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 | <colbgcolor=white,#2d2f34> 만명부인(萬明夫人) | ||
본관 | 경주 김씨(慶州 金氏) | ||
성씨 | 김(金) | ||
이름 | 만명(萬明) | ||
아버지 | 김숙흘종 | ||
배우자 | 김서현 | ||
아들 | 김유신, 김흠순 | ||
딸 | 김보희, 문명왕후 | ||
생몰연도 | 580년경?[1]~? |
1. 개요
신라의 왕족으로 김유신의 어머니로 유명하다. 가야 금관국 구형왕의 손자이자 봉사손인 김서현과 혼인하여 김유신, 김흠순, 김보희, 문명왕후 4남매를 낳았다. 생전에는 만명공주(萬明公主)[2]였으나 훗날 아들인 김유신이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존되면서 만명부인으로 칭호가 바뀌었다.신라 왕족으로 태어나 신라의 고위 왕족과 결혼하고 자손을 가지는 평범한 신라 왕족 여성의 삶이 기다리고 있었으나 당대에는 희대의 스캔으로 신라를 뒤흔들고 훗날 그 나비효과로 신라의 통일이라는 엄청난 후폭풍을 불러온 여러모로 엄청난 여성이다.
2. 생애
진흥왕의 남동생 숙흘종의 딸로, 골품은 성골(법흥왕계 설) 또는 진골(동륜태자계 설)이다. 숙흘종이 530년대 중후반 출생으로 추정되기에 580년 전후에 태어난 것으로 추측되는 만명부인과 나이 차이가 당시 기준으로 매우 많이 나는 편. 어머니는 정사에서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김씨 또는 박씨로 추정된다.[3] 숙흘종과의 나이 차이를 감안하면 후처의 소생일 수도 있으며, 진평왕의 딸 천명부인과 명(明) 돌림을 공유하기 때문에 천명부인과 관련된 인물일 수도 있다.[4] 형제에 대한 기록은 없는데 정말로 형제가 없었을 수도 있고 단순히 사료 부족으로 기록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5]동륜태자, 진지왕의 친사촌 여동생이며 동륜태자의 처 만호부인이 진흥왕, 숙흘종의 누이이자 동륜태자의 고모이므로 진평왕, 김백반, 김국반의 5촌 고모이자 외사촌 여동생이 된다.[6] 나이만 따지면 이들보다 진지왕의 아들로 5촌 조카인 김용수가 570년대 말~580년생이고 동륜태자의 손녀인[7] 선덕여왕, 진덕여왕이 580년대생이라 이들의 나이에 더 가깝다.
김서현과 사랑에 빠져 부모의 허락 없이 야합(野合)했다. 만명부인은 진흥왕의 조카이니 말할 것도 없고, 김서현도 한때 가야에서 이름 높았던 금관국 구형왕의 손자이자 신라 상대등을 지낸 노리부의 조카,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 성왕을 죽인 김무력의 아들이니만큼 참 대단한 집안끼리 스캔을 터뜨린 것이다. 당시 금관계 김씨 가문은 신라에 항복한 이후 각종 군공을 세우며 빠르게 자리를 잡긴 했지만[8] 근본적으로 막 굴러들어온 돌이나 다름없던 금관계 김씨에 대한 신라 진골들의 인식은 좋지 않았고, 말이 진골이지 실질적으로 귀천상혼으로 간주될 정도로의 대우 차이가 있었다.[9]
신라의 왕위계승권은 사위에게도 있기 때문에 진흥왕의 조카인 만명공주의 야합은 고구려나 백제처럼 단순한 왕족과 귀족의 스캔을 넘어 계승권 분쟁의 소지가 있었다. 동륜계인 진평왕, 김백반, 김국반 모두 아들에 대한 기록이 없는데 만명부인은 선덕여왕, 천명공주, 진덕여왕보다는 연상으로 추측되므로 당시에는 진평왕도 당장 동륜계의 단절을 고민하지는 않았겠지만 이때부터 아들이 없다는 것에 대한 압박감과 그로 인한 왕족들 간의 다음 왕위를 둔 긴장감은 이때부터 있었을 것이다. 안 그랬으면 진평왕이 천명공주를 사륜계인 김용수와 결혼시켰을 리가 없다.[10] 만명공주는 진흥왕의 조카이므로 동륜계와 사륜계 다음가는 계승서열을 가진 왕족인데,[11] 이런 사람이 항복 이후 빠르게 신라 정계에 자리 잡은 금관계 김씨와 야합한다는 것은 신라 정계를 뒤흔들 소지가 있었다. 기록에 없는 만명공주의 어머니가 만일 동륜계 내지는 사륜계였을 경우에는 더 심각해지지만 이는 기록이 없으니 패스.
