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5-28 09:49:07

마할라엘쿠브라

마할라에서 넘어옴
하이집트의 주요 도시 & 유적
알렉산드리아
(엘이스칸다리야)
라쉬드
(로제타)
발티므 다미에타
(두미야트)
포트사이드
펠루시움
다만후르 데숙
부토
카프르엘셰이크 만수라
멘데스
타니스
사이스 탄타 마할라엘쿠브라
삼만누드
와디 엘 나트룬
엘사다트 시티
시빈엘콤 반하
아트리비스
자가지그
부바스티스
빌베이스
10월 6일시 기제 카이로
(엘까헤라)
헬리오폴리스
(머쓰르 엘게디다)
라마단 10일시

파일:마할라 이집트.jpg
공업 도시임을 알리는 시가지 입구의 조형물
파일:이집트 마할라 1.jpg
공단과 시계탑 일대의 전경

1. 개요2. 역사
2.1. 혁명의 도시


아랍어: المحلة الكبرى
콥트어: ϯϣⲁⲓⲣⲓ
영어: El Mahalla El Kubra

1. 개요

이집트 북부 가르비아 주의 주도. 지명은 아랍어로 '큰 / 위대한 기지'란 뜻이며, 현지인들은 축약된 이름인 '엘마할라'로 부른다. 탄타 카프르엘셰이크에서 각각 동북과 동남쪽으로 20km, 만수라에서 서남쪽으로 15km 떨어진 평지에 위치한다. 인구는 54만명으로 주도인 탄타와 거의 같은 규모이다. 나일 델타의 중앙부에 위치한 하이집트의 대표적인 산업 / 농업 도시로, 시가지 동남부는 거대한 직물 공장 단지이다. 그 주관 기업인 미스르 물레 & 직조 회사는 2만 7천의 노동자를 고용한다. 엘마할라는 만수라, 탄타, 카프르엘셰이크와 함께 북부 이집트 공업지대를 구성한다. 동쪽으로 5km 떨어진 나일 강 다미에타 지류 서안에 위치한 도시 삼만누드는, 과거 이집트 최후의 현지 왕조인 제30 왕조의 수도 세벤니토스였다.

두 도시의 사이는 점차 연담 도시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역사적으로 1320년 맘루크 왕조의 술탄 앗 나시르 무함마드가 엘마할라를 가르비아 주의 주도로 설정했으나 1836년 메흐메트 알리 파샤에 의해 탄타로 이전되었다. 이집트 프로축구 리그의 가즐 알 메할라와 발라데예트 알 마할라가 이곳을 연고로 한 구단이다. 한편 이집트 최대의 공업도시인 마할라의 주민 대부분은 젊은 노동자들이고, 그들 사이에서는 이슬람 세속주의 기조가 강하다. 따라서 2011 이집트 혁명 후 보수파인 무슬림 형제단이 집권하자 강력히 반발하여 시위하였고, 2년 후 군부 쿠데타의 배경 중 하나가 되었다.

2. 역사

로마 제국기에 기존 세벤니토스 서쪽에 세워진 도시인 테오도시우 닉시스 (ⲑⲉⲟⲇⲱⲥⲓⲟⲩ ⲛⲓⲝⲓⲥ)에 유래를 두고 있다. 한편 콥트교 기록에서는 타와리 (ϯϣⲁⲓⲣⲓ)로 불렸다. 그중 타와리는 '거처'라는 뜻이고, 닉시스는 '위대한'이란 뜻이다. 이것이 혼합되어 이슬람 정복 후 아랍인들이 그 의미를 그대로 아랍어로 번역한 것이 현재의 지명이다. 마할라는 기지 혹은 거처이고, 쿠브라는 위대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주로 고대 이집트 시기 지명의 아랍식 발음이 정착된 하이집트의 다른 도시들 ( 다만후르, 탄타, 반하 등)과 달리 음차가 아닌 훈차로 변환된 독특한 사례이다.

상술한대로 1320년 술탄 앗 나시르 무함마드에 의해 가르비야의 주도가 되었고, 당시에는 라우다트 알 바흐레인이라 불렸다. 이는 두 강 사이의 정원을 뜻하는데, 나일 강의 본류와 다미에타 지류 사이에 위치한 입지 조건을 표현한 것이다. 다만 여러 귀족들과 셰이크들이 거주하게 되며 '위대한 거처'란 의미인 마할라엘쿠브라가 지명으로 정착하였다. 이후 5세기 간 주도 역할을 하다가 19세기 들어 철도 교통의 허브로 급부상한 탄타에 주도 자리를 내주었다. (1836년) 한편 도시 경계가 시가지에만 국한되었던 마할라는 1844년에야 일대의 농촌 지역이 관할지로 포함되었고, 이는 전체 주 면적의 1/4에 해당하는 광범위한 규모이다. 19세기 후반 이집트 국왕 압바스 2세에 의해 동쪽의 삼무드가 도시로 승격되며 잠시 그에 속하기도 하였다.

2.1. 혁명의 도시

파일:1950년대 이집트 마할라.jpg
1950년대 마할라 공업 단지의 전경

2006년 덴마크의 이슬람 모욕 만화에 대한 시위와 직물공장 노동자들의 처우 개선 파업이 있었다. 2008년에는 무바라크 당선에 대한 불복과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시위가 있었고, 경찰의 강경 대응으로 3명의 사망자와 수십명의 부상자가 속출하였다. 28세의 엔지니어 아흐메드 마헤르가 파업 지원을 위해 만든 페이스북 그룹에는 7만명이 구독하여 시위는 점차 조직화되었다. 2011 이집트 혁명 당시에도 마할라는 주요 시위지 중 하나였다.

다만 그후에도 정국이 안정되지 않았고, 2012년 7월 무려 2만 5천명의 직물공장 노동자들이 처우 개선과 임금 인상 및 임원진 교체를 요구하며 파업에 나섰다. 일대의 다른 노동자들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의사나 교원진 등 전문직 종사자들도 합류하였다. 몇달 후에는 무슬림 형제단의 지지 / 반대파가 충돌하여 백여명이 부상당하였고, 12월 7일에는 노동자와 학생들이 '무슬림 형제단 정부'로부터 자치를 선포하며 시의회를 점거, 혁명 의회를 수립하는 사상 초유의 일도 있었다. 이러한 혼란은 2013년 7월 엘 시시의 쿠데타와 무슬림 형제단에 대한 숙청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