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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36:12

미하엘 초어크/선수 경력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미하엘 초어크

1. 개요
1.1.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1.1.1. 도르트문트에서 뛰는 꿈을 꾸다.1.1.2. 마침내 꿈의 구단에서 데뷔하다.1.1.3. 강등 위기의 도르트문트, 그리고 위기에서 팀을 구하는 초어크.1.1.4. 팀의 전성기를 이끌기 시작하는 초어크.1.1.5. 마침내 구단에서 첫 리그 우승, 그리고 리그 2연패를 달성하다.1.1.6.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승리하여 구단의 첫 빅 이어를 들다.1.1.7. 은퇴
1.2.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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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의 축구 선수 미하엘 초어크의 클럽 경력을 설명하는 문서.

1.1.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1.1.1. 도르트문트에서 뛰는 꿈을 꾸다.

1962년 8월 25일, 미하엘 초어크는 도르트문트에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 디터 초어크[1]는 뤼넨[2] 출신의 아마추어 축구선수였다. 초어크가 태어나고 시작된 1962-63 시즌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가 마지막으로 독일 챔피언십을 우승한것과, 처음으로 DFB-포칼 결승에 올랐던 시즌이었다. 초어크가 2살때 그의 아버지 디터는 에빙 린덴호르스트에 입단하였고 초어크도 자연스레 아버지를 따라 7살때부터 축구를 배우게 되었다. 에빙 린덴호르스트에서 축구를 시작한 이후 초어크는 그 지역에서 가장 촉망받는 선수로 떠오르게 되었다. 그러자 초어크는 그당시 도르트문트에서 제일 큰 축구팀인 BVB의 레이더망에 걸려 스카웃되었고, 그렇게 초어크는 1978년, 16세의 나이에 에빙 린덴호르스트를 떠나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유스 클럽으로 이적하였다.

1.1.2. 마침내 꿈의 구단에서 데뷔하다.

초어크는 어린 시절부터 BVB를 응원하던 소년이었다.[3] 그런데 BVB에 입단함으로써 어린 시절 내내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를 응원했던 지역 아이에게 꿈이 실현된 것이었다. 유스 팀에 합류한 이후로도 초어크는 입단 동기였던 랄프 로제[4]와 함께 하인츠 케프만의 지휘 아래 U-23 팀에서 일찌감치 두각을 나타내었다.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큰 기대를 받는 유망주 초어크와 로제는 순조롭게 월반하였고, 이 둘은 청소년 국대에도 소집되었다. 이후, 초어크가 18살의 나이에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에서 열린 1981 유럽 청소년 선수권 대회를 우승하였고, 그로부터 5개월 뒤에 열린 1981 U-20 월드컵에도 참가하여 우승을 차지하였다. 그 결과로 초어크는 실버볼, 로제는 실버슈까지 수상하면서 BVB의 감독인 브란코 제베츠에게 눈도장을 찍었고, 그렇게 둘은 BVB 1군으로 콜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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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83 시즌의 초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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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르크 선수와 악수를 나누는 초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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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어크의 첫 리그 경기이자 성인 팀 데뷔 경기는 1981년 10월 24일에 열린 11라운드 SV 베르더 브레멘 원정 경기였다. 이때는 초어크가 호주 U-18 월드컵에서 우승을 달성하고 돌아온지 고작 6일이 지난 뒤였는데, 서브 명단에 초어크의 이름을 올려졌다. 그리고 팀이 0-2로 끌려가던 후반 15분에 초어크는 베른트 클로츠와 교체되어 처음으로 리그 경기장을 누볐다. 비록 승부를 뒤집진 못했으나 초어크는 브란코 제베츠 감독에게 인상을 주는 것에 성공했다.

이후 후반기가 시작되자 바로 18라운드 1. FC 쾰른전에서 선발로 출전하였다. 초어크는 BVB 서포터들의 열렬한 응원을 배경으로 베스트팔렌슈타디온 데뷔를 현실로 이루어냈다. 초어크가 어릴 적 부터 그토록 고대 해왔던 꿈이 드디어 이뤄진 것이었다. 초어크는 브레멘전을 포함해서 측면과 중앙 미드필드 지역을 안가리며 선발로 출전하였다. 그 결과, 데뷔 시즌에 9경기를 뛸 수 있었는데, 데뷔전을 제외한 나머지 8경기를 전부 선발 출전으로 나서는 고무적인 성과를 달성해냈다.[5] 그리고 시즌중에 초어크는 고등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도르트문트 대학에 진학하여 경영학을 배우기도 하였다.[6]

뿐만 아니라 초어크는 독일연방군 체육진흥부대에서 군복무를 시작하였다.[7] 비록 초어크는 군복무에 학업까지 수행하고 있었던 유망주였다지만 그래도 전 시즌 보여준 폼때문인지 1982-83 시즌부터 제베츠의 후임 감독인 카를하인츠 펠트캄프에 의해 본 포지션인 수비형 미드필더뿐만 아니라 측면과 중앙까지 기용되면서 초어크는 사실상 미드필더 위치를 안가리는 주전이 되었다.

