 1세 이후의 프랑스 국왕들과 펠리페 5세 이후로의 스페인 왕실은 물론 부르봉 왕가의 피를 이어받은 부르봉 파르마 일가, 벨기에 왕실, 룩셈부르크 공가 모두 발리앙의 후손이 된다.

5. 평가

활동 초창기부터 보두앵 4세와 더불어 여러 전장에 나서서 공을 세웠으니 기사로서는 상당히 유능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보두앵 4세는 발리앙을 과부가 된 자신의 계모 마리아 콤네나의 재혼 상대로 주선하는,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행동을 했는데 그것도 이 때의 공적이 주된 이유였다고 여겨진다. 예루살렘 왕국은 유럽에서 이주한 귀족들이 세운 나라이고 유럽 국가들의 지원에 많이 의지했으므로 권력의 주축도 유럽의 귀족 가문 출신들로 이뤄져 있었고, 마리아 콤네나는 상술했듯 보두앵 4세의 계모(=예루살렘 왕국의 대비)인데다 동로마 황제의 조카였으니 누구든 그와 결혼한다면 예루살렘 왕국의 핵심 권력층으로 부상하게 된다. (실제로 발리앙도 그렇게 되었다) 그런데 영민한 보두앵 4세가 이렇게 중요한 정략결혼 카드를, 유럽에 빽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영지도 왕국 내에서 가장 후진 축에 속하는 발리앙에게 사용한 것이다. 이는 보두앵 4세가 발리앙의 군사적 능력을 매우 높이 평가했다는 것 외에 다른 이유를 찾기 힘들다. 군사 능력이 뛰어난 발리앙의 권력을 강화해서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예루살렘 왕국을 지키는 방패로 삼고, 당시 가장 강력한 귀족이었던 트리폴리 백국의 레몽 3세를 견제하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12] 발리앙 입장에서도 보두앵의 이런 호의는 감사해 마지않을 입장이었고 실제로 보두앵의 유지를 끝까지 받든다.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서는 발리앙이 보두앵에게 충성을 다하는 모습이 묘사되는데 정말로 그랬을 것이다.[13]

이후 하틴 전투에서의 퇴각에서나 예루살렘 전투에서도 적지 않은 공적을 세웠다. 리처드 1세와는 예루살렘 왕위 계승 문제로 마찰이 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처드는 가장 중요한 살라딘과의 평화 협상을 발리앙에게 맡겼으며, 살라딘 또한 전쟁 이후에도 발리앙의 영지를 인정해 주는 등, 상당히 호의적으로 대해주었던 점 등으로 미루어 여러모로 상당히 뛰어난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많다.

반면에 콘라드를 예루살렘 국왕으로 내세우는 과정에서 무리를 한 일도 있고, 이 때문에 특히 유럽에서 건너온 3차 십자군의 일원들에게는 심한 비난을 받기도 했다. 콘라드는 리처드가 여러 번 요청했음에도 아크레 전투 이후 티레에 머물면서 제3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지 않았으니 리처드와 유럽파 십자군의 눈에는 상당히 안 좋게 보였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14] 물론 원래 예루살렘에서 살던 귀족들은 기 드 뤼지냥의 한심한 능력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대부분 콘라드를 지지하긴 했지만 말이다.

6.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또한 사생아라는 설정을 비롯한 그의 가족 관계와, 시빌라와의 로맨스도 픽션이다.[16] 나이도 실제 예루살렘 공성전이 있던 시기의 발리앙은 대략 40대 후반~ 50대 전반인데, 이 시대의 평균 수명과 야전에서 상당히 굴렀던 발리앙의 이력을 생각하면 현대의 60대 정도로 보일 만큼 삭았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 나이대를 고증했다면 발리앙의 아버지 고프리 역할의 리암 니슨이 적당했을것이다. 고프리가 보두앵 4세의 심복이자 선생이며, 프랑스의 시골귀족 출신에 "여기서는 신분이 중요치 않다"는 말을 자주하는 것으로 보건대, 재미를 위하여 발리앙이란 캐릭터를 둘로 쪼개놓은 것으로 추측된다.