숙흘종이 둘의 사이를 반대했지만 만명공주는 기어코 사랑의 도피를 감행하며 김서현과 결혼했다. 저 사랑의 도피와 관련된 설화가 있는데, 아버지가 김서현을 멀리 변방인 만노군[12]의 지방관으로 보내버리고 만명을 가두었는데, 어느 날 폭풍우가 일어나서 문이 벼락이 떨어져 박살나자 그 틈을 노려 만명이 서현에게 도망갔다고 한다. 공주급 여자와 왕자급 남자, 더 나아가서 정복국의 공주와 망국의 왕손이 눈이 맞아 도피한 사건이기 때문에 서동 설화에 관한 가설 중에는 이 사건이 와전되어 서동 설화와 서동요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김유신이 태어난 뒤에는 숙흘종도 결국 체념했는지 만명공주와 김서현의 결혼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자녀에게 엄격했던 모양으로, 김유신이 천관녀에게 사랑에 빠졌을 때 큰 일을 할 사람이 여자에게 빠지면 안 된다고 훈계했던 일이 유명하다.[13] 그리고 집안 내력인지 이 부부의 딸도 제 부모처럼 혼전임신으로 아들을 낳았다. 이 아들이 삼국 통일의 주인공인 문무왕이다. 이건 김유신이 진지왕의 친손자이자 진평왕의 외손자인 김춘추와 혼맥을 맺어 금관계 김씨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자 부모의 전례를 참고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김유신의 어머니가 고위 왕족인 만명공주였음에도 김유신과 문명왕후가 고위 왕족과 결혼하고자 그런 도박을 한 것은 당연히 금관계 김씨의 지위 문제가 컸겠지만 부모의 야합으로 태어났다는 논란과도 무관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훗날 그녀는 무당들에게 신격화되어 영험한 신으로 모셔져 '말명'이라고도 불린다.
3. 화랑세기의 기록
화랑세기에 따르면 만명부인의 어머니는 정사에서는 고모였던 만호부인이다. 만호부인의 원래 남편이였던 동륜태자가 죽자 김숙흘종과 재혼하여 만명부인을 낳았다고 한다.[14] 따라서 만명부인은 진평왕, 김백반, 김국반의 이부 여동생이자 천명공주, 선덕여왕, 진덕여왕의 고모이며, 그녀의 아들 김유신 또한 진평왕의 외조카이자 선덕여왕의 사촌남매가 된다.그리고 화랑세기에서는 숙흘종이 아니라 만호태후가 만명부인과 김서현의 관계를 반대했다고 하며, 이유도 가야계 문제가 아니라 진골정통인 만명부인이 대원신통인 김서현과 혼인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15] 다만 화랑세기는 실제 역사를 기록한 것이 아닐 수도 있으니 주의.
화랑세기에선 도피 때문에 왕가에서 추방 비슷한 걸 당하고 남편의 출세길도 막혔었지만 나중에 어머니 만호태후와 화해하고는 남편도 출세가도를 달렸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하지만 화랑세기라서 그대로 믿기에는 어려운 일. 다만 삼국사기에도 뭔가를 계기로 용서를 받았는지 이후 남편인 김서현이 신라의 장군으로 활약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4. 대중매체에서
4.1. 드라마 선덕여왕
- 만명부인(선덕여왕) 문서 참조.
4.2. 드라마 대왕의 꿈
담당 배우는 김예령. 1화부터 남편과 아들을 기죽이는 여걸의 포스를 뽑내었다. 하지만 본모습은 아들을 사랑하는 따뜻한 어머니이다. 4화에서 자신과 남편 때문에 김유신이 화랑도에 들어가지 못하자 아버지에게 따지러 가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김유신과 천관녀의 러브라인 최대의 위험요소이다. 결국 7화에서 어떻게 알았는지 서라벌로 올라와 야사대로 둘을 갈라 놓았다.[16]
김유신에게 가문과 대의를 위해 사랑을 포기하게 하는데 정작 자기는 사랑을 위해 가문을 버리는 짓도 서슴치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굉장히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17][18]
[1]
결혼하자마자 가진 첫 아이
김유신이 595년생이고,
김서현을 만났을 당시 결혼 적령기였으므로 580년 즈음해서 태어났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2]
실제로 왕의 딸은 아니었지만 신라에서는 왕족 여성에게도 공주라는 칭호를 붙히는 경우가 꽤 있었다. 서양의 princess와 비슷한 용법.
[3]
박씨일 가능성도 적지는 않은데
지증왕의 처
연제부인,
법흥왕의 처
보도부인, 진흥왕의 처
사도부인,
진지왕의 처
지도부인,
김국반의 처이자
진덕여왕의 어머니
월명부인이 박씨다. 성골 왕족의 처가 김씨임이 확인된 것은
동륜태자의 처
만호부인,
진평왕의 처
마야부인,
선덕여왕의 남편
음갈문왕(백반 또는 국반으로 추정)이다.
[4]
천명부인은 누이인
선덕여왕과 사촌 누이인
진덕여왕의 만(曼) 돌림을 공유하지 않았다.