초어크의 컵 데뷔전은 1982년 8월 28일, DFB-포칼 1라운드 로트바이스 에센전이었다. 포칼에서도 3경기를 출장해서 전부 승리를 거두었으나, 초어크가 결장한 준결승전에서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는 SC 포르투나 쾰른에게 5-0으로 패하며 탈락하였다. 유럽대항전에서도 데뷔전을 치렀는데, 초어크는 UEFA컵에서 레인저스 FC를 상대로 선발로 출전하였다. 다만 홈에서 무승부를 거두고 원정에서 2-0으로 패하는 바람에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는 1라운드만에 탈락하였다.

그외에도 초어크는 주전이 올라섰던 1982-83 시즌부터 공격포인트를 달성하는것에 성공했다. 분데스리가의 경우 리그 12라운드에서 DSC 아르미니아 빌레펠트를 상대로 11-1이라는 점수도 크게 승리했을 때, 초어크는 교체로 출전하여 첫 어시스트도 달성하였고, 18라운드에서는 VfB 슈투트가르트전에서 동점골을 터뜨리며 커리어 첫 득점을 기록하였으나 팀은 후반에 실점을 허용하여 결국 패하였다. 하지만 그 다음 경기인 헤르타 BSC전에서는 정규 시간 4분을 남기고 극적인 결승골을 넣으며 동료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다만 팀 성적은 그닥 좋지 못해서 초어크를 주전으로 기용했던 펠트캄프 감독이 경질되고 헬무트 비테가 감독 대행으로 나서자 초어크는 리그 막바지에야 2경기를 출전할수 있었다. 그래도 20살에 불과한 어린 선수가 주전까지 꿰차는 활약을 했기 때문에 좋은 인상을 남길 수 있었다. 그래서 인지 이 무렵, 초어크는 '수지'((Susi)라는 애칭을 얻었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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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84 시즌 쾰른과 경기 중인 초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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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초어크가 주전으로 뛰는동안에 구단은 암흑기에 돌입하고 있었다. 1982년 9월,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라우발 회장이 사임하고 이사회에 공백이 생기며 830만 마르크의 빚을 지는 재정적인 위기를 겪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감독들[9]은 좋지 못한 성적을 거두게 되면 가차없이 경질되었고, 더욱더 팀의 부진을 초래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초어크는 첫 시즌에 30경기 5골이라는 활약을 했음에도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는 최종 순위에서 13위를 기록하며 좋지 못한 성적을 낸 채 시즌을 마감해야 했다.

와중에 초어크는 포지션의 변화를 겪기도 했었다. 시즌 전반기에는 본래 포지션인 수비형 미드필더로 출전했었지만, 시즌 중에 감독이 바뀌고 나서 출전한 15라운드 1.FC 쾰른과의 경기부터는 센터백이나 스위퍼로 경기를 뛰기도 하였다. 호르스트 프란츠 감독이 초어크를 보고 무슨 판단을 해서인지 랄프 로제가 본래 뛰던 포지션이던 스위퍼 자리에 초어크를 넣고 로제와 스위칭한 것이었다. 그래도 초어크는 수비수로 경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후반기에서 3골을 넣는 활약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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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85 시즌 베르더 브레멘 경기에서의 초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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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85 시즌에는 초어크가 30경기 8골을 넣었다. 저번 시즌때와 똑같이 새감독인 티모 코니츠카도 초어크를 랄프 로제와 함께 미드필더와 수비수로 번갈아 출전 시켰고, 부진을 거듭하자 경질되며 라인하르트 자프티히가 임시 감독으로 팀을 재정비한 후 다시 에리히 리베크가 새 감독으로 부임하여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는 최종전에서 우승에 도전했던 SV 베르더 브레멘에 2-0 승리를 거두며 가까스로 14위로 분데스리가에 잔류했다.[10] 여담으로 에리히 리베크 감독은 초어크와 로제를 지휘하면서 이 둘이 팀의 미래를 이끌 유망한 선수라고 칭찬하였다.

1.1.3. 강등 위기의 도르트문트, 그리고 위기에서 팀을 구하는 초어크.