[1] 발리앙이 마리아 콤네나와 결혼함에 따라 둘째 형인 보두앵도 예루살렘 왕국에서 꽤 중요한 인물로 평가되어 한때 시빌라의 결혼 상대로 거론될 정도였다. 발리앙은 마지못해서라도 기 드 뤼지냥에게 충성서약을 했지만 보두앵은 이를 거부해 안티오크 공국으로 쫓겨나서 거기서 죽었다. [2] 당시 레몽 3세는 알 아프달이 트리폴리 백국에 적대행위를 하지 않는 조건으로 알 아프달의 군대가 영지를 통과할 수 있도록 승인한 상태였다. [3] 콘라드의 형이 보두앵 5세의 아버지이자 시빌라의 일찍 사별한 첫 남편이었다. [4] 맨처음엔 당연히 발리앙은 '나는 살라딘과 약속했고 신께 맹세까지 했으니 그런 행위는 할 수 없다.'며 거절하지만, 주교인 헤라클리우스가 자기가 그 죄를 사해줄 테니 제발 예루살렘을 구해달라고 한다. 그렇게 간청함에도 불구하고 발리앙은 거절하는 듯 했으나... 헤라클리우스가 결정적인 말을 하는데 '네가 신과의 맹세를 지키는 길이 결국 신을 모욕하는 행위다.' 즉, 약속을 지켜서 맹세를 지켜도 결국 성지는 이교도들에게 넘어갈 테니 그게 더 큰 모욕이다 라는 주장을 듣고 망설이다 결국 돕기로 한다. [5] 심지어 살라딘 자신은 배신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발리앙의 가족들을 안전하게 보내주는 것도 모자라 호위까지 붙여주는 등 약속을 끝까지 지킨다. 대인배 살라딘도 살라딘이지만 발리앙도 엄청난 협상가인 게, 편지를 보내며 약속 깨서 미안한데... 가족은 좀 돌려보내주면 안 될까? 라는 어찌보면 황당한 요구를 하는데 그걸 살라딘이 들어준다. 살라딘의 인품을 보여줌과 동시에 살라딘도 대충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던 듯 담담하게 반응한다. [6] 이미 살라딘의 군대가 예루살렘의 성벽을 뚫고 시내에 진입하기까지 했었다. 진입한 부대는 격퇴되었지만 성벽이 뚫린 이상 예루살렘 함락은 시간문제일 뿐. 애초에 당대 공성전에서 수성 측의 항복이 받아들여지는 시기가 '성벽이 온전한 시점'까지고 성벽이 돌파당한 이후에는 항복을 받아주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7] 옹프루아는 정치적인 욕심도 없었고, 인격적으로도 괜찮은 사람이었고 이사벨라와의 사이도 썩 좋았다. 발리앙이 양녀와 사위를 배신하고 강제로 갈라놓은 것에 가깝다. 그러나 발리앙도 할 말이 많은 처지였는데, 무엇보다도 둘 사이에 아이가 없었다. 이사벨라는 당시 예루살렘 왕국의 유일한 왕위 계승권자였으므로 자식이 없는 것은 심각한 위험요소였다. 또한 옹프루아는 르노 드 샤티용의 양자로서, 양부와 자신의 파벌에 대한 의리를 철저히 지켰는데, 하필이면 이 르노란 작자는 또라이 중의 상또라이였고 그 파벌이 편들었던 기 왕은 운빨로 왕위에 올랐을 뿐 답도 없게 무능한 작자였다. 즉 예루살렘 왕국의 존속을 책임져야 하는 발리앙의 입장에선 사이좋게 편을 먹은 그 두 사람이 최악의 발암 요소였는데, 왕위 계승권자인 이사벨라 공주의 남편으로서 문제 해결의 열쇠를 손에 쥔 옹프루아가 꼼짝도 하지 않으니 정말로 돌아버릴 지경이었을 것이다. 결혼을 개인 간의 관계로 보면 발리앙이 명색이 양아버지/장인이면서 폭거를 저지른 꼴이지만, 당시에는 결혼이 정치의 주요 수단이었으며 발리앙은 무능하고 호전적이기만 한 기+르노 연합에 맞서 왕국을 지키기 위해 콘라드를 지지하는 파벌을 만들어서 자신이 취해야 하는 정치적 행동을 선택한 것이었다. [8] 여기에 리처드 1세가 개입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지만 진위여부는 불분명하다. [9] 리처드 1세의 모후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루이 7세와의 초혼에서 낳은 장녀, 즉 리처드에게는 이부 누나가 되는 샹파뉴 백작부인 마리 드 카페의 아들. [10] 키프로스 왕국은 1489년에 베네치아 공화국에 합병되어 멸망했고 오스만 제국은 1570년에 키프로스 섬을 침공, 이듬해인 1571년 4월에 마지막으로 파마구스타가 항복하면서 키프로스 섬이 오스만 수중에 들어갔고 이로 인해 같은 해 10월에 레판토 해전이 벌어졌다. [11] 샤를 8세의 어머니인 사보이아의 카를로타가 발리앙의 후손이다. 발리앙의 후손 안 드 뤼지냥이 사보이아 공국 루도비코 공작과 결혼하여 낳은 딸이 카를로타. [12]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서는 티베리아스와 보두앵 4세의 관계가 아주 우호적으로 그려졌으나 실제로는 보두앵 4세가 예루살렘 왕국에서 가장 강력한 귀족인 레몽 3세를 다소 견제하는 입장이었다.(물론 적대적인 관계까지는 아니었다) 기 드 뤼지냥과 시빌라의 결혼도 이 때문이었다. [13] 오히려 영화 쪽이 저 결혼이 생략되고 단순히 인품에 반해 섬기는 것으로 나와 현실보다 개연성이 되려 낮아져버렸다(...) [14] 일설에는 3차 십자군에 참여하지 않는 대신 예루살렘 왕으로 인정해달라며 리처드 몰래 살라딘과 비밀 교섭을 했다는 말도 있다. [15] 60명을 임의로 기사서임 했다는 것은 성내에 전문 전투병력이 부족해 휘하에 있던 60명의 베테랑급 병사들에게 기사서임을 해서 단위별 지휘권을 주었다고 보는 게 적당할 것이다. 지금으로 치면 전쟁 중에 장교들이 부족해졌을 때 부사관이나 일반병들을 전시진급시켜 분대장, 소대장 등으로 임명하는 것과 비슷하다. [16] 영화에서는 발리앙이 '고드프리'라는 이름의 한 프랑스 영주의 사생아로서 대장장이 일을 하며 살았고, 사제가 된 이부동생이 있으며, 첫 아내가 유산/사산 후 우울증으로 자살했다는 설정이 붙어 있다. 그러나 실제 발리앙의 아버지는 예루살렘 왕국의 야파 백작령 내에 영지를 하사받은 '바리장'이라는 사람이었고, 발리앙은 3남 중 막내에 당당한 적자(정실 부인이 낳은 아들)였으며, 프랑스의 평민 여성이 아니라 자그만치 동로마 황제의 조카와 결혼해 금슬 좋게 잘 살았다. 발리앙과 시빌라의 관계는 아내의 전 남편의 딸/계모의 새 남편으로 피는 안 통하지만 인척이라면 인척이었고, 정치적으로는 예루살렘 왕권을 놓고 다투는 정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