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레이다르 오스발 크밤멘 (Reidar Osvald Kvammen) |
출생 | 1914년 7월 23일 |
스타방에르 | |
사망 | 1998년 10월 27일 (향년 84세) |
국적 | 노르웨이 |
포지션 | 인사이드 포워드 |
신체조건 | 178cm | 75kg |
소속팀 | 비킹 FK (1930-1952) |
국가대표 | 51경기 17골 (1933-1949) |
감독 |
몰데 FK (1953) 브뤼네 FK (1957) 브뤼네 FK (1960-1933) 비킹 FK (1964) 브뤼네 FK (19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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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노르웨이의 전 축구 감독.2. 생애[1]
2.1. 어린 시절
크밤멘의 아버지 라스무스 안드레아스 크밤멘(Rasmus Andreas Kvammen)은 제화공이었고 어머니 얀나 크밤멘(Janna Kvammen)은 경찰관이었다.2.2. 선수 생활
2.2.1. 클럽
크밤멘은 그의 모든 선수 커리어를 고향팀 비킹 FK에서 보낸 원 클럽 플레이어였다.1933년 노르웨이 컵 결승에서 크밤멘의 득점이 있었지만 비킹은 미왼달렌(Mjøndalen)에 1대3으로 패해 우승에 실패했다.
그는 총 202골을 넣어 비킹의 통산 최다 득점자이자 역사를 대표하는 선수로 기억되고 있다.
2.2.2. 국가대표
크밤멘은 9살 위의 친형 아르투르(Arthur)와 함께 1933년 11월 5일, 독일을 상대로 노르웨이 대표팀에 데뷔했다. 그리고 그는 1934년 9월 2일 핀란드와의 1대1 무승부에서 그가 평생 넣은 국가대표팀의 17골 중 첫 번째 골을 기록했다.1936년에 크밤멘은 노르웨이 대표팀으로 올림픽에 참가했고 2라운드에서 개최국 독일을 2대0으로 꺾은 팀의 일원이었다. 준결승에서 노르웨이는 2년 전의 월드컵 챔피언이자 대회 챔피언이 될 이탈리아에게 연장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1대2로 패했다. 하지만 폴란드와의 동메달 결정전에서 3대2로 승리했다. 이것은 현재까지 노르웨이 대표팀의 유일한 국제 축구 대회 입상 기록이다.
이후 노르웨이는 1938년 월드컵 출전을 위해 아일랜드 자유 주와 지역 예선전을 치렀고 크밤멘은 홈 앤드 어웨이 2경기에서 4골을 넣어 노르웨이를 사상 첫 월드컵 본선에 진출시킨 1등 공신이 되었다. 이 모습을 본 아스날 FC에서 크밤멘에게 영입 제의를 했지만 그는 자신감이 없었는지 거절했다.
하지만 그와 노르웨이는 1라운드에서 이탈리아와 다시 만났고, 지난 올림픽 경기의 양상이 거의 그대로 재현되며 연장에서 1대2로 패했다. 월드컵이 끝나고 아스날이 다시 한번 영입 제의를 했지만 크밤멘은 이번에도 제의를 거절했다.
1949년 6월 19일에 있었던 유고슬라비아와의 51번째 경기가 그의 마지막 대표팀 경기가 되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크밤멘은 1930년대 노르웨이 축구계를 대표하는 선수 중 한명이었다. 노르웨이 대표팀 최초로 50경기 출전[2]을 넘긴 선수임에서 그가 당시 노르웨이의 핵심 선수인 것이 증명된다.4. 뒷이야기
- 크밤멘은 나치 강점기 당시 경찰로 일했는데 그는 경찰의 나치화에 동참하기를 거부했다. 그때문에 크밤멘은 체포되어 처음에는 그리니에, 나중에는 슈투트호프 독일 포로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이 투옥은 크밤멘의 이후 선수 생활에까지 영향을 주었으며 전쟁 후 재활을 위해 스웨덴으로 가야 했다.
- 크밤멘이 노르웨이 대표팀에서 처음 50경기 출전을 돌파하자 노르웨이의 국왕 호콘 7세가 직접 축전을 보내주었다.
5. 사생활
크밤멘은 1942년, 안나 마르테아 스텐(Anna Martea Steen)과 결혼했다.6. 수상
6.1. 선수
6.1.1. 클럽[3]
- 노르웨이 컵 준우승 2회: 1933, 1947
6.1.2. 국가대표
[1]
출처: 위키피디아, 11v11
[2]
노르웨이를 넘어 이는
스칸디나비아반도 국가 선수 중 최초의 기록이다.
[3]
크밤멘은
비킹 FK
원 클럽 플레이어이므로 클럽 이름 기입은 생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