1985-86 시즌에는 초어크가 처음으로 34경기를 뛰며 분데스리가 전 경기 출전을 달성하였다. 재정적으로 불안한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는 전력 보강을 할 수 없었기에 그 사이에 초어크와 로제가 아예 팀의 핵심으로 우뚝 선것이었다. 체르너이 팔 감독의 깊은 신뢰를 받은 초어크는 먼저 초반 13라운드까지는 스위퍼라는 포지션으로 1골을 넣었지만, 14라운드인 FC 바이에른 뮌헨과의 경기에서부터는 측면 미드필더로 출전하였다. 그 후에는 측면 또는 홀딩에 위치하면서도 20경기 9골을 넣는 맹활약을 펼쳤고 종합 34경기 10골로 시즌을 마치며 개인으로서는 아주 좋은 활약을 펼쳤으나,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는 전 시즌보다 더욱 부진했고 급기야 VfB 슈투트가르트 원정에서 4-0으로 참패하며 체르너이 팔 감독이 경질되었고, 라인하르트 자프티히 코치가 다시 감독 대행으로 팀을 이끌어야 했다. 남은 2경기에서 레비어 더비를 무승부로, 하노버 96 원정에서 4-1로 승리를 거두었으나, 최종 순위는 변함없이 16위로 마치며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는 결국 SC 포르투나 쾰른과 강등 플레이오프를 치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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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의 핵심으로 성장한 초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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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등이 걸린 외나무다리에서 포르투나 쾰른을 만난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는 1차전을 포르투나 쾰른 원정으로 시작해야 했다. 44,000 명의 포르투나 쾰른 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는 맥없이 0-2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본래 랄프 로제가 이 시즌 수비의 핵이었으나 심각한 부진에 시달리던 시기라서 자프티히 감독 대행은 그를 기용하지 않았으나, 포르투나 쾰른 원정에서 간만에 랄프 로제 카드를 사용했다가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급해진 자프티히 감독은 이후 홈에서 열린 2차전에서 결국 랄프 로제를 외면하였다. 하지만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선수들은 여전히 엄청난 압박감을 받고 있었다. 이로 인해 지나치게 긴장했었던 여파일까 결국 전반 14분, 포르투나 쾰른에게 선제골까지 실점 당하며 0-3으로 뒤지게 되었다. 이제는 3골을 못넣으면 그대로 강등직행에 놓여진 상황, 그러나 후반에 53분에 팀동료인 잉고 안더브루게가 상대 페널티 박스 진영에서 논란의 파울을 얻어내었고, 주심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게 PK를 선언하였고 이 페널티 킥을 초어크가 차게 되었다. 초어크는 감독, 코치, 팀동료들과 서포터들의 주목을 받으며 침착하게 공을 찼고 공은 빠른 속도로 날아가 골망의 오른쪽 구석을 흔들었다. 초크르가 득점에 성공하면서 추격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것이었다. 순식간에 분위기는 바뀌었고 기세는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게로 넘어왔다. 이후 후반에 1골을 더 넣는데는 성공 했으나 종료 직전까지 승부를 원점으로 돌릴 수 있는 득점은 아직 나오지 않아 조마조마했던 순간이였다. 그리고 정규시간이 끝났을 때 위르겐 베크만의 기적적인 추가시간 득점으로 스코어를 3-3으로 맞추며 간신히 재경기로 끌고 갔다.[11] 그리고 중립 구장에서 재경기가 치러졌다. 초어크는 멀티골을 넣고 1개의 도움을 성공시키면서 도르트문트의 8-0 대승에 공헌을 하였다. 그렇게 BVB는 강등 위기로부터 가까스로 생존에 성공했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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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금 돌풍을 일으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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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87 시즌은 라인하르트 자프티히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정식 감독이 되었다. 초어크의 동기인 랄프 로제는 전 시즌에 보여준 최악의 폼으로 인해 자프티히의 눈밖에 나 자리를 잃었고, 결국 2부 리그에 있는 로트바이스 오버하우젠으로 이적하였다. 대신해서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는 프랑크 밀, 노르베르트 디켈, 토마스 헬메르를 영입하며 전력을 보강했다. 여기에 더해 초어크는 32경기 14골이라는 맹활약을 펼쳤는데, 공격수였던 밀과 디켈이 각각 20골, 17골을 기록한것에 대해 수비형 미드필더로만 뛰던 초어크가 3번째로 많은 득점을 했다는 점에서 그가 얼마나 대단한 활약인지를 알 수 있다. 이후 라인하르트 자프티히 감독 아래 전년도 16위에 강등에서 겨우 탈출했었던 팀은 초어크의 활약에 힘입어 분데스리가 4위로 시즌을 마치며 UEFA컵에 진출권을 획득했다.
파일:1987-88 시즌의 초어크.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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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르트문트 그 자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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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어크의 활약은 단발성이 아니었다. 그 다음 시즌인 1987-88 시즌에도 초어크는 분데스리가 23경기 13골[13]을 기록하며 하드캐리를 한 반면, 밀과 디켈은 전 시즌과 달리 부진하여 한자릿수 득점에 그치고 말았다. 초어크가 10라운드까지 10경기 4골을 넣었다가 부상으로 잠시 이탈했었는데, 그 사이에 도르트문트는 11경기동안 겨우 2승을 거두는 행보를 보였다. 그래서 초어크가 복귀하고 나서야 다시 팀은 반등했고 도르트문트는 리그 13위에 안착했다.

1.1.4. 팀의 전성기를 이끌기 시작하는 초어크.

