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사는 신라 제19대
눌지왕(
417년) 때
고구려의
승려
아도화상이
불교가 없었던
신라에
포교를 위해 처음 세운 신라불교의 발상지이다. 아도화상이 수행처를 찾기위해 다니던 중 겨울인데도 이곳에 복숭아 꽃과 오얏꽃이 활짝 핀 모습을 보고 좋은 터임을 알고 이곳에 모례장자의 시주로 절을 짓고 이름을 복숭아와 오얏에서 이름을 따 도리사라 하였다. 신라불교 초전법륜지로 불교의 성지인 이곳에서 아도화상이 신라에 불교를 전하러 올 때에 모셔온 세존 진신사리가 1976년 세존 사리탑 보수 공사중 금동육각사리함에 봉안되어 발견되었다.
도리사 세존사리탑 금동 사리기는 8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이 되며,
국보 제208호로 지정되어 현재 직지사 성보박물관에 위탁 소장되어 있다.
서방극락정토(西方極樂淨土)의 주재자인 아미타불을 모시는 법당이다. 정면과 측면이 각 3칸인 팔작지붕 건물로,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1875년(고종 12) 용해(龍海)스님이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외부 앙서와 상부 익공 및 내부 운궁의 형상이 1870년 중건된 경복궁 근정전의 공포 구성양식과 유사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조선말기의 건축특징을 갖추고 있다. 내부에는 1645년(인조 23)에 조성한 목조아미타여래좌상과 1876년(고종 13)에 조성한 아미타후불탱을 봉안하고 있으며, 근래에 지장탱과 신중탱을 조성하여 봉안하였다.
적멸보궁이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법당을 말한다. 따라서 불상을 별도로 모시지 않고, 법당의 뒤쪽에 진신사리를 봉안한 사리탑을 조성하여 법당 안에서 사리탑을 향해 예배를 올리게 된다. 도리사 적멸보궁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로 1982년에 주지 법등(法燈) 스님이 사리 예배와 기도를 위하여 건립하였다. 법당 안에서 바라보이는 석가여래사리탑은 1977년 세존사리탑에서 발견된 사리 1과를 봉안하기 위해 1987년에 조성한 것이다.
1999년에 건립한 정면 7칸, 측면 3칸 규모의 팔작지붕 2층 건물로, 1층은 보은전(報恩殿)이고 2층이 설선당이다. 보은전은 평생위패를 봉안한 곳으로, 이곳에 봉안된 영가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명절이나 기일마다 재(齋)를 지내고 있다. 설선당은 강당으로 사용하며 각종 법회와 신행활동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종각은 일반적으로 범종, 법고(法鼓), 목어(木魚), 운판(雲版) 등의 사물(四物)을 걸어놓고 의식 때마다 소리를 내어 삼계(三界)의 미물들까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는 전각이다. 도리사 범종각은 2005년에 건립된 정면 1칸, 측면 1칸 규모의 사모지붕 건물로 현재 사물 가운데 범종만 봉안되어 있다.
일주문은 기둥이 한 줄로 서 있는 문이라는 뜻으로, 사찰에 들어가는 첫 번째 관문이기도 하다. 사역에서 4.5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도리사 일주문은 1993년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팔작지붕을 올린 건물로, 정면에는 ‘東國最初伽藍聖地太祖山桃李寺’[4]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극락전 앞뜰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탑이다. 전체적으로 5개 층을 이루고 있는데, 맨 아래층은 탑을 받치는 기단으로, 기단 위의 2개 층은 중심부분인 탑신부로 여겨진다. 탑신부의 1층과 2층은 작은 정사각형의 돌을 2∼3단으로 쌓아 마치 벽돌을 쌓아올린 것처럼 보이는데, 각각 한 면에 문틀을 돋을새김한 널돌을 끼워 문짝모양을 표현한 듯한 점이 주목된다. 위쪽의 2개 층은 머리장식받침인 노반(露盤)이 포개진 것인지, 윗층만 노반이고 아래층은 탑신부인지 분명히 알 수 없으며, 맨 위의 노반 위에는 연꽃이 조각된 보주를 얹어놓았다. 우리나라 석탑 가운데 동일한 유형을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의 이 화엄석탑은 현재 보물 제470호로 지정되어 있다.
극락전에 모셔진 높이 129cm, 무릎너비 93cm의 불상으로 몸에 비해 머리가 크며, 평면적이고 네모진 얼굴을 하고 있다. 머리에는 낮은 나발(螺髮)에 작은 육계(肉髻)를 갖추었고, 미간 중앙에는 작은 백호(白毫)가 있으며, 이목구비가 정연하다. 양팔에 걸친 통견의(通肩衣)가 양 무릎을 덮고 있으며, 가슴아래 군의(裙衣)는 띠 매듭 대신 앙련(仰蓮) 모양으로 옷자락을 새긴 것이 특징이다. 불상의 형태와 조각수법 등으로 보아 17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후기 목조불상양식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극락전 뒤 태조선원과 삼성각 사이에 있는 높이 1.3m의 석탑으로 석종형 부도(浮屠)를 닮았다. 작은 방형기단 위에 탑신과 연꽃봉오리 형태의 보주를 장식하였으며, 상층 지대석의 네 귀퉁이에는 사자의 머리를 조각하고 그 중간에 향로를 새겼다. 탑신의 위ㆍ아래에는 띠처럼 돌아가며 연꽃잎을 새겼는데, 꽃잎이 서로 겹쳐지도록 한 점이 특이하다. 보주에도 아래에 앙련을 새기고 그 위로 다섯 개의 원을 마련하여 ‘世尊舍利塔’이라는 글자를 한 자씩 새겨 넣었다. 조성연대는 16세기 말 17세기 초로 추정되며, 1977년 이 사리탑에서 8세기 무렵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금동육각사리함과 그 안에 담긴 사리가 발견되었다.
적멸보궁 뒤편에 있는 석가여래사리탑은 1977년 세존사리탑에서 발견된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1987년에 법등스님이 조성한 것이다. 높이 8m로 팔각원당형부도(八角圓堂形浮屠)를 본 따서 정방형 지대석 위에 팔각의 탑신을 세웠는데, 기단에는 용을 조각하고 탑신에는 사천왕상을, 상륜부의 귀꽃에는 여래상을 조각하는 등 전체적으로 화려한 모습을 보여준다.
도리사 남쪽 비탈진 송림에 나란히 남향하여 서 있는 두 비석으로, 현재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91호로 일괄 지정되어 있다. 아도화상사적비는 1655년(효종 6)에 세운 것으로 아도화상이 신라에 불교를 전한 사적을 적은 것이며, 뒷면에는 자운비가 음각되어 있다. 비석의 모습은 자연석을 받침 삼아 그 윗면에 홈을 파서 비를 세우고, 머릿돌을 얹었다. 머릿돌은 앞면에 이무기를, 뒷면에 네 마리의 용을 조각하고 그 사이마다 다시 운룡을 조각한 독특한 모양이다. 불량답시주질비는 도리사에 논밭을 시주한 이의 이름과 논밭규모를 적어놓은 비석이며 1712(숙종38)에 세워졌다. 모습은 아도화상사적비와 같으나 머릿돌 앞뒷면에 굵은 선으로 연꽃봉오리와 줄기를 조각하고, 양 옆면에는 이중으로 된 원모양의 띠를 새겨 장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