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일본 센고쿠 시대 모리 가문, 모리 모토나리(1497~1571)의 세 아들. 모토나리는 슬하에 10남 2녀를 두었으나, 그 중에서도 정실 묘큐의 아들인 장남부터 삼남까지가 특히 유명하다.- 장남 모리 타카모토 (1523년 ~ 1563년)
- 차남 킷카와 모토하루 (1530년 ~ 1586년)
- 삼남 코바야카와 타카카게 (1533년 ~ 1597년)
차남과 삼남이 성씨가 다른 건 두 가문의 세력을 흡수하기 위해, 각자 양자로 집어넣고 나중에 계략을 써서 가문을 빼앗았기 때문.
2. 생애
장남은 효심이 지극하고 내정 면에서 아버지를 충실히 보좌했고, 차남은 용감한 성격 덕에 맹장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삼남은 머리가 똑똑해서 가문의 참모를 담당했다.어느날 모토나리가 세 아들들을 모아놓고서 각자 화살 한 대씩을 부러뜨리게 하자, 모두가 쉽게 부러뜨렸으나 이번에는 화살 세 대를 한 번에 부러뜨리게 하자, 이번에는 모두가 부러뜨리지 못했음에,
"이렇듯 세 명이 합심하면 당할 자가 없을 것이다."
라고 했다는 세 화살의 교훈으로 유명하다.[1]
사실 형제들은 영지 분할과 가문 운영, 성격차 등으로 인해 사이가 좋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배경이 이미 장남이 사망한 이후가 되어 있어, 실화는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코에이의 역사 시뮬레이션 게임 태합입지전5에서는 이런 모순을 해결하고자 이벤트 발생년도를 장남이 사망하기 전인 1561년 ~ 1562년으로 설정해놓았다.[2]
이렇게 3형제가 있었지만, 정작 장남 타카모토가 아버지보다 먼저 죽었기 때문에 모리 가는 바로 손자 모리 데루모토에게 넘어갔다. 물론 모토나리가 도중에 형식상 은거해서 타카모토가 정식 당주가 되긴 했지만, 당시 다들 그랬듯 은거는 실제 은퇴가 아니라 실권은 모토나리가 계속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3형제의 후손들은 훗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각각 바보, 배신자, 바보이자 배신자로서 맹활약하여 서군의 패배에 크게 기여한다. 셋 중 히데아키는 양자이긴 하지만...
옛 모리 가의 영지였던 아키와 빈고(현 히로시마 현)에는 세 화살의 교훈(三矢訓)이 관광 상품으로 쓰일 정도로 큰 영향을 주고 있으며, 히로시마의 축구팀 이름은 산프레체 히로시마[3]일 정도.
모리가 3형제의 반대가 되는 사례가 삼국지의 원소의 세 아들들이나 고구려 말기의 연개소문의 세 아들들이다. 아버지의 유지를 따르기는커녕 서로 정권 장악을 하려고 싸우기만 하였고, 여기서 패배한 장남이 적에게 붙어버린 결과 나라가 통째로 망하게 되었다.
[1]
본래
이솝 우화의
이야기로, 일본 매체에서는 종종 인용되는 일화.
무한도전 세븐 특집에서도 인용한 바가 있다. 이 일화가 유명해진 현재는 이걸 인용하려고 화살을 건네면 계속 부러뜨리는 통에 대화가 안되는 개그가 종종 나오곤 한다.(...) 심지어 개그도 아니고 진지한 영화인
란(영화)에서도 화살 셋을 낑낑대면서도 끝내 부러뜨리는 장면을 넣어 형제들이 결국은 싸우게 될 거란 복선으로 활용한다. 사실 고작 세 개 정도라면, 젊은 성인 남성의 힘으로는 한 개보다 힘이 좀더 들기야 하겠지만 '아무리 해도 불가능할' 정도는 아니기에 이 일화가 사실이라면 뭔가 일반적인 화살보다 좀 많이 튼튼한 재질이었던 듯. 모 어린이 프로그램에서는 화살을 부러뜨리는 대신 세우는 것으로 나온다. 화살 세 개를 맞대었더니 드디어 섰다고.
[2]
이 일화의 원전은 중국
춘추시대의 이야기다. 원래 일화가 춘추 시대 때의 일화임을 생각하면 모토나리가 사서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해석할수도 있을 것이다.
[3]
일본어 3+이탈리아어 frecce=세 대의 화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