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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29 10:33:54

라푸라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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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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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Lapu-Lapu

필리핀 막탄 섬의 영주. 현재는 필리핀의 위인으로 불리고 있다.

스페인군은 필리핀 원정에 최소 5번을 실패하였는데, 그 중 첫번째가 마젤란의 원정이였다. 마젤란은 세부 왕국의 국왕과 친선관계를 맺었으나 세부에 속한 영주이면서 무슬림으로 추정되는 라푸라푸는 그렇지 않았다. 스페인 원정대와 전투를 벌여 라푸라푸가 승리하였다.

2. 생애

스페인이 도래하기전 필리핀 제도에서는 기존의 주류 종교였던 힌두교 남방불교, 애니미즘을 믿던 대부분의 세력들이 서서히 이슬람에 잠식 당하고 있었다. 스페인이 나타나기 최소 100년전 부터 이미 기존 세력들과 이슬람 세력들간에 전쟁과 휴전, 무역재개를 반복했던 기록이 있다.

필리핀에서의 이슬람 팽창은 크게 두가지 루트로 나뉘는데, 인도네시아에서 가까운 필리핀 남부의 술루 제도를 포함한 민다나오섬 서부를 중심으로한 이슬람화와 브루나이에서 가까운 마닐라에서의 이슬람화가 있다. 스페인이 도착한 시점에서는 이미 팔라완 과 민다나오의 절반이 이슬람 세력권에 들어갔고 결정적으로 국제 무역도시였던 마닐라가 이슬람으로 개종하면서 이슬람에게 필리핀 제도의 주도권이 넘어갔다.

한편, 중부 비사야 제도는 이슬람 세력들과 반목이 심한 곳이였다. 최소 스페인이 나타나기 100년 이전 부터 이슬람 세력들과 자주 전쟁을 해오던 지역이였다. 나름 지역 맹주급의 세부 왕국과 부투안 왕국이 결혼 동맹을 맺고 통합을 모색했지만 비사야 전체가 통합되는 결과는 가져오지 못했고, 더군다나 비사야 제도의 국가들 입장에서는 마닐라, 팔라완 등이 이슬람 세력화 되면서 서쪽, 북쪽,남쪽으로 향하는 항로들이 봉쇄나 다름없는 상태가 되었다. 동쪽은 망망대해인 태평양이 있었다. 사실 비사야 지방을 비롯한 기존 세력들이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스페인을 불러오고 스페인 제국의 신하가 된것이 필리핀 도독령 역사의 시작이라 볼 수 있다.

이슬람 세력은 세부 코앞에 있던 막탄 섬을 점령했고, 라푸라푸는 막탄 섬의 이슬람교를 믿는 소영주로, 세부 섬을 다스리는 국왕인 라자 후마본과 막탄 섬 지배를 두고 대립하였다.

그러던 와중에 필리핀 제도에 스페인이 등장했다. 스페인의 마젤란 함대가 나타나기 전에도 포르투갈인들과 필리핀인들 사이의 교류와 무역은 자주 있었다. 대항해시대에 있어 필수적인 인재들이였던 필리핀인들을 자주 고용했던 포르투갈이였고, 포르투갈 함대와 이 지역의 무슬림 함대가 해전까지 벌이던 실정이였기 때문에 유럽인들의 존재감은 쉽게 퍼졌고 필리핀인들 입장에서 스페인의 마젤란 함대가 처음으로 조우한 유럽인들은 아니었다.

스페인의 마젤란 원정대가 필리핀에 상륙하자 기독교를 전파하려고 포르투갈의 방식인 지역 통치자와 친밀관계를 형성하고 그의 정적을 제거함으로써 지역의 호응을 얻고자 하였다. 기독교로 개종하는 방식으로 세부 국왕 라자 후마본과 의형제 관계를 형성하고, 막탄 섬 지배를 두고 경쟁하던 막탄 섬 연합 소영주인 라푸라푸(Lapu-Lapu)를 죽이겠다고 약속했다.

사실 라푸라푸는 힌두교, 불교계인 라자 후마본과 달리 무슬림이었다. 즉, 자신이 속한 왕국의 국왕과 다른 종교를 믿고 있었다. 필리핀은 왕권이 낮은 상업 봉건제였고 대규모 침략을 당하거나 각자의 이익이 하나로 일치된 전투가 아닌 이상, 군사동원력 또한 금전을 많이 사용하지 않는 일반적인 전투에서는 영 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16세기부터 필리핀 제도는 인도 계통의 세력들과 이슬람계 세력들이 무역으로 협력, 공존하면서도 세력다툼이 일어나는 양상이 지속되고 있었다. 기존 세력들과 이슬람 세력들은 때론 전쟁을 하면서도 무역으로 공존하던 복잡미묘한 관계였기에 전면전을 하지않던 상황에서 스페인에 많은 군대를 붙여주지 못하였고 제3의 세력으로 등장한 스페인군을 이용해 막탄섬의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고자 했다.