1988-89 시즌을 앞두고는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의 유망주 안드레아스 묄러, FC 바이에른 뮌헨 미하엘 루메니게가 입단했다. 초어크의 활약은 그의 영향력을 확대시켰고, 그를 대단히 신임했던 자프티히 감독은 이때문에 시즌 초 주장 임명에 대해서 클럽 이사회와 불화를 겪었다. 이사회는 기존의 주장이였던 프랑크 밀의 유임을 선호했던 반면, 자프티히 감독은 미하엘 초어크가 주장이 되기를 선호했기 때문이었다. 의견이 좁혀지지 않아 자프티히 감독이 사임하여 호르스트 쾨펠이 감독이 되었다. 리그에서는 7위로 마무리했으나 DFB 포칼에서 초어크는 1라운드부터 준결승까지 4경기 연속으로 득점을 성공시키며 팀을 결승까지 견인하였다. 덕분에 쾨펠 감독에게도 신임을 받는 초어크를 보며 이사회도 시즌 중반이 돼서야 주장 승계를 수락하였고 마침내 초어크는 BVB의 주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결승전에서도 풀타임 출전하여 비록 득점은 하지 못했으나 BVB는 베르더 브레멘을 4-1로 꺾고 클럽 역사상 두 번째 DFB-포칼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주장이자 팀내에서 유일하게 도르트문트 출신이였던 초어크가 가장 먼저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파일:초어크의 첫 우승.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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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89 DFB-포칼 우승 후 트로피를 들어올리는 초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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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어크는 이후 우승 축하 연회에서 매우 특별한 영광을 얻기도 했다.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레전드 선수인 헤르베르트 잔트만(Herbert Sandmann)으로부터 BVB 명예 반지를 건네받았는데, 잔트만은 초어크에게 이 반지를 주면서 "네가 가져가라. 너는 최선을 다했고, 너는 BVB의 미래다. "라는 말을 하자 그제서야 초어크는 이 우승의 중요성을 제대로 평가하고 이해할 수 있었다.
파일:1989-90 시즌 카를스루어 경기에서의 초어크.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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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스루어와의 경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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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90 시즌 개막 직전 초어크는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주장 완장을 달고 분데스리가 챔피언인 FC 바이에른 뮌헨 DFL-슈퍼컵 단판 승부를 벌였고, 난타전 끝에 도르트문트가 4-3으로 간신히 이기면서 초어크는 구단과 함께 사상 첫 슈퍼컵 우승과 더블을 달성하였다. 리그도 4위로 마치면서 UEFA컵 진출에는 성공했지만 DFB-포칼에서는 1라운드만에 탈락, 처음 참가한 UEFA 컵위너스컵에서도 해당 대회 우승팀인 UC 삼프도리아를 만나면서 패하여 탈락했다. 이것이 초어크의 마지막 컵위너스컵 대회였다.
파일:1990-91 시즌 초어크.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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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를 바라보는 초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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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91 시즌 초어크의 최종 성적은 30경기 5골로 나쁘지 않았지만 팀은 다시 리그 10위로 내려앉았다. DFB-포칼 1라운드에서는 SpVgg 그로이터 퓌르트를 만나 동점골을 어시스트하였으나 팀은 3:1로 패하여 탈락했다.[14] 이어 UEFA컵에서는 1라운드 켐니처 FC와의 2차전부터 출전하였고 무난히 2-0으로 승리를 거둔 후에 2라운드로 진출하였다. 다음 상대는 루마니아의 CS 우니베르시타테아 크라이오바였고, 초어크는 1차전에서 선제 득점을 기록, 어시스트로 팀의 추가골을 도우며 3-0으로 승리하였고, 2차전에서도 초어크가 연속으로 득점하면서 종합 4-0으로 이기며 16강 진출에 성공하였으나, 16강 상대인 RSC 안데를레흐트 원정을 가서 1-0으로 패하였고, 2차전에서 초어크는 결장했으나 팀은 2-1 승리를 거두었다. 다만 원정 다득점으로 인해 도르트문트는 탈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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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을 바라보는 초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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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92 시즌부터 초어크의 입지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30대의 나이로 접어들기 시작한것도 있지만, 초어크를 중용하던 쾨펠 감독이 성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감독 자리에 물러났다. 쾨펠 감독의 후임은 스위스에서 온 오트마어 히츠펠트라는 감독이었다. 그는 그라스호퍼 클럽 취리히를 이끌며 더블을 달성하는등 떠오르는 감독으로 명성을 얻기 시작하자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서 새 감독으로 내정하고 그를 데려오게 된 것이었다. 여기에 스테판 샤퓌자라는 스위스 특급 공격수도 합류하였다. 감독이 바뀌었으나, 히츠펠트 감독도 여타 전 감독들이 그랬듯 초어크를 크게 신뢰하였다. 그래서 초어크는 주장직을 유지 한 채 19경기에 출전하여 6골을 넣으며 좋은 활약을 선보이기도 하였다. 초어크는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서 선수 생활을 하면서 처음으로 우승 경쟁을 경험하였다. 팀은 VfB 슈투트가르트에게 골득실에 뒤져 안타깝게도 분데스리가 준우승에 그치고 말았다. 하지만 구단은 점차 위닝 멘탈리티가 새겨지기 시작했으며, 초어크는 선수 생활 처음으로 A매치에 소집되는 기회를 부여 받았다.

1992-93 시즌, 초어크는 리그에서 10골 5도움을 기록하며 데뷔이래 가장 많은 공격 포인트를 쌓을 수 있었다. 덕분에 초어크의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는 리그에서 4위라는 좋은 성적을 거뒀다. 또한 전 시즌 리그 준우승 팀 자격으로 참가한 UEFA컵에서도 결승까지 진출했다. 여기서 초어크는 플로리아나 FC, 셀틱 FC, 레알 사라고사, AJ 오세르를 상대로 골을 넣으면서 활약을 하였고,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를 결승까지 이끌었다. 결승전 상대는 유벤투스 FC였는데, 이 팀에는 한때 초어크의 팀 동료였다가 유벤투스로 이적한 안드레아스 묄러가 있었다. 초어크는 묄러와 결승전에서 조우하며 호기롭게 대결을 하였지만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는 유벤투스에게 무참히 패배하였고, 초어크는 또 다시 준우승의 아픔을 삼켜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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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94 시즌의 초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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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94 시즌에도 리그 7골을 기록하면서 초어크의 활약은 여전했다. 여기에 카를하인츠 리들레 마티아스 자머의 합류로 한층 더 강력해진 도르트문트는 UEFA컵에서 준결승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했지만, 또 유벤투스 FC를 만나 탈락하고 말았다. 리그는 2연속 4위로 마감하였다. 하지만 시즌이 끝나고 안드레아스 묄러가 도르트문트로 복귀하면서 마침내 구단의 전성기가 도래하게 되었다.

