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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타비아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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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타비아 공화국
Bataafse Republiek
République batave
파일:네덜란드 공화국 국기.sv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20px-Wapen_Bataafse_Republiek.svg.png
국기[1]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20px-Flag_of_the_Batavian_Republic.svg.png
해군기 상징[2]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98px-1798bataafscherepubliek.svg.png
1795년 ~ 1806년
위치 네덜란드
수도 헤이그
정치 체제 공화제
국가 원수 총독
공용어 네덜란드어, 프랑스어
민족 네덜란드인, 프랑스인
종교 개신교, 가톨릭
역사 1795년 성립
1806년 해체
통화 휠던
성립 이전 파일:네덜란드 공화국 국기.svg 네덜란드 공화국
해체 이후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홀란트 왕국

1. 개요2. 상징3. 건국 과정4. 평가5. 참고 문헌 6.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1795년부터 1806년까지 네덜란드 지역에 존재했던 공화국으로 프랑스 제1공화국 괴뢰국이었다.

국명의 바타비아는 네덜란드의 시조 중 하나로 인정받는 바타비족(Batavi)에서 따왔다.

2. 상징

파일:Flags_of_the_navy_of_the_Batavian_Republic.jpg
바타비아 해군기
파일:바타비아 공화국 대형 도장(1796).svg 파일:바타비아 공화국 대형 도장(1802).svg
바타비아 공화국 국새(1796~1802) 바타비아 공화국 국새(1803~1806)

3. 건국 과정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 프랑스 혁명군 남네덜란드( 벨기에)를 장악하고 1792년 프랑스 제1공화국을 형성했다. 프랑스 혁명군은 재정 부족으로 보급 상태가 나빠졌고 프랑스의 장군 장샤를 피슈그뤼(Jean-Charles Pichegru)는 저지대 국가 북부인 네덜란드 공화국을 점령하기로 결심한다. 네덜란드는 수공을 써서 프랑스군의 침략을 막는 작전을 세웠으나, 전역에 불어닥친 혹한으로 강이 얼어 프랑스 혁명군은 쉽게 네덜란드로 진격했고,[3] 결국 네덜란드의 수공 작전 대실패. 1795년 1월 16일 프랑스 혁명군은 위트레흐트(Utrecht)를 점령했다. 며칠 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친프랑스적인 네덜란드 민족 세력들[4]이 도시를 장악하면서 오라녀 공 빌럼 5세(Willem Ⅴ)와 그의 가족은 영국으로 망명할 수 밖에 없었다.

1795년 네덜란드 민족 세력들은 네덜란드 왕당파로부터 권력을 이양받고 네덜란드 지역에는 바타비아 공화국이 세워졌다. 프랑스 제1공화국은 1795년 5월 16일 바타비아 공화국과 상호 방위 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이 조약은 바타비아 공화국에게 많이 불리한 조약이었다. 바티비아 공화국은 프랑스에 지불했던 손해 배상금 1억 휠던을 포함해서 프랑스의 육, 해군 유지비의 절반과 네덜란드 주둔 프랑스군의 의식주 경비를 지원했고[5] 플란데런, 마스트리흐트, 펜로를 프랑스에게 양도했다. 원래 프랑스는 이것보다 더 많은 요구를 했으나 피터르 파울뤼스(Pieter Paulus) 바티비아 공화국 의회 의장의 중재로 이 정도 선에서 합의되었다.

영국은 이 조약이 체결되자 즉각 반발하면서 바타비아 공화국에게 선전 포고하고 전세계에 있는 네덜란드의 식민지를 공격했다. 영국의 공격으로 바티비아 공화국은 네덜란드령 동인도( 인도네시아)를 제외한 대부분의 식민지에서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1796년 3월 1일에는 기존의 의회를 대신해 광범위한 대의제가 시행되어서 주민 1만 5천명당 한 명의 대표가 선출되는 국민 회의(Nationale Vergadering)가 개최되었다. 여기서 바타비아 공화국을 연방제 국가로 하는 방안이 통과되었다. 그러나 단일 통일 국가를 원한 급진파와 통합 세력들은 1798년 1월 22일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홀란트 주의 독주에 반대하는 지방의 가톨릭 세력과 농민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반란 세력은 국민 회의 안의 연방 세력 22명을 체포하고 투옥시킨 다음 나머지 연방 세력들은 자신들을 지지하는 서약을 하게 했다. 그리고 새로운 헌법 개정안을 만들어 권력을 장악하려 했다. 1798년 4월 23일 투표자 93%의 동의를 얻은 새로운 헌법이 승인되었다. 이 때 재정된 새로운 헌법은 신체, 재산, 명예, 문화, 관습의 보장을 주장했다. 또한 사적 영역에 한해서 모든 종교가 인정되었다. 산업별 조합을 중심으로 한 노동 조직들은 모두 철폐되었다. 시민 1만 5천명 이상 혹은 양원 중 하나가 요구할 경우 국민 투표를 통해 헌법을 개정할 수 있었다.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프랑스는 바타비아 공화국의 군인 헤르만 단덜스(Herman Willem Daendels)[6]에게 협력을 요청했고 그는 군사 반란을 일으켜 1798년 6월 12일 정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온건 연방 세력들을 등극시켰다.

