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리처드 르 스크루프 Richard le Scrop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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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1350년 ~ 1405년 6월 8일 | |
출생지 | 잉글랜드 왕국 메섬 | |
사망지 | 잉글랜드 왕국 요크셔 요크 | |
아버지 | 헨리 르 스크루프 | |
어머니 | 조앤 | |
형제 | 제프리, 스티븐, 조앤, 이사벨라 | |
직위 | 요크 대주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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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성직자, 요크 대주교. 헨리 4세에 대항하는 반란에 참여했다가 처형되었다.2. 생애
1350년경 잉글랜드 왕국 메섬에서 초대 메섬의 스크루프 남작 헨리 르 스크루프와 조앤의 세번째 아들로 출생했다. 형제로 제프리[1], 스티븐, 헨리[2], 존[3], 조앤[4], 이사벨라[5]가 있었다. 그는 일찍부터 성직자의 길을 걷도록 정해졌고,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인문학을 공부한 뒤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1375년 법학 박사가 되었다.이후 일리 주교직에서 봉사했고, 곤트의 존 소유의 틱힐 성에서 목사를 맡았다. 1378년 케임브리지 대학교 총장이 되었다. 또한 1376년 집사가 되었고, 1377년 사제가 되었으며, 1382년 로마로 가서 교황청에 의해 치체스터 대성당 주교로 임명되었지만 잉글랜드로 돌아가지 않고 로마에 수년간 남았다. 1386년 교황 우르바노 6세에 의해 공증인에 선임되어 코번트리와 리치필드 주교로 선임되었다. 1387년 잉글랜드로 돌아와 두 교구를 맡았다. 1392년 스코틀랜드에 선교 여행을 떠났고, 1397년 리처드 2세의 지시를 받들어 로마로 파견되어 에드워드 2세의 시성을 달성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 임무는 실패로 끝났지만, 리처드 2세는 그를 여전히 신뢰했다. 이듬해 요크 대주교가 공석이 되자, 리처드 2세는 그를 요크 대주교에 선임했고 교황청도 승인했다.
1399년 헨리 4세가 리처드 2세를 폐위하고 왕위에 올랐을 때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1399년 9월 29일 리처드 2세에게 퇴위 승인서에 서명하도록 요구하는 임무를 맡은 대표단의 일원이었으며, 9월 30일 의회에서 리처드 2세의 퇴위 승인서를 낭독했다. 그러나 스크루프 가문과 인척인 퍼시 가문이 헨리 4세에게 반감을 품고 왕위 계승권자인 제5대 마치 백작 에드먼드 모티머를 왕위에 옹립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자, 그는 여기에 협조하기로 마음먹었다. 1405년, 스크루프와 19세의 제4대 노퍽 백작 토머스 모브레이는 헨리 4세를 성토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는 왕이 과도한 세금을 거두어 신민을 핍박하고 있으며, 성직자들에게 과도한 부담을 안겨 하느님을 섬기는 데 전력을 기울이지 못하게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리고 리처드 2세의 정당한 상속인은 에드먼드 모티머이므로 찬탈자와 맹세 위반자인 헨리 4세를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토머스 모브레이와 스크루프가 이끄는 8,000 ~ 9,000 가량의 반군은 요크 북쪽에서 모브레이 영지로 이동한 뒤 존 포콘버그를 비롯한 여러 지역 기사들과 합세하려 했으며, 뒤이어 초대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와 제5대 바르돌프 남작 토머스 바르돌프의 군대와 합세하려 했다. 그러나 베드퍼드 공작 존과 초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랄프 네빌이 포콘버그의 군대를 톱클리프에서 격파해 사방으로 흩어지게 만들었다. 1405년 5월 29일, 스크루프와 토머스 모브레이의 군대는 쉽턴 무어에서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랄프 네빌의 군대와 마주쳤다. 랄프 네빌은 모브레이와 스크루프에게 회담을 제안했다. 모브레이는 망설였지만, 스크루프는 회담에 동의했다. 그들이 와인을 마시면서 랄프 네빌과 자신들의 요구 사항에서 합의를 내려고 논의하고 있을 때, 그들의 군대는 왕실군의 급습으로 무너졌다. 결국 군대를 잃은 모브레이와 스크루프는 체포된 뒤 폰테프렉트 성에 구금되었다.
1405년 6월 8일, 요크에 도착한 헨리 4세는 두 사람 모두 참수하라고 명령했다. 이때 켄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애런들이 런던에서 요크로 달려와서 왕을 접견한 뒤, 대주교의 운명은 왕이 아니라 교황이나 적어도 의회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고 경고했다. 헨리 4세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애런들이 먼 길을 뛰어오느라 지쳐서 잠자리에 든 사이 참수형을 감행했다. 스크루프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보이는 모브레이를 위로하고, 그가 먼저 사형대에 오르도록 허락했다. 이후 그는 죽기 전에 사형 집행인에게 "그리스도의 다섯 상처를 기념하여" 자신에게 다섯 번의 타격을 가해 달라고 요청했고, 사형 집행인은 이에 응했다. 그의 유해는 요크셔의 민스터에 안장되었다.
교황 인노첸시오 7세는 대주교를 처형했다는 소식에 격노해 처형과 연루된 모든 사람을 파문했다. 그러나 켄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애런들은 교황 교서를 공표하길 거부하고 왕이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으므로 왕을 돕겠다고 선언했다. 1407년, 교황 그레고리오 12세는 인노첸시오 7세의 파문 선고를 번복했다. 이후 많은 이들은 스크루프를 신앙 때문에 고난을 받은 거룩한 순교자로 간주했고, 그의 초상화는 종교 개혁 시대까지 잉글랜드 기도서에서 자주 발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