1.1.5. 마침내 구단에서 첫 리그 우승, 그리고 리그 2연패를 달성하다.

1994-95 시즌과 1995-96 시즌,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는 분데스리가 2연패를 달성하였다. 이때 초어크는 각각 두 시즌 동안 가장 많은 득점을 기록하며 2연속으로 팀내 최다 득점자로써 우승에 큰 공헌을 하였는데, 자세히 살펴보자면 1994-95 시즌에는 초어크가 33경기를 출전하였고, 그중에 선발 30경기를 풀타임으로 뛰면서 15골 2도움을 기록하였다. 1995-96 시즌에는 전 시즌보다 출전 경기수가 3경기 적었던 30경기를 출전하였고, 그중에 선발은 27경기였으며 23경기를 풀타임, 3경기를 교체로 뛰면서 15골 3도움을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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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95 시즌 우승을 확정하며 32년만의 우승에 감격하여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미하엘 초어크와 이브라힘 탄코, 안드레아스 묄러
파일:1995-96 시즌 2연패를 달성하고 마이스터샬레를 들고있는 미하엘 초어크.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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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96 시즌 리그 2연패를 달성하고 트로피를 들고있는 미하엘 초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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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활약에 대해서 특기 할 만한 점이 있다면, 당장 초어크의 포지션이 수비형 미드필더라는 포지션이었다. 그중에서 초어크는 홀딩 미드필더로 분류되는 선수였는데, 이 포지션은 경기장에서 주로 후방에 위치 해야 하는 특성을 가졌기 때문에 득점을 하더라도 1~2골에 그치거나 무득점으로 시즌을 마감하는게 일반적이다.[15] 그런데 초어크는 포메이션의 후방을 지키는 임무를 맡고도 팀내 공격수인 스테판 샤퓌자 카를하인츠 리들레의 골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득점을 기록한 것이다.[16] 물론 1994-95 시즌때는 페널티 킥 비중이 어느정도 있었지만 1995-96 시즌에는 15골중에 페널티 킥으로 득점한게 1개에 불과하며 우승 경쟁팀인 FC 바이에른 뮌헨을 상대로 쐐기골을 터뜨리거나 레비어 더비 라이벌인 FC 샬케 04와의 경기에서 역전골을 터뜨리는 등, 아주 순도 높은 활약도 하였다. 심지어 나이도 서른을 넘긴 선수인데 전체적인 양상을 보면 공격수들이 죄다 부진하고 오히려 후방에서 뛰는 전성기도 지난 선수가 득점을 터뜨리며 팀을 우승까지 견인 시킨 꼴이였다. 물론 이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리그 우승을 차지 했던 이 두 시즌때는 하필 주축 공격수들이 장기간 부상을 당했었고, 라르스 리켄과 이브라힘 탄코같은 젊은 선수들도 있었지만 그다지 많은 득점을 기록하지 못하였다. 때문에 미하엘 초어크가 공격 가담을 넘어서 주도하는 작업을 수행해야 했으며, 그 결과로 초어크의 선수 생활 커리어 중에 가장 좋은 퍼포먼스를 펼칠 수 있었다.

1995-96 시즌에 처음 참가한 챔스에서도 조별 리그에서 도르트문트와 유벤투스가 재회하였고, UEFA컵에서 유벤투스에게 두 번이나 탈락했던 경험을 잊지 않았던 초어크는 유벤투스 원정에서 선제골을 넣으며 챔스 첫 득점으로 복수의 성공과 승리의 축포를 터뜨렸다.

1.1.6.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승리하여 구단의 첫 빅 이어를 들다.

1996-97 시즌을 앞두고 초어크와 동포지션 선수인 파울루 소자 폴 램버트가 각각 유벤투스, 머더웰로부터 이적해왔다. 초어크는 이 젊은 선수들과 포지션 경쟁을 해야하는 상황에 놓였으나 문제는 초어크의 나이가 이미 34세로 접어들었고, 노쇠화의 영향으로 리그 선발 출전 횟수가 점차 줄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초어크는 자신이 선수 생활의 황혼기에 놓여있음에도 불구하고 출전 기회가 줄어든다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 게다가 그동안 염원했던 리그 우승은 이미 자신의 뛰어난 활약을 통해서 2연속으로 이뤄냈고, 이제 나이도 있는 지라 시즌 개막전에 함부르크 SV를 포함한 복수의 분데스리가 구단과 일본 J리그에서 온 제안들을 생각해봤으나 초어크는 깊은 고민 끝에 결국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잔류를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초어크는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서 여전히 모습을 볼수 있었고, 이 시즌에 리그에서 7골을 넣으며 여전한 모습을 보여줬다. 1996-97 시즌에 참가한 챔스에서도 초어크는 조별리그 전경기에 선발 출전하였다. 다만 토너먼트 이후부터는 파울루 소자에게 주전을 내주며 주로 선발이 아닌 교체투입으로만 출전하였다. 그러던 와중에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는 마침내 결승전까지 진출하며 역사를 써내려가는 중이었다.

