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민속학( 民 俗 學)은 인간의 습속에 관하여 다루는 학문이다. 영미권에서도 민속학의 흐름이 발견되기도 하였으나, 한국에 들어온 민속학은 주로 독일과 일본을 거쳐 들어온 경향이 짙다. 그러므로 본 문서는 민속학의 시초를 헤르더, 그림 형제 등이 세운 Volkskunde로 이야기하고자 한다. 영미권의 folklore의 경우, 주로 언어적인 전승에 초점을 맞추므로, 축제나 민간 신앙에 많은 주목을 기울이는 한국의 민속학과 거리가 멀다고 볼 수 있다. 물론 학술적 의미의 folklore라는 단어 자체는 한국의 민속학이 다루는 범위도 포함하긴 하나, 일반 영미권 언중은 언어 전승에 대해서만 이 단어를 쓰는 편이다.민속학은 민속(民俗)에 대하여 다룬다. 많은 경우 민속학자들은 민속의 범위를 설정함에 있어 인간의 삶, 혹은 민의 생활 양식이라는 범위를 이야기하나, 이 경우에는 너무 포괄적이다. 다만 민속학자들이 주요 연구 대상으로 삼는 영역이 민간신앙, 세시풍속, 축제, 놀이, 언어전승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민속학자들이 다루는 민속이 관습이라고 보는 것이 무방할 것이다.
2. 정체성
민속학을 인류학의 한 영역으로 볼 것인지 혹은 별개의 학문 영역으로 볼 것인지에 관해서는 여러 민속학자들 및 인류학자들이 의견을 달리한다. 보통 민속학계의 주장은 인류학은 학문적 특성[1]상 타 문화를 관찰한 반면, 민속학은 자 문화를 관찰하며 전혀 다른 맥락에서 형성되었다는 의견이 주를 이룬다. 그러나 인류학계의 주장은 국내의 인류학은 초기부터 자국민에 대한 관심이 큰 비중을 차지하며 발달해왔기 때문에 결국 초창기부터 현재까지 인류학이 민속학의 모든 분야를 포괄하고 있다는 의견이다.보완하자면 인류학이 상호 다른 문화를 이해하기 위하여 이론 체계를 형성해오는 과정을 가져오게 한 반면, 민속학은 한 관습이 존재한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연구하기 위하여 자신의 관찰을 분류하고 이를 전파론적으로 파악하는 방법이 발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그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해 민속을 연구하는 것이 인류학 내의 민속학이라면, 민속 자체를 채집하여 분류하는 것이 민속학계의 민속학. 때문에 인류학과 민속학은 현장 연구 방법론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비슷해 보이지만 그 방법론의 관점이 약간 다르다. 민속학은 관습 자체에 집중하여 그 관습을 중심으로 두고 이를 고증하고, 실제 어떤 영향을 주고 받았는지, 왜 이렇게 생겼는지 그리고 변화했는지 등을 연구하는 한편, 인류학 내의 민속학은 민속을 행위하는 행위자들과 그 사회를 중심으로 두고 그 관습을 연구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는 현재에 와서는 학문적 독자성의 문제라기보다는 연구자의 관점 문제에 가깝고, 특정 학문의 특징으로 보긴 애매하다. 가령 사회민속학을 하는 사람들의 경우 사람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도 많고, 문화인류학자라 해도 관습을 가운데에 두고 연구하는 경우도 많다.
사실 위와 같은 논쟁은 한국의 민속학은 국문학의 보조학문으로 발전하면서 격화된 측면이 있다. 이 때문에 한국의 초기 인류학계에 민속학자들이 지대한 공헌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인류학자들은 민속학과 거리를 두고 싶어한다.[2] 그러나 오히려 민속학계에서는 이승수, 박환영, 강정원 등 인류학 학위를 가지고 있는 민속학자들이 늘어남에 따라 민속학을 인류학의 한 분과로 보자는 의견도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임재해, 한양명, 김종대 등 국문과 출신의 민속학자들이 아직 건재한 상황에서 무조건적으로 민속학이 인류학의 한 분과라고 우기기도 애매한 상황이긴 하다.
현재 한국연구재단의 학술연구분류에 따르면 민속학은 인류학의 하위분류로 지정되어 있다. 코드명은 A020504.
