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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이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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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이창
毛貽昌[1] | Mao Yichang
파일:마오이창.jpg
출생 1870년 10월 15일
호남성 상담현
사망 1920년 1월 30일 (향년 49세)
중화민국 후난성 샹탄현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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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북양정부|
중화민국 북양정부
중화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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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북양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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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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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비(良弼)
순생(順生)
학력 무학력
직업 군인, 농부
가족 아버지 모은보,(毛恩普, 1846~1904),
어머니 유씨,(劉氏, 1846 ~ 1884),
아내 원쑤친,(文素勤, 1867~1919),
3남[2]: 마오쩌둥,(毛泽东, 1893 ~ 1976),
4남[3]: 마오쩌민,(毛澤民, 1896 ~ 1943),
5남[4]: 마오쩌탄,(毛澤覃, 1905 ~ 1935),
종교 무종교 불교

1. 개요2. 생애3. 가계4. 여담5. 참고문헌

[clearfix]

1. 개요

청나라 인물 마오쩌둥 초대 중국 주석의 아버지.

2. 생애

1870년, 후난성에서 모은보(마오엔푸)의 1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5] 몰락한 집안 출신으로 유산은 커녕 빚만 잔뜩 물려받았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죽도록 노동을 해야 했다. 마오이창은 어려서 2년 동안 서당을 다녔으나 곧 그만두고 돼지와 미곡을 사고 파는 상인으로 일하며 먹고 살았으며 15세에 상향현 출신의 원치메이와 결혼했다. 1884년에 어머니를 여읜 후 16세에 상군에 입대하여 17세에 제대했다. 군에서 모은 봉급으로 마오엔푸가 잃은 땅을 모두 사들인 마오이창은 본격적으로 농사을 지으며 가업을 중흥하기 위해 호된 노동을 했다.

원치메이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둘 낳았으나 어려서 죽었고 1893년에 다시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들이 바로 마오쩌둥이다. 마오이창은 아들의 탄생에 몹시 기뻐했다. 그리고 집안에 경전에 해박한 사람이 하나쯤 있어야 한다는 이유로 마오쩌둥을 소학당에 보냈다. 이는 마오이창은 토지 관련 소송에서 고전에 대한 박식한 상대의 말빨에 휘둘려서 완전히 패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일 이후 마오이창은 이런 말을 자주 하게 되었다.
"가난은 너무 많이 먹거나 많이 써서 오는 게 아니야. 가난은 계산하는 능력이 없어서 오는 거야. 계산만 잘하면 누구나 잘 먹고 살 수 있어. 하지만 그럴 능력이 없으면 제아무리 황금산이 있다 할지라도 모조리 낭비하고 말거야."

마오이창은 자식들에게 주판 쓰는 법, 장사요령 등을 가르치며 아들들을 자신의 사업을 이어갈 충실한 아들로 키우고자 했으나 마오쩌둥은 마오이창의 기대와 달리 어디까지나 말다툼에서 이기기 위한 실용적인 목적으로만 유교 경전을 배웠으며 틈만 나면 어른들에게 대들면서 유교경전을 인용했다. 하지만 마오이창은 아들이 자신의 바람대로 고전에 해박해진 것을 기뻐하지 않고 싸가지 없이 대든다는 이유로 아들을 개잡듯 두들겨패곤 했다.

마오이창은 15마지기 정도의 농사를 지어 한해에 약 60석 정도를 수확했고 먹을 쌀 조금을 빼고는 모두 팔아서 계속 돈을 모았다. 어느 정도 돈과 쌀이 축적되자 마오이창은 미곡상을 시작했고 처가집 식구들을 고용하여 장사 규모를 늘려나갔으며 차차 일꾼들을 계속 고용하였다. 이어 밭갈이 소, 잔치용 돼지 매매에도 나서면서 사업 규모를 확장했고 1903년에는 아버지 마오엔푸가 사망했는데 그해에 마오이창은 그동안 모은 돈으로 땅을 더 사들여 20마지기 정도의 땅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그는 온 식구들을 동원하여 일을 시켰고 자신의 계획에 어긋나는 행동은 곧 불효이고 나태라는 이유로 식구들을 쥐잡듯 잡았다.

1906년, 마오이창은 마침 과거제도도 폐지되었겠다 마오쩌둥이 더 이상 공부를 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여겨 그를 집으로 불러들이고 일을 시켰으나 마오쩌둥은 계속 책을 읽었고 마오이창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그가 책을 읽는 것을 볼때마다 혼을 냈다. 1907년에는 신사 출신의 먼 친척인 뤄씨 집안의 장녀 뤄이슈와 마오쩌둥을 결혼시켰으나 마오쩌둥은 조혼에 대해서 매우 불만을 가졌으며 뤄씨에 대해 자신의 아내로 생각한 적이 없다고 훗날 에드거 스노우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하도 뤄이슈가 마오쩌둥의 냉대를 받자 마을에서는 뤄이슈가 사실 마오쩌둥의 아내가 아니라 마오이창의 첩이라는 소문이 돌 정도였고 결국 냉대를 받던 뤄이슈는 1910년에 갓 스물의 나이로 이질에 걸려 사망했다.

그해에 마오쩌둥은 마오이창에게 학업을 계속하겠다고 요구했고 마오이창은 어쩔 수 없이 1,400원이나 되는 엄청난 돈을 내주며 그를 동산고등소학교에 다니게 해주었다. 하지만 마오쩌둥이 계속 학교를 바꿔가며 생활비를 요구하자 크게 실망하여 장남과의 관계를 단절하다시피 했는데 마오쩌둥은 생활비가 필요할때마다 조상을 운운하면서 마오이창을 졸라대서 결국 생활비와 학비를 뜯어내곤 했다. 하지만 마오이창은 늙어가면서 성격이 계속 포악해졌고 1916년 중병에 걸려 투병하던 원치메이는 남편의 행패를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친정으로 떠나버렸다.[6]

홀로 남게 된 마오이창은 1920년 1월 30일, 급성 상한증으로 사망하여 사오산 난안에 묻혔다. 마오쩌둥은 이후 아버지에 대해 성질이 난폭하고 이기적인 인물이었다고 혹독한 평가를 남겼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그리움과 존경 역시 비쳤다고 한다.

사후 39년이 지난 1959년 6월 25일, 그의 아들 마오쩌둥이 고향에 돌아간 후로부터 이튿날, 아침 일찍 마오이창과 원치메이의 묘소에 들러 숙연한 표정으로 "선대가 고생하여 후손이 행복해졌다"며 정성을 다해 참배했다고 한다. 하산 후, 마오쩌둥은 부모의 생가를 둘러보던 중 측근에게 "아버지가 상한증에 걸리고 어머니가 임파선염에 걸렸는데....만약 지금이였으면, 죽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그리움을 내비쳤다고 한다.[7]

3. 가계

4. 여담

5. 참고문헌



[1] 간체자로는 毛贻昌 [2] 다섯째 [3] 여섯째 [4] 일곱째 [5] 원래는 마오엔푸의 외동아들로 알려졌으나 훗날 백과사전에선 마오이창이 하나가 아닌 장남으로 되어있어 여동생이 2명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형제자매가 제대로 밣혀졌다. [6] 필립 쇼트의 견해에 따르면, 마오이창이 뤄이슈를 첩으로 들인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부부 관계가 틀어졌을 수도 있다고 한다. [7] 출처: 毛貽昌, 毛泽东的父亲毛贻昌并非一味专断之人. [8] 실명 비공개 [9] 실명 비공개 [10] 실명 비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