이에 관련하여 재밌는 일화가 있었다. 당시 오트마어 히츠펠트 감독은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유벤투스 FC를 상대할 선발 멤버로 여전히 초어크를 쓸 생각이 없었다. 물론 초어크의 폼이 안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노장인데다가 파울루 소자가 이미 제몫을 해주고 있기 때문이였다. 하지만 카를하인츠 리들레의 멀티골이 터졌고, 라르스 리켄가 쐐기골을 박으며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우승이 거의 직전에 다다르자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서포터는 초어크의 별명인 수지를 연호 하기 시작했다. 또한 초어크 대신 주장 완장을 차고 선발로 나섰던 마티아스 자머가 팀의 우승을 직감했는지 히츠펠트 감독에게 다가가 남은 시간만이라도 초어크를 결승전 무대에 뛰게 해 달라고 설득하였다. 물론 히츠펠트도 초어크의 헌신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팀의 역사를 함께할 자격이 있다는 걸 이해하고 있었지만 혹시 라도 방심은 금물이었기에 교체 투입을 가볍게 생각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결승전에서 카를하인츠 리들레의 두번째 득점과 라르스 리켄의 쐐기 득점에 어시를 기록하며 크게 활약한 안드레아스 묄러까지도 자머의 의견에 힘을 보태며 마찬가지로 히츠펠트한테 본인을 빼서라도 초어크를 교체 투입 해 달라는 말까지 하였다. 이처럼 서포터와 선수들의 성화에 못이긴 히츠펠트는 결국 자의반 타의반으로 3-1로 리드하던 상황에서 정규 시간이 1분남은 후반 44분이 돼서야 초어크의 투입을 결정하였고, 마침내 결승전의 무대인 올림피아슈타디온 뮌헨에서 초어크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챔피언스리그 유니폼을 입고 선수들의 격려와 함께 잔디를 밟으면서 서포터들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이후 초어크가 뛰는 동안에는 다행히 더 이상의 실점은 없었으며, 얼마안가 경기 종료를 알리는 심판의 휘슬이 울리자 초어크는 선수 생활 처음으로 출전한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역사상 첫 챔스 우승을 달성했다는 것을 생생하게 온몸의 피부로 느끼기 시작했다.

초어크로서는 정말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비록 초어크는 BVB가 챔스 결승전에 오기까지 본인이 선발로 출전한 횟수가 적었다해도 그동안 자신이 겪었던 수많은 경험 들을 바탕으로 팀을 하나로 단합하는 큰 공헌을 하였으며, 이것을 기점으로 팀 상승세의 원동력이 되었기에 이 챔스 우승에는 초어크의 지분도 매우 크다고 보면 된다. 과거, 10년전만에도 강등 탈출을 위해 사투를 벌였던 풋내기 유망주인 그가 이제는 BVB의 주장으로서 DFB-포칼, 마이스터샬레를 당당히 들어 올렸고, 선수 생활 막바지에 빅 이어까지 들게 되었으니, 마침내, 초어크는 선수 커리어의 정점을 찍으며 보답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파일:빅 이어와 초어크.jpg 파일:빅 이어를 들고 웃는 정장차림의 초어크.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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챔스 우승을 달성한 초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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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은퇴

1997-98 시즌이 미하엘 초어크의 마지막 시즌이었으나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는 최악의 부진으로 스타트를 하게 되었다. 보드진은 히츠펠트 감독을 스포츠 디렉트로 올려보내며 사실상 실권을 빼앗았고, 네비오 스칼라를 선임했다. 문제는 네비오 스칼라가 3-5-2 포지션을 운용하는 감독이었는데, 이러면 홀딩 미드필더의 역할이 축소되기 때문에 초어크가 뛸 자리가 없게 된다. 그래서 초어크는 리그에서 겨우 22경기만을 출전하였고, 그중에서도 벤치에서 시작하거나 아예 명단에서 제외되는일이 부지기수였다. 결국 스칼라 감독이 똥볼만 찬 끝에 한때는 도르트문트가 강등권까지 몰리며 위기에 처했었지만 시즌이 중반을 지나갈때 쯤에야 다시 안정되었고 그렇게 도르트문트는 계속 중위권을 유지하였다.

이듬해에 챔피언스리그 우승 자격으로 참가한 인터컨티넨탈컵에서도 크루제이루 EC를 상대로 초어크가 선제골을 넣으며 도르트문트에게 우승[17]을 가져다 주었다.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는 1997-98 분데스리가 최종 순위 10위로 마쳤고 초어크의 마지막 시즌은 리그 22경기 출장으로 마무리 되었다. 챔피언스리그에서도 교체 출전으로나마 8경기를 뛰었고, 8강에서 FC 바이에른 뮌헨을 잡고 준결승 진출에 성공하였다. 비록 준결승전에서는 레알 마드리드 CF에게 2-0으로 패하며 2연속 우승에는 실패했지만 미하엘 초어크로서는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는 시즌이었다. 시즌이 끝나고 초어크는 현역 생활을 마무리 하였다.