3. 역사
민속학은 독일의 근대화 과정에서 나타났다. 초기 민속학은 관습을 알아감으로써 백성들을 실정에 맞게 통치하려는 통치술의 한 분야로써 발전하였다. 하지만 독일이 독특한 근대화 과정에서 계층적 혹은 지역적 분화 대신에 여러 지역과 계층을 하나의 균질적 집단으로 묶어 통일을 이룩하려는 움직임이 강했다. 이는 그림 형제 등이 '민(Volk)'이라는 집단을 발명해내는 움직임을 만들었다. 이를 통하여 민속학은 전파론적 시각에서 여러 관습의 유래를 탐구했다.19세기 독일은 근대화가 진행되며 영국과 프랑스의 문물을 수입하였고, 이에 따라 국가정체성을 상실하였다는 탄식이 쏟아져 나왔다. 이 흐름에서 과거 독일의 공동체를 동경하는 낭만주의가 발생하였다. 이에 헤르더 등이 주도한 민속학은 독일의 민중과 그 관습을 이상화하는 낭만주의 민속학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경향은 나치가 득세할 때까지 이어졌고, 나치에 의하여 민속학은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한국 일본의 민속학이 중요시 여기는 기층문화에 대한 탐구는 이 시기의 독일 민속학자 한스 나우만에 의하여 발전되었다. 이러한 정치적인 이용이 이루어짐에 대한 각성으로 20세기 중엽에는 바우징어의 주도로 독일 민속학계는 경험문화학 혹은 유럽 인류학 등으로 이름을 바꾼다. 이에 따라서, 민속을 단순히 관습의 전승이 아니라 지역민들의 여러 이해관계가 얽혀 재창조되는 것으로 보는 "포클로리스무스"에 대한 연구가 깊이있게 진행되며, 기존의 민족주의 경향에서 탈피하였다.
4. 일본에서의 민속학
일본에서 민속학이라는 학문이 세워지는데 큰 영향을 미친 사회 조건은 2가지이다. 일단 에도 시대에 크게 발전하여 존황양이 운동가들의 사상적 기반이 된 국학자들이 있다. 에도 막부 체제에 불만을 품은 몇몇 무사들은 유교적 근왕사상에 따라 교토에 사실상 유폐되어 있는 천황과 공가들의 복권을 추진하는 한편, 고대 일본으로부터 전해내려오는 일본만의 풍토를 연구했다. 일본서기나 만엽집등 고서들을 연구하여 일본의 예술적 정서 '모노노아와레'의 개념을 정립하여 일본 고유의 정신세계를 굳건히 하고자 했다. 또한 고유 종교 신토에서 외래 종교 불교의 영향을 걷어내기 위해 신화와 각 지역 신사들의 전승이나 지방 전설들을 연구하였다. 이들의 사상과 이념은 일본 제국 성립에 공헌한 유신지사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하지만 현대 일본 민속학을 정립한 조건은 메이지 유신 이후 개항을 통해 급속히 이루어진 구미(歐美)권과의 접촉오로 인해 짧은 기간에 이룩한 산업화가 있다. 메이지 시대의 일본은 구미권과 상호교섭 과정에서 구미권 문화를 전방위로 도입했다. 그렇지만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본 내 문화에 대한 관심과 재평가를 해야 한다는 요구가 생겨났고 구미권과 다른 일본'만'이 지니는 문화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진행되었다. 그리고 1890년대를 기점으로 산업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이는 일본 내 도시화를 촉진시켰고 이는 곧 농촌 지역 이농화 현상에 불이 붙기 시작했음을 뜻한다. 농촌지역에 불어닥친 급격한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존 농촌지역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시대의 요구가 있었다.
구미권의 근대학문 체계를 공부해 온 엘리트층을 중심으로 이 같은 상황을 이해하는 학문 관점으로서 사회학, 인류학, 경제학 등 다양한 근대학문틀이 동원되는 가운데 영미권의 folklore 또는 독일의 volkskunde에 대한 관심 역시 생겼다. 일본민속학의 대부인 야나기타 구니오(柳田国男) 역시 초창기 농정관료였고 유럽 유학 도중 인류학, 사회학 등을 수학한 경함이 있음은 이 같은 상황을 반증한다. 오히려 앞선 조건들로 인해 민속학이 제도권으로 포섭되는 과정에서 국가에 복무하는 학문이 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고 여겨진다.