마젤란은 라푸라푸를 조그만한 막탄 섬의 소영주이니 쉽게 이길 것이라고 오판하였고, 첫번째 전투에서 제대로 된 정보도 없이 스페인인 60여 명과 세부인 200 ~ 300명이라는 소수 병력만 이끌고 갔다.

그렇다고 마젤란이 쳐들어간 것은 아니고 먼저 세부인을 사신으로 보내 항복과 같이 라자 후마본의 막탄 섬 지배를 인정하고 스페인 국왕에 대한 충성을 요구했다. 특히 마젤란의 요구가 사실상 협박이었기에 라푸라푸를 화나게 만들었다. 물론 무슬림이었던 라푸라푸는 비웃음과 함께 요구에 대해 세부인 사신을 두들겨 패서 보내는것으로 답변했다. 그리고 부족들에게 전투 준비를 지시했다. 마젤란이 소수 병력을 이끌고 막탄 섬으로 쳐들어오니 해안에서 마젤란의 예상과 달리 준비되어 있는 라푸라푸의 1,500여명의 전사들과 맞닥뜨리고 만다.

스페인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싸우길 마다하지 않았는데, 800년간 이슬람과의 레콩키스타 전쟁과 유럽 각국과의 오랜 전쟁경험으로 다져진 중근세 시기의 스페인 병사들의 보병으로써의 기량은 유럽 최강의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고, 때로는 2배 또는 10배에 가까운 적을 상대로 승리할 정도의 강한 전투력을 자랑했다.[1] 더군다나 아메리카에서 아즈텍, 마야, 잉카 등의 인디언 문명들을 각각 몇백명의 콩키스타도르병사들로 무쌍을 찍고 난 후, 멸망시킨 전력이 있다. 적군의 숫자는 중근세 시기의 스페인 병사들의 사기에 영향을 주는 요소가 아니었다.

스페인이 오기 전 필리핀 제도 또한 7,000여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지리적 특성상 종교, 문화, 민족, 언어가 제각기 다른 여러 세력들이 난립하며 무역과 전쟁을 꾸준히 지속하였다. 기록이 소실되어 남아있지 않으나 고대부터 전국시대 같은 상황이 끊임없이 벌어졌던 것은 분명하다.

전투에서 스페인군은 참패했고 마젤란은 살해당했다. 라푸라푸 측의 사상자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수십 명의 사상자가 나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2] 원주민군의 창과 검에 끔살된데다 원주민들 측에서 시신을 돌려주지 않아 시체마저 수습하지 못했다. 몇 번의 전투가 더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그것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안토니오 피가페타의 기록에 따르면 원주민 촌장 라푸라푸에게 원하는 만큼 재물도 주고 수습할 테니 시신을 인계해 달라 했지만 거절당했다고 하며 라푸라푸가 오히려 그의 시신을 전승 기념물로 사용하였다.

오늘날 라푸라푸와 칼리 아르니스가 재평가되고 있으며 스페인 도래 이전의 20개가 넘는 필리핀 국가들의 군사력 또한 연구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스페인은 마젤란 원정대 실패 이후에도 4번의 추가적인 필리핀 원정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지리적으로 막탄섬은 민다나오 중서부와 가깝고 그곳에 있던 이슬람 술탄국들과 연결고리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즉, 막탄섬은 민다나오 이슬람 세력들의 비사야 제도 정복의 최전방에 위치한 전초기지였던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막탄섬이 정복당하고 필리핀 도독령이 설립되면서 17개 이상의 필리핀 중소국가들은 스페인에 충성을 맹세하고 자치권을 받고 스페인 제국의 가신이 된다. 하지만 민다나오의 3개의 이슬람 왕국들은 스페인의 회유를 거부하고 300년간 전쟁을 하였다.