1981년과 1998년 사이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소속으로 463 분데스리가 경기에 출전, 특히 말년에 다다르고 나서야 우승커리어에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 기간동안 주장으로 활약하며 서포터의 큰 지지를 받았다. 초어크는 총 17시즌중에 7시즌을 후방에 뛰면서 두자릿 수 이상 득점하는 것에 성공하였다. 그가 가진 뛰어난 페널티 킥 실력과 중요할 때 터뜨리는 한방, 그리고 몰아치듯 터뜨리는 득점포 덕에 한때 클럽 역대 최다 득점자 명단에서 2위에 랭크된 적이 있었다.

14년이라는 세월을 구단에 있었고 그러는 동안 초어크가 거쳐간 감독은 13명이었다. 선배들은 이적하거나 은퇴했으며, 입단 동기가 BVB를 떠나는 동안에도 흔들리지 않는 바위처럼 긴 시간을 팀에게 바치며 암흑기를 묵묵히 버텼던 초어크가 끝내 구단의 전성기를 이룩했으니 가히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레전드중의 레전드라 찬사 받을만한 인물이었다.

1.2.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초어크는 18살의 나이로 청소년 국대에 소집되어 1981년 U-18 유럽 챔피언십에 참가한 것이 시작이었다. 비록 여기서는 벤치를 지켰지만 초어크의 도르트문트 유스 입단 동기인 랄프 로제와 함께 도르트문트에서 제일 촉망 받는 유망주였던 초어크는 1981년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전경기를 출전하였고, 우승을 달성해냈다. 그러나 그가 도르트문트의 핵심 선수로 뛰었음에도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소속으로 어느 국제 대회에도 출전하지 못하였다.
파일:청소년 국대에 소집된 초어크.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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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살의 초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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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1981년 청소년 국대 시절의 랄프 로제(왼쪽)과 미하엘 초어크(오른쪽).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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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청소년 국대 시절의 랄프 로제(왼쪽)과 미하엘 초어크(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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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990년 12월 19일 28세의 나이에 4-0으로 승리했던 스위스전에서 처음으로 국가대표에 소집되었으나, 출전하지 못했다. 1992년 12월 16일, 29세의 나이에 1-3으로 패했던 브라질전에서 후반 14분에 교체 투입하여 처음으로 출전하였다. 등번호는 2번이었다.
파일:1993년 국대에서의 초어크.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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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국대에서의 초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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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년 12월 20일[18]에 열린 우루과이전에서는 처음으로 선발로 나섰으며 풀타임 출전하여 4-1 승리에 일조하였다. 비록 본 포지션이 아닌 레프트백으로 뛰었지만 초어크는 익숙지 않은 포지션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다음해인 1993년 3월 24일에 열린 스코틀랜드전에서는 중앙 미드필더로 선발 출전하였다. 동년 4월 14일 가나전에서도 중앙 미드필더로 선발 출전했으며 이때부터 등번호를 2번에서 변경하여 8번을 달고 경기를 뛰었다. 특히 이 경기에서의 6번째골 장면때는 초어크의 킬패스를 기점으로 득점이 터지기도 하였다.
파일:공중볼 경합하는 초어크.jpg 파일:우루과이전 첫 선발 출전하는 초어크.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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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루과이전 당시 초어크의 모습[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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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93 시즌이 종료된 후에 미국에서 US컵이 개최되었다. 미국, 브라질, 잉글랜드, 독일이 참가했으며 여기서 초어크는 브라질과의 첫 경기에도 선발로 출전하였다. 그러나 독일이 브라질에게 선취점으로 3점이나 내준 이후로는 초어크는 후반 9분에 토마스 슈트룬츠와 교체되었다. 이 때문인지 미국전에서는 벤치를 지켰으며 잉글랜드와의 최종전에서는 후반 21분이 돼서야 교체로 출전하였다. US컵을 우승했다지만 초어크로서는 미래가 어두웠다. 이후 1993년 10월 13일, 5-0으로 이겼던 우루과이전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국대에 소집되지 못했다. 도르트문트에서는 많은 경기를 출전했지만 국가대표를 친선 7경기가 전부였으며 종합 386분만을 뛰었다.[20]

초어크가 국대에 자리 잡지 못한 이유로는 일단 첫번째로 1982년 월드컵 당시에는 1960년생 피에르 리트바르스키나 1961년생 로타어 마테우스같이 초특급 유망주가 아니고서는 1962년생인 초어크가 끼어들 자리가 없었다. 1984년 유로때는 같은 청소년 국대 동기인 랄프 팔켄마이어가 대회에 참가하였으나, 그도 1경기를 뛰지 못했고, 팔켄마이어를 제외한 나머지들은 아예 소집조차 되지못했다. 그러는 사이 토마스 베르톨트 올라프 톤, 안드레아스 묄러, 토마스 헤슬러같은 후배들이 치고올라오니 중하위권을 전전하는 팀에서 고군분투하는 초어크가 국대에서 멀어지게 되는건 당연지사. 결국 도르트문트가 분데스리가에서 경쟁력이 있는 구단이 될 때서야 국가대표로 경기에 뛸 수 있었다. 그렇다고 레귤러 멤버로 소집되기에는 이미 초어크의 나이가 30세를 넘어 노쇠해졌으니, 초어크에게는 무척 아쉬운 커리어라고 볼 수 있다.[21]