5. 민속학의 역사 및 현재 한국의 민속학 현황
한국의 민속학은 일본을 경유하여 들어왔다. 인권환 등은 민에 대한 실증적 연구가 모두 민속학임을 강조하며 실학을 민속학으로 보았다. 하지만 실학이 관습에 대하여 관심을 깊이 있게 가졌다기 보다는 그냥 농사에 관한 연구를 하다보니 자연히 관습을 조금 기록해두었다는 점을 볼 때 이는 지나친 비약이다. 따라서 한국의 민속학은 일본의 영향하에 태동했다고 보는 편이 자연스럽다.무라야마 지준, 아키바 다카시 등 일본 제국의 민속학자들[3]은 주로 경성제국대학에서 근무하였고, 조선총독부의 지시로 한국에서 여러 민속을 조사하였다.[4] 이에 반발하였건 혹은 동조하였건[5] 여러모로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은 송석하, 손진태 등이나, 국문학으로 출발해 민속학을 연구하고 일본 도쿄대학에서 문화인류학을 전공하여 복합적인 인류학이자 민속학을 해왔던 김택규 등이 현재 한국 민속학의 토대가 되었다.
또한 국문과에서 구비문학을 조사하기 위해 보다 실증적으로 지역 관습을 조사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를 위하여 많은 국문학자들이 민속학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민요를 조사한 임동권 축제를 연구한 김선풍 등이 이 시기 대표적인 민속학자이다. 이러한 학문적 발전을 통하여 민속학이라는 분과가 정규화되었고, 한국 민속학회, 비교민속학회, 역사민속학회 등 여러 학회들이 생겨났다. 이 영향으로 민속학과가 중앙대와 안동대에 개설[6]되었다. 중앙대의 경우 영국의 사회인류학을 공부한 박환영, 오스트리아의 민족학의 영향을 받은 스포츠인류학을 전공한 이승수, 야나기타로부터 비롯된 일국민속학의 흐름을 이어받은 쓰쿠바대학에서 공부를 한 임장혁 등 다양한 학문적 배경을 지닌 학자들이 민속학자로 활동하였다. 중앙대의 경우 13년도에 비교민속학과가 폐과되었고 중앙대 구조조정 잔혹사, 안동대 민속학과 역시 문화유산학과로 전공명을 바꾸고 커리큘럼을 조정하여 학부에서의 민속학 계보는 사실상 끝장났다.[7] 사실상 앞으로는 인접학문[8]에서의 세부전공 또는 대학원에서의 심화전공 정도로나 민속학을 접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1]
현대의 인류학은
제국주의 시대에 열강들이 식민지 통치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급성장하였다.
[2]
즉 메이저 학문으로서의 자존심 문제 때문
[3]
이능화와 같이 이와는 학맥을 달리 하는 학자들도 있다.
[4]
이러한 것은 식민지 통치를 원활하게 하기 위한 이해의 모습이라 제국주의시기에 팽창한 인류학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5]
반발인지 동조인지에 관하여서는 한국민속학계의 주요한 싸움거리들 중 하나이다.
[6]
개별 학과로서 개설된 것이 둘이고, 국문과 또는 문화인류학과 내에 전공으로 존재하는 학교들도 있다.
[7]
물론 전공명이 바뀌었어도 기존 민속학전공 교수들이 재직중인데다 기존 커리큘럼을 절반 이상은 가져가고 있긴 하여 당분간은 어느정도 유지가 될 것이다. 하지만 현 민속학 교수들 역시 정년이 많이 남지 않은 상황이고 이미 문화유산학과로 학과명을 바꾸며 정체성을 버린 이상 그 이후에는 민속학 전공 교수들의 진입이 쉽지 않을 것이며, 지역 대학의 추락으로 인하여 안그래도 장사 안되는 학과는 가차없이 버리고 있는 게 대학의 추세이니 현실적으로 계보는 끊겼다고 볼 수 있다.
[8]
국문학, 종교학, 인류학, 사학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