1799년 8월 27일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한 영국 러시아 제국이 연합 함대를 구성해 노르트홀란트를 공격했다. 바타비아 공화국 함대가 넥셀에 정박해 있었으나 영-러는 자신들이 해방군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영국으로 망명했던 오라녀나사우 가문까지 동원했다. 영-러 함대에 오라녀나사우 가문 깃발이 펄럭이는 것을 본 공화국 국민들이 싸움을 거부하면서 바타비아 공화국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항복하고 말았다. 나중에 빌럼 1세가 되는 빌럼 5세의 후계자도 영국군에 참여해 국민들의 봉기를 촉구했다. 그러나 기욤 마리 안 브륀 장군을 위시한 프랑스-바타비아 연합군이 베르헌(Bergen), 카스트리큄(Castricum)에서 영-러 연합군에게 승리하자 영-러 연합군은 재빠르게 귀국했다.

바티비아 공화국과 프랑스의 관계는 더욱 가까워졌지만 바타비아 공화국에게 큰 부담이 되기도 했다. 프랑스가 전쟁 수행을 위한 재정 지원을 요구해 왔을 때 바타비아 공화국은 300만 휠던을 제공하고 더 이상의 재정 지원은 없을 것이라는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그러나 프랑스는 바타비아의 재정 지원이 필요했고 1801년 피에르 오주로(Pierre Augereau)로 하여금 군사 반란을 일으키게 해 다시 새 체제를 수립했다.

1802년 아미앵 조약으로 바타비아 공화국은 실론( 스리랑카) 지역을 제외한 식민지들을 회복했지만 1803년 영국이 또다시 전쟁을 선포해서 다시 빼앗기게 되었다. 1804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프랑스의 황제로 즉위해 프랑스 제1제국이 성립되었다. 나폴레옹은 암스테르담의 법률가 스히멀페닝크(Schimmel-peninck)를 바티비아 공화국의 행정 장관으로 임명하고 영국과의 전쟁 수행을 돕게 했다. 스히멀페닝크는 바타비아 공화국의 헌법을 개정하고 급진적인 개혁을 실시했다. 빌럼 5세가 사망하자 나폴레옹은 자신의 동생 루이 보나파르트을 네덜란드의 왕으로 임명했고 스히멀페닝크는 행정 장관직을 사임했다. 이렇게 바타비아 공화국은 해체되었고 그 대신 루이 보나파르트를 왕으로 하는 홀란트 왕국이 새롭게 형성되었다.

4. 평가

바타비아 공화국은 프랑스의 점령하에 프랑스의 사상을 추종한 네덜란드 애국주의자들에 의해 통치되었기 때문에 네덜란드인들은 네덜란드 역사에 있어 치욕적인 시기로 평가하기도 했다. 정치, 문화, 사회적으로 프랑스에 종속된 국가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수백년 동안의 고전 공화국의 경험을 하고서도 네덜란드 군주제가 전혀 약화되지 않은 채 되살아났던 시기라고 보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 네덜란드에서는 바타비아 공화국의 긍정적인 부분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예를 들어 1796년과 1798년 제정된 진보적인 신헌법들이나 프랑스를 지탱했던 바타비아 공화국인들의 수완 등이 있다.

인도네시아의 수도 자카르타는 네덜란드의 식민지 시절 바타비아족에서 유래하여 바타비아로 불렸으며, 바타비아 공화국과는 관계가 없다.

5. 참고 문헌

6. 관련 문서



[1] 아래에 있는 깃발은 1796년도에 등장한 깃발이며 해군기로 쓰였다. 바타비아 공화국의 실질적인 깃발은 위에 있는 깃발이다. 당시 방침상 국기의 색상이 빨강, 하양, 파랑으로 이름은 바타비아 깃발이라고 정해졌다. 대신에 네덜란드 공화국 시절에 쓰이던 오렌지가 들어간 삼색기가 금지되었다. 참고. 색상은 옛날 그림들로 봤을 때 색상은 연한 파랑 진한 파랑 둘 다 쓰였을 것으로 보인다. [2] 바타비아 공화국은 별도의 문장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영어 위키피디아에서도 상징(Emblem)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바타비아 공화국은 이 상징을 변형해서 국새로 썼다. [3] 네덜란드는 군대가 다닐 정도로 강이 얼어붙는 경우가 드물다. [4] 이들은 프랑스 대혁명의 사상에 공감해 오라녀나사우 가문을 지지하는 네덜란드 왕당파와 대립적인 관계였다. [5] 네덜란드 주둔 프랑스군의 수는 약 2만 5천명에 달했다. 바타비아 공화국은 이 경비를 지원하기 위해 수천만 휠던을 썼다. [6] 나중에 원수로 임명되었다. 1808년부터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총독으로 임명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