[1] 1939년생 [2] 도르트문트 북쪽에 위치한 도시 [3] 초어크는 도르트문트 교외에 위치한 에핑(Eving)에서 자랐다. 그래서 언젠가 BVB를 위해 뛰는 것을 꿈꿨다고 한다. [4] 독일어로 Ralf Loose, 1963년 1월 5일생으로 리베로로 활동하던 선수였다. 초어크와 마찬가지로 도르트문트 출신 에다가 도르트문트의 지역 축구단인 도르트스펠터 SC 09에서 축구를 시작했다는 공통된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랄프 로제 또한 또래들 사이에서 뛰어난 축구 실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당시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청소년 팀 감독 하인츠 케프만의 눈에 띄었고, 그렇게 초어크와 함께 BVB에 입단하게 되었다. 여기에 더해 로제는 초어크와 더불어 청소년 국대 에서 소집된 유이한 BVB 선수였다. 심지어 1981년 U-18 유럽 챔피언십 때부터는 주장 완장을 달기도 하였다. 이후 호주에서 열린 U-20 월드컵에서도 참가하여 홀로 4골을 터뜨리며 조국을 우승으로 이끈 이력이 있었다. 랄프 로제는 190cm에 달하는 건장한 신체를 가졌었고, 당시 BVB의 감독이였던 에리히 리베크 감독으로부터 재능을 칭찬 받는등, 미래에 초어크와 함께 BVB를 이끌어갈 차세대 재목으로 평가되는 선수였다. 특히 로제는 초어크보다 더 높은 기대를 받았으나, 문제는 주력과 민첩성이 느리다는 단점이 컸다는 것 인데 결국 로제는 이를 극복하지 못하였고 성장이 정체되어 다섯 시즌 만에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를 떠나 하부 리그로 이적을 했었다가 포르투나 뒤셀도르프에서 다시 재기하여 분데스리가에서 3시즌을 뛴 후, 당시 3부 리그였던 FSV 프랑크푸르트로 이적하여 1시즌을 더 뛰고 30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은퇴하였다. [5] 입단 동기인 랄프 로제보다 데뷔가 빨랐지만 로제는 이후 19경기를 출전하였다. [6] 다만 초어크는 4학기까지 마친 후 대학을 자퇴하였다. [7] 독일은 징병제 국가였기 때문에 축구 선수도 군복무를 해야했다. [8] 팀 동료였던 롤프 뤼스만에 의해 붙여졌다. [9] 카를하인츠 펠트캄프, 헬무트 비테, 한스디테르 티펜하우어 [10] 최종전에서 비겼을 경우 16위는 DSC 아르미니아 빌레펠트가 아닌 도르트문트의 몫이었다. 빌레펠트는 그 해 플레이오프에서 1. FC 자르브뤼켄을 상대로 패하여 강등을 당했다. [11] 원정다득점 규정이 당시에는 적용되지 않은 점이 천만다행이었다. [12] 초어크는 2016년에 "만약 자신이 페널티 킥을 놓쳐 패했다면 우리는 아마도 강등되었을 것이고,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역사가 어떻게 되었을지 누가 알겠는가" 라고 당시를 회고하였다. [13] 바이어 05 위어딩겐을 상대로 4골을 넣기도 했다. [14] 심지어 퓌르트는 경기 시작 2분만에 수비수 한 명이 퇴장 당하며 수적으로 열세였음에도 도르트문트를 이겼다. [15] 물론 예외도 간혹 나온다. 초어크와 동갑인 프랑크 레이카르트가 대표적인 예시라고 볼 수 있다. [16] 샤퓌자는 1994-95 시즌 12골, 1995-96 시즌 3골을 넣었고 리들레는 1994-95 시즌 6골, 1995-96 시즌 7골을 넣음. [17] 2-0으로 BVB가 승리하였다. [18] 마침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창단일과 하루 차이다. [19] 선발 멤버들 대다수가 국대 레귤러 멤버들이다. 뒷줄 왼쪽부터 시계 방향대로 위르겐 콜러, 안드레아스 쾨프케, 토마스 헬머, 기도 부흐발트, 초어크, 위르겐 클린스만, 로타어 마테우스, 안드레아스 묄러, 올라프 톤, 토마스 헤슬러, 토마스 돌 [20] 참고로 초어크가 출전한 7경기를 모두 뛴 선수로는 기도 부흐발트, 로타어 마테우스, 위르겐 클린스만 이 3명이 유일하다. 전부 1990 이탈리아 월드컵 우승 멤버면서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 경험이 없는 것이 특징. [21] 반면 초어크의 파트너였던 마테우스는 초어크가 첫 경기를 뛰던 시점에 이미 A매치를 109경기 뛰었었고, 초어크가 1993년 이후로 국가대표로 뽑히지 않을 때도 마테우스는 꾸준히 국대 경기에 호출되어 2000년에 은퇴할 때 까지 뛰었다. 이런 마테우스의 나이는 초어크보다 무려 1살이 더 많다는 걸 감안하면 정말 대단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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