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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상징인 데니즐리 품종 수탉 조형물 | 시가지 풍경 |
1. 개요
Denizli튀르키예 서남부의 도시. 이즈미르에서 동남쪽으로 130km, 안탈리야에서 서북쪽으로 120km, 아이든에서 동쪽으로 90km, 우샤크에서 남쪽으로 80km 떨어진 분지에 위치한다. 인구는 약 65만 명으로 터키에서 13번째로 큰 도시이자 데니즐리 도의 주도이다. 20세기 들어 급성장한 도시로 시내에는 볼거리가 거의 없지만 북쪽 20km 지점 파묵칼레와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히에라폴리스라는 유명 관광지가 있어 관광객들이 경유하는 도시이다. 파묵칼레 방면에는 역시 유서가 깊은 라오디케아 유적지도 있고 인근 지방에 즐비한 온천 역시 볼거리이다. 데니즐리 자체는 터키의 대표적인 산업 도시 중 하나로 직물 공업을 중심으로 한 제조업이 발달하였다. 도시의 상징은 토종 품종의 수탉인데 일명 '길게 우는 닭'으로 유명하다. 소음 주의
시가지는 2106m 높이의 토클류야탁 산과 북쪽의 낮은 산지 사이의 자연 분지에 형성되어 있다. 시가지 서부는 거대한 주택 지역이고 남부에는 파묵칼레 대학교가 있다. 서북부에는 산업 단지가 있으며 동북쪽 10km 지점에 새로 조성된 산업 도시가 있다. 산업도시 동남쪽에는 골로사이서의 배경인 콜로사이 유적이 있다. 그 남쪽의 호나즈 (카드무스) 산지는 현지인들이 즐겨 찾는 여름 휴양지이다. 한편 파묵칼레, 라오디케아 외에 토클류야탁 산 너머 아프로디시아스 유적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아이든 주에 속하긴 하지만 데니즐리에서 1시간 거리로 그나마 가깝다. 동쪽 40km 지점에 데니즐리 차르다크 공항이 있지만 도심에서 1시간 가까이 걸려 접근성이 떨어지는 편이다. 2009년 한국의 무안군과 자매결연을 맺었다.
2. 역사
라오디케이아 유적의 중심 거리 (데쿠마누스 막시무스)
멘데레스 협곡과 아나톨리아 고원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 데니즐리 일대는 먼 옛날부터 인류가 거주하였다. 현 도심에는 아투다 (Αττούδα)가 있었고, 그 북쪽에는 디오폴리스가 있었다. 후자는 기원전 260년경 셀레우코스 왕조의 군주 안티오코스 2세의 왕비 라오디케를 기리며 라오디케이아 프로스 투 리쿠스 (Λαοδίκεια πρὸς τοῦ Λύκου)로 명명되었다. 기원전 218년경 시리아 전쟁을 틈타 안티오코스 3세의 외손 아카에오스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었고, 이후 안티오코스 3세는 바빌론의 유대인 2천여명을 라오디케이아에 이주시켰다. 마그네시아 전투 후 페르가몬 왕국을 거쳐 기원전 133년 일대는 로마령이 되었고, 라오디케아는 자유 도시로 지정되어 자체적으로 동전을 주조하였다.
비록 미트리다테스 6세의 침공으로 파괴되었지만 곧 재건된 도시는 검은 양모의 수출로 부유해졌고, 현지 귀족 폴레몬 1세는 기원전 37년, 로마 제국에 의해 폰투스 왕국과 보스포루스 왕국의 군주로 연이어 추대되기도 하였다. 라오디케이아의 부는 서기 60년 지진을 겪고도 로마 당국의 지원을 거절하고 자력으로 도시를 재건할 정도였다. 상업 외에도 금융업이 발달하였고 치유의 신전과 의학교가 있었으며, 눈병에 용하다고 알려진 프리기안 안약이 생산되었다. 또한 라오디케이아는 초기 기독교에 있어 중요한 도시로, 요한 묵시록에서 언급된 소아시아 7대 교회 도시 중 하나였고, 골로새서에서 바울로가 라오디케이아로 보낸 편지가 언급되었다. 다만 동로마 제국 들어 도시의 중요성은 저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