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5세의 사생아에 대한 내용은 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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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1598년 5월 6일에서 1621년 7월 13일까지 일시적으로 총독이 아니라 주권자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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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DAA6><colcolor=#000> 돈 후안 호세 데 아우스트리아 Don Juan José de Austr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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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름 |
후안 호세 데 아우스트리아 (Juan José de Austria) |
출생 |
1629년
4월 7일 스페인 마드리드 |
사망 |
1679년
9월 17일 (향년 50세) 스페인 마드리드 |
재임 |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총독 |
1656년 ~ 1659년 | |
아버지 | 펠리페 4세 |
어머니 | 마리아 칼데론 |
[clearfix]
1. 개요
스페인의 군인 겸 정치가.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가 그의 정부, 마리아 칼데론 #으로부터 얻은 사생아이다. 카를로스 1세의 사생아인 돈 후안과 동명이인이기 때문에 스페인에서는 그의 미들네임인 호세를 포함해 돈 후안 호세 (Don Juan José)라고 부르고 영미권에서는 John Joseph of Austria 또는 John of Austria the Younger라고 부른다.2. 생애
출생 직후 수녀원에 강제 수용되어 톨레도의 오카냐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642년 펠리페 4세가 공식적으로 후안이 자신의 사생아라고 인정하면서 그의 삶은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그때까지 돈 후안 호세는 자신의 아버지가 펠리페 4세라는 것을 몰랐으며 펠리페 4세가 자신의 사생아라고 인정한 사람은 후안이 유일했다.이후 군인이 되어 1647년 나폴리 왕국을 시작으로 시칠리아 왕국, 카탈루냐[1], 네덜란드[2], 포르투갈 왕국[3], 덩케르크[4] 등을 떠돌며 스페인 제국의 몰락을 막기 위해 애썼다. 이로 인해 스페인의 영웅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이 인기는 훗날 그가 일으킬 쿠데타의 원천이 되었다.
1665년, 아버지인 펠리페 4세가 사망하고 이복동생인 카를로스 2세가 왕위에 오르자, 스페인 궁정은 카를로스 2세의 어머니이자 카를로스 2세를 대신해 권력을 잡은 섭정 마리아나 왕대비를 지지하는 세력과 후안을 지지하는 세력이 서로 대립했다.[5] 그러다 마리아나 왕대비의 심복이던 독일 예수회 소속의 후안 에베라르도 니타르가 후안이 가장 신뢰하는 하인 돈 호세 말라다스를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지게 된다. 이후 마리아나는 후안을 아라곤의 총독에 임명해 말라다스의 죽음에 대해 보상했으나 이는 보상이라고 하기보단 사실상 추방에 가까웠다. 이후 마리아나 왕대비는 자신이 직접 나라를 통치하지 않고 페르난도 데 발렌수엘라라는 인물을 재상으로 임명하여 그에게 정치를 맡겼는데 재상이 된 발렌수엘라가 전횡을 일삼자[6] 후안은 귀족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마리아나를 톨레도로 쫓아낸 뒤 권력을 잡았다.
이후 그는 이복동생인 카를로스 2세에게는 궁정에 나올 때 머리만 빗고 나오라고 부탁했고 모든 통치를 본인이 담당했다. 그는 사치를 금지했고 생필품 공급을 정상화시키며 상공위원회를 창설하여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 등 뛰어난 정치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집권 3년 만인 1679년에 사망했고[7] 이후 다시 마리아나가 권력을 잡았다. 그의 사후 스페인 제국의 몰락은 더욱 가속화 되었으며 결국 그의 이복동생의 사후 압스부르고 왕조는 막을 내리게 된다.
[1]
당시 카탈루냐인들은 스페인 국왕에 대항하여 프랑스 국왕에게 칭신을 한 상황이었다. 스페인의 입장에선 당시 최악의 라이벌이던 프랑스에게 카탈루냐마저 빼앗긴다면 자연 국경인 피레네 산맥을 내어주는 꼴이었기 때문에 무조건 카탈루냐를 사수해야만 했다.
[2]
1656년부터 1659년까지 현재의
벨기에인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총독으로 재임했다.
[3]
포르투갈 독립 전쟁 이전.
[4]
프랑스와의 전쟁.
[5]
후안과 마리아나는 개인적으로도 사이가 안좋았는데 카를로스 2세가 이복형인 후안의 능력에 감탄하여 국왕 자문을 맡겼으나 마리아나가 반대하여 취소된 적도 있을 정도였다.
[6]
발렌수엘라는 마리아나 왕대비의 관심을 정치에서 돌리기 위해 일부러 궁전에 파티를 자주 열어 국고를 낭비했고 자기 마음대로 정부위원회의 위원 2명을 파면시킨데다 나중에는 아예 정부위원회를 해산시켜 버릴 정도로 권력을 남용했다.
[7]
많은 이들이 마리아나를 지지하는 세력이 꾸민 독살 사건으로 추측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