[5]
삼국사기는 고려 중기,
삼국유사는 고려 후기에 쓰였는데 그사이 수차례 전란으로 인해 많은 기록이 소실되어 기록되지 않은 인물이 많아서 8세기에 편찬된
일본서기에만 나오는 인물들도 있고 태조
성한왕처럼 금석문에만 나오는 인물도 있을 정도. 이름은 사서에 기록되었는데 가족관계가 불명인 인물들도 많다.
[6]
3촌혼이라 항렬이 꼬인 것인데, 신라 중대에서 종종 일어나던 일로
법흥왕은 남동생
입종갈문왕에게 딸
지소부인(只召夫人)을 결혼시켜 조카이자 외손자인
진흥왕에게 왕위를 물려주었고,
김유신도
태종 무열왕과 여동생
문명왕후의 딸인
지소부인(智炤夫人)과 결혼했다.
[7]
동륜태자를 기준으로 하면 종손, 만호부인을 기준으로 하면 5촌 조카가 된다.
[8]
신라에 항복한 다른 가야 소국들 왕가의 존재감은 없다시피한 반면 금관계 김씨는 구형왕과 김세종이 상대등을 하고 김무력이 성왕을 죽이는 군공을 세우는 등 위세가 다른 가야계와는 차원이 달랐고, 이 결과는 김유신으로 절정에 달한다. 근본적인 출신 문제 때문에 김유신 사후에는 빠르게 중앙 정계에서 몰락하기는 하지만,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룬 태종 무열왕계조차 오래 안 가 열조 원성왕계에게 왕위를 빼앗기기 때문에 크게 다를 것도 없다.
[9]
이는 훗날 김유신이 김춘추에게 여동생인 문명왕후를 꽂아넣기 위해 그 난리를 치는 걸로 반복된다. 웃긴 건 신라 김씨도 고고학적으로는 원래 충주 금릉동에 마한 소국을 이루어 살다가 4세기 초중반에 백제에게 멸망당해 사로국으로 도망쳐서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사다리 걷어차기
[10]
이건 진평왕이 아버지인 동륜태자가 아닌 숙부인 진지왕에게 왕위를 물려받은 것으로 인한 사륜계와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진평왕의 즉위 과정이 다소 석연찮기도 했고.
[11]
진흥왕의 3남
김구륜계도 있지만 구륜의 어머니는
소비 부여씨로 추측되기 때문에 구륜계가 왕이 되기는 힘들었다.
문무왕의 처
자의왕후가 구륜계인 정도.
[12]
지금의
충청북도
진천군. 여기서 만명부인이
김유신을 낳게 된다.
[13]
천관녀는 출신이 기생이라는 것이 정설이며 신녀라는 이야기는 후대의 재야사학 같은 일부에서 제시된 일종의 설에 불과하다. 까놓고 말해서, 김유신이 천관녀와 결혼하려고 한 것도 아니었고 단지 애인 사이일 뿐이었다.
[14]
김숙흘종과
만호부인의 관계가 친남매 간의 근친혼 사례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화랑세기와 삼국사기의 기록이 짬뽕된 것이다.
김숙흘종과
만호부인이 부부였다는 기록은 화랑세기에서만 나오지만, 화랑세기에서는
김숙흘종과
만호부인은 친남매는커녕, 이복남매나 이부남매도 아니다.[19]
[15]
대원신통과
진골정통은 모두 모계계승인데, 김서현은 대원신통
사도부인의 외손자이고, 만명부인은 진골정통
지소태후의 외손녀다. 다만 인통은 모계계승으로, 아들은 1대에 한해 어머니의 인통이 전해졌다. 즉, 사도부인이 대원신통이라 하더라도 김서현의 어머니의 인통에 따라 김서현의 인통이 결정되는 것.
[16]
길거리 상인과의 대화를 보면 저자거리에 소문이 퍼진 듯하다.
[17]
사실 만명부인 생각도 이해 못할 건 아닌게 이제야 겨우 아들이 인정을 받고 있는 상황에 자칫 잘못하다간 그 입지마저 줄어들게 되니, 어머니 된 입장에서 보면 충분히 걱정할 만한 상황이긴 하다.
[18]
더군다나 만명부인과 천관녀는 엄연히 입장이 다르다. 만명부인의 경우 도피 상대는 어쨌든 최고위 귀족이었다. 물론 그 상대가 당시 진골 사이에서도 다소 끝발이 부족한 김서현이기는 했으나 가십거리는 될 지언정 자식이 나오더라도 최소한 진골이라는 최고위 귀족은 될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천관녀는 엄연히 기록상 기생으로 천출이다. 고대 계급사회에서 이는 단순한 핸디캡 수준이 아니다. 요즘으로 치면 김서현이 대기업에 크게 꿀리지 않는 큰 중견 기업 사장이라면 천관녀는 창녀나 호스트라 보면 되니 얼마나 차이가 심한지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