피가페타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적들은 모두 마젤란에게 달려들었다. 적들 중 한 사람이 크기만 조금 큰 언월도와 비슷하게 생긴, 칼몸이 흰 넓적한 장검으로 마젤란의 왼쪽 다리를 베었다. 그 공격에 마젤란은 앞으로 고꾸라졌고, 적들은 철창과 죽창, 칼몸이 흰 넓적한 칼로[3] 마젤란에게 달려들어서 우리의 거울이자, 빛, 위안을 주는 사람이자 진정한 안내자를 죽였다."

3. 평가

필리핀 역사에 등장하는 첫 위인이며 스페인의 침략에 맞서 싸우고 승리한 최초의 동남아인이므로 필리핀 사람들은 그에 대한 자부심이 매우깊다. 재밌는 것은 필리핀은 몇 백년간 무슬림들을 배척했다는 것이다.

마젤란이 죽은 필리핀의 막탄 섬에는 마젤란의 죽음을 추모하는 커다란 비문과 마젤란을 죽인 라푸라푸[4]의 동상이 같이 세워져 있는데, 마젤란의 비문에는 세계 최초로 세계 일주를 성공시킨 마젤란을 추모하는 내용이 있고, 라푸라푸의 동상에는 필리핀 최초로 침략자를 물리친 것에 대한 찬사가 적혀 있다. 필리핀에서는 극우적 인사들이 라푸라푸 동상에 가서 헌화를 하고 필리핀 애국주의를 외치는 반면, 마젤란 비문은 해외 관광객이나 가끔 포르투갈이나 스페인 정치인 같은 해외 인사들이 들른다고 한다. 물론, 라푸라푸는 필리핀 교과서에서도 나오는 영웅으로 추앙받는다.

막탄 섬 이외에 수도 마닐라의 리잘 공원에도 자유의 파수꾼이란 이름으로 라푸라푸 동상이 세워져 있는데, 이 동상은 한국 반공단체인 자유총연맹에서 창립 50주년 기념으로 헌정한 것이다. 참조. 아무래도 필리핀이 6.25 전쟁 당시 UN군 소속으로 대한민국을 도와준 우방국이고 냉전 때 같은 아시아권의 반공 국가로 교류가 많아서 그런 듯.

하지만 정작 라푸라푸에 대해서 기록이 전혀 없다. 그를 영웅으로 교과서에 쓰는 필리핀에서조차 자세한 삶에 대한 걸 찾고자 노력하지만 스페인이 쳐들어와 막탄의 부족들을 학살하면서 그들 기록도 불태우는 통에 이제 더 연구하는 게 불가능해졌다. 한국어판 사이트에서 그가 1491 ~ 1542년까지 살았다고 하지만, 영어 위키피디아에서는 전혀 생몰 기록이나 삶에 대한 게 없고 라푸라푸라는 이름조차도 본명이 맞는지, 심지어는 실존 여부도 의문이라고 한다. 기껏해야, 침략자이던 마젤란 일행의 기록과 세부 왕국 마지막 왕인 라자 투파스가 쓴 기록이 있을 뿐이지만, 둘 다 이름과 왕이 있다는 간략한 소개만 나와 있을 뿐이다.


[1] 카탈루냐 용병 참조. [2] 마젤란은 퇴각 와중에 무거운 갑옷과 불편한 무릎 때문에 뒤쳐지고 말았고, 하필 다친 무릎에 다시 부상을 입어 결국 쓰러지고 만 것이다. 라푸라푸 군대는 침략자들이 총과 화살을 쏴대는 것에 일부 병력이 죽거나 다치는 걸 보고 거리를 두고 떨어져 화살과 돌을 던져댔다. 스페인 원정대는 화약이 바닥나서 적들이 내던지는 돌에 압도당했다. 그나마 이들은 단단한 투구와 갑옷으로 돌팔매질을 버텼다. 하지만 라푸라푸 군대는 이걸 보고 저들 침략자들이 장거리 무기가 이젠 없다는 걸 알아차리고 몰려와서 이들을 공격하며 투구와 갑옷이 보호하지 못하는 다리를 집중 공격했다. 결국 마젤란은 명성에 비해서는 결코 곱지 못한 최후를 맞았다. [3] '캄필란' 이라고 하는 필리핀 전통 무기이며 특징은 생물의 벌어진 입을 묘사하느라 갈라진 칼자루 디자인이다. 필리핀의 전통 무술 칼리 아르니스에서 쓰이는 무기이기도 하다. 이미지 [4] 인명이자, 현지에서 미식으로 즐겨 먹는 물고기 이름이기도 하다. 마젤란은 라푸라푸에게, 라푸라푸는 요리사에게 죽었다는 농담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