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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5-30 18:12:17

람베르토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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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mberto I
생몰년도 미상 ~ 880년
출생지 미상
사망지 스폴레토
재위 기간 860년 - 871년(1차 재위)
876년 - 880년(2차 재위)

1. 개요2. 행적

1. 개요

스폴레토 공국 24대, 26대 공작.

2. 행적

스폴레토 공국 23대 공작 귀도 1세 베네벤토 공국의 대공 지코의 딸 이타의 아들이다. 860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스폴레토 공작에 선임된 뒤 마르시 백작 제라르, 텔레세의 가스탈트(Gastald: 특정 지역에서 민사, 군사 및 사법 권한을 자의적으로 행사하는 관료) 말레포토, 보이아노의 가스탈트 완델베르토와 함께 바리 토후국의 에미르 사우단이 카푸아와 테라 데 라보로를 심각하게 약탈한 뒤 바리로 돌아가는 것을 저지했다. 그러니 뒤이은 혈투 끝에 사라센이 길을 뚫는 데 성공하면서, 사우단이 바리로 돌아가는 것을 저지하지 못했다.

860년 4월 카메리노 백작 힐데베르트와 함께 이탈리아 국왕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도비코 2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지만, 마르시에서 루도비코 2세의 군대에게 패배한 뒤 베네벤토 대공 아델치스에게 망명했다. 루도비코 2세는 한동안 베네벤토를 포위했다가 람베르토 1세가 자신에게 충성을 재차 맹세하고 배상금을 지불하는 대가로 스폴레토에 복귀하는 것을 허락했다. 866년 카푸아 백작 란둘프 2세를 체포한 루도비코 2세는 자신을 도운 람베르토에게 카푸아 백국을 가지도록 허락했다.

867년 11월 13일 교황 하드리아노 2세가 선출된 후 12월 13일 교황의 대관식이 열렸을 때, 람베르토 1세는 자신에게 사사건건 맞서는 교황령에게 본 때를 보여주고 싶어했던 루도비코 2세의 지시에 따라 로마를 약탈했다. 람베르토는 즉시 파문당했지만, 정작 루도비코 2세는 하드리아노 2세와 화해하고 그를 복권시키는 것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에 반감을 품은 람베르토 1세는 871년 루도비코 2세가 바리 토후국을 정벌하고 있을 때 살레르노 공국의 구아페르, 베네벤토 대공 아델치스와 동맹을 맺고 루도비코 2세에게 반기를 들었다.

한 때 루도비코 2세가 베네벤토에 억류되면서 반란이 성공하는 듯했지만, 아델치스가 사라센의 침략으로부터 신성 로마 제국의 지원을 받기로 하고 루도비코 2세를 풀어주면서 일이 어그러졌다. 북이탈리아에 돌아온 루도비코 2세는 람베르토 1세를 스폴레토 대공위에서 해임하고 아델치스의 아들 수포 2세를 새 공작으로 선임했다. 그는 베네벤토로 망명했고, 루도비코 2세는 각지의 반란을 진압하느라 그를 잡으러 시도할 수 없었다.

875년 루도비코 2세가 사망한 뒤 이탈리아 국왕을 겸임한 서프랑크 왕국의 국왕 샤를 2세는 876년 람베르토 1세가 스폴레토 공작에 복위하는 것을 허락했다. 또한 람베르토 1세의 형제 귀도 3세를 교황을 보호하는 역할을 맡은 카메리노 변경백으로 임명했다. 샤를 2세는 그해 7월 16일 폰티온에서 스폴레토 공국의 상당 부분을 교황에게 기부하기로 해, 내우외환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교황과 가급적 잘 지내기를 희망했다.

그러던 877년 샤를 2세가 사망했다. 람베르토 1세는 샤를 2세의 아들 루이 2세보다는 동프랑크 왕국의 국왕 루트비히 2세의 아들 카를로만을 지지했다. 그러면서 이탈리아 국왕이 될 야심을 품고 로마로 진군해 878년 3월 토스카나 변경백 아달베르토 1세와 함께 로마를 포위했다. 교황 요한 8세는 트루아로 피신한 뒤 서프랑크 국왕 루트비히 2세에게 이탈리아 국왕이 되어달라고 청하는 서신을 보내는 한편 람베르토와 아달베르토 1세를 파문했다. 그러나 루트비히 2세가 879년 4월에 급사해버리면서, 그가 이탈리아 국왕이 되는 일은 없었다.

람베르토 1세는 로마 공략에 실패한 뒤 목표를 카푸아로 돌리고 880년 카푸아 공방전을 감행하다가 도중에 사망했다. 사후 아들 귀도 2세가 스폴레토 공작에 선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