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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09 01:36:30

미시아

1. 튀르키예의 옛 지명
1.1. 역사 : 파르나케스 왕조
2. 인명

1. 튀르키예의 옛 지명

파일:아나톨리아 터키_white.png 아나톨리아 고대 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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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튀르키예 아나톨리아.jpg

그리스어 Μυσία
라틴어 Mysia
튀르키예어 Misya

아나톨리아 반도 서북부의 고대 지명. 현 튀르키예 발르케시르 도와 부르사 도의 사부, 이즈미르 도와 마니사 도의 북부에 해당한다. 주요 도시 / 유적으로 발르케시르, 반드르마 (키지코스), 베르가마 ( 페르가몬), 에르길리 (다스킬레온), 아이발르크, 소마 등이 있다. 다만 페르가몬, 아이발르크 일대는 더 세분화하여 아이올리아[1]지역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페르시아 제국기 일대는 소프리기아 혹은 프리기아 헬레스폰트 사트라피에 편성되었고, 아케메네스 제국 황실의 방계인 파르나케스 왕조가 대를 이어 사트라프 직을 세습하였다. 로마 제국기에는 아시아 속주에 편성되었다가 4세기 들어 헬레스폰트 속주로 편성되었다. 13세기 말에는 튀르크계 카라시 왕조가 들어섰으나 14세기 중반 오스만 제국에게 정복되었다.

1.1. 역사 : 파르나케스 왕조

파일:튀르키예 미시아.jpg

파르나바조스 2세의 헬라식 주화

페르시아 제국기 헬레스폰트 프리기아 (소프리기아) 사트라피에 편성되었고, 키루스 대왕의 6촌이자 다리우스 1세의 숙부인 파르나케스 1세가 사트라프로 봉해져 그 후손들이 세습하였다. 이러한 파르나케스 왕조의 사트라프들은 아케메네스 제국 황실의 방계로서 중용되었고, 아르타바조스 1세는 그리스 침공과 이집트 반란 진압 등 활약하였다. 후자의 증손자 파르나바조스 2세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의 딸 아파마와 결혼하였다. 또한 그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스파르타 아테네에 대한 승리를 도왔고, 아게실라오스 2세의 소아시아 원정 시에는 수도 다스켈리온 포위를 이겨내고 그와 직접 만나 휴전을 성사시켰다. 이후 아테네를 도와 코린토스 전쟁에 참전한 파르나바조스 2세는 페르시아 함대를 이끌고 크니도스 해전에서 스파르타 함대를 격파, 에게해 해상권을 되찾은 후 펠로폰네소스 반도 남해안을 습격했으며 스파르타 앞바다에 수비대까지 배치하였다.

파르나바조스 2세는 또한 아테네와 외항 피레우스 간의 성벽을 재건하였고, 재건된 아테네 해군에 밀려난 스파르타는 기원전 386년 페르시아와 안탈키다스 평화 조약을 맺고 이오니아를 포기하였다. 자신감을 얻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는 사위 파르나바조스 2세에게 이집트 수복을 맡겼고, 후자는 20만의 페르시아 군과 1만 2천의 아테네 용병과 함께 진격했으나 실패하였다. 파르나바조스 2세는 장성한 서자 아리오바르자네스와 어린 적자 아르타바조스 2세를 두었는데, 동생이 장성할 때까지 사트라프를 맞기로 했던 아리오바르자네스는 퇴임 시기가 다가오자 이를 거부하고 카파도키아 사트라프 다타메스의 반란에 동참하였다. 이에 이집트 국왕 테오스 및 아르메니아 사트라프 오론테스 1세가 지원하고 스파르타의 아게실라오스 2세는 원군을 이끌고 왔다. 하지만 본래 지지를 표했던 카리아 사트라프 마우솔로스와 리디아 사트라프 아우토프라다테스가 샤한샤의 편으로 전향하였다.

기원전 366년 그들은 미시아의 아드라미티온을 포위하였고, 시간 지속되던 공방전은 아게실라오스 2세의 중재로 풀렸다. 다만 얼마후 아리오바르자네스는 아들 미트리다테스에 의해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에 넘겨져 십자가형으로 처형되었다. 미트리다테스는 또한 카파도키아의 다타메스 역시 꾀어 살해하였고, 이에 아르메니아의 오론테스 1세가 항복하며 페르시아판 삼번의 난인 사트라프 반란은 종식되었다. 이후 미트리다테스는 키오스가 영지로 주어졌고, 아들까지 세습되었다. 한편 이복형의 사후 사트라프에 오른 아르타바조스 2세는 사트라프들의 권력 약화를 위해 사병 해산을 명한 외숙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에 반발하여 페르가몬 태수 오론테스 1세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기원전 356년) 그는 아테네와 테베 용병을 고용하여 진압군을 두 차례 격파했으나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가 더 많은 돈으로 용병들을 역고용하자 리디아 사트라프 아우토프라다테스에 패하고 포로가 되었다.

파일:튀르키예 미시아 1.jpg

아르타바조스 2세의 헬라식 주화

비록 얼마후 아르타바조스 2세는 그리스계 처제 겸 사위[2]인 멘토르와 멤논 형제의 분투로 구출되었으나 전세를 역전하지 못하고 21명의 자녀와 함께 마케도니아 왕국 필리포스 2세 궁정에 망명하였다. (기원전 352년) 약 10여년간 펠라에 머무르며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친분을 쌓던 그는 페르시아에 남아 기원전 342년 이집트를 수복하여 샤한샤의 신임을 얻은 멘토르의 주선 덕에 멤논과 함께 귀국할 수 있었다. 헬레스폰트 사트라프로 복귀한 아르타바조스 2세는 여생동안 페르시아에 충성을 다하여 가우가멜라 전투에 참전하였고, 멸망이 확실시 된 후에도 다리우스 3세의 피신을 보필하였다. 기원전 330년 다리우스 3세가 살해된 후 포로가 된 아르타바조스 2세에 대해 알렉산드로스 3세는 충성심을 높게 평가하여 사면하고 박트리아 사트라프로 봉하였고, 그는 2년 후 부임 중 사망한다. 한편 그의 두 누이 중 아르타카마는 프톨레마이오스 1세와 결혼하였다.

2. 인명



[1] 고대 그리스 4대 부족 중 하나인 아이올리인들이 정착하여 붙여진 지명 [2] 멘토르, 멤논 형제의 누이와 아르타바조스가 결혼, 형제는 후일 아르타바조스가 다른 여인과 낳은 딸인 바르시네와 결혼함. 바르시네는 차례로 과부가 된 후 어린 시절 망명지에서부터 안면이 있던 알렉산드로스의 눈에 들어 아들 헤라클레스를 낳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