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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녕공주

정순숙의공주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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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평가4. 대중매체에서

1. 개요

德寧公主
1310년대[1]~1375

고려의 제28대 국왕 충혜왕의 1비이자 제29대 국왕 충목왕의 모후. 이름은 이린친발(亦憐眞班). 원나라 진서무정왕 초베르(焦八)의 딸이다. 1367년 원나라로부터 '정순숙의공주'(貞順淑儀公主)로 다시 책봉되었기에 '정순숙의공주'라고도 불린다.

2. 생애

덕녕공주는 세조 쿠빌라이 칸의 4대손으로, 아버지 초베르는 쿠빌라이 칸의 7남인 오그룩치의 손자였으며, 원나라 황제였던 문종과 7촌 관계였다. 덕녕공주는 쿠빌라이 칸의 막내딸 제국대장공주 쿠틀룩켈미쉬의 남매인 오그룩치의 증손녀이고, 남편인 충혜왕 쿠빌라이 칸의 딸 제국대장공주의 증손이므로, 결국 충혜왕과 덕녕공주는 팔촌이 되었다.

덕녕공주는 충혜왕이 원나라에 체류하던 1330년에 그와 혼인하여, 같은 해에 고려로 들어왔다. 당시 충혜왕은 16세였고, 덕녕공주의 나이는 언급되지 않으나 충혜왕이 죽은 뒤 덕녕공주가 성년(盛年)으로 궁중에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적으면 10대 초반, 많아봐야 10대 후반으로 보인다.

시아버지인 제27대 충숙왕은 아버지 충선왕처럼 원 황실과 가까운 인척도 큰 공로도 없었기 때문에 원나라 내에서의 지위가 낮았다.[2] 이런 상황에서 사촌인 제2대 심왕 왕고가 고려 국왕 자리까지 노리자 이에 대한 견제의 일환으로 세자 왕정과 원나라의 왕녀를 결혼시킨 것으로 보인다.

원나라에서 배우자들 중 덕녕공주를 지정한 구체적인 이유는 알 수 없다. 공주의 아버지 초베르는 결혼 당시 원 황제였던 문종 칠촌으로 먼 편이었고, 원나라 종실 주류인 세조 쿠빌라이 칸의 장남 칭김 황태자 계열도 아니었다. 하지만 초베르는 제3대 원 무종 때부터 문종 시대에 이르기까지 30여 년에 걸쳐 각지의 반란군을 토벌하는 무공으로 황실의 신임을 얻은 인물이었다.

초베르는 딸 덕녕공주가 결혼한 해인 충숙왕 17년 운남왕으로 자립한 제왕(諸王)을 진압하러 가서 다음해 1월에 운남을 진압하는 공을 세웠고, 이보다 앞서 사천 반란을 진압한 적도 있었다. 덕녕공주는 충숙왕 17년 3월에 혼인했는데, 그 해 11월에 아버지 초베르가 운남 진압에서 처음 승전보를 올렸기 때문에 딸의 결혼 참석 이후에 운남 진압을 하러 간 것으로 보인다. 충숙왕이 많은 종친 공주들 중에서 덕녕공주와 세자 왕정을 혼인시킨 것은, 많은 무공으로 원 황실의 신임을 받던 진서무정왕 초베르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진서무정왕은 '1자왕'(一字王)은 아니었으나, 덕녕공주가 충혜왕과 혼인하기 바로 전 해에 원 문종의 정통성과 관련된 중대한 반란을 진압한 이력이 있었다. 이때 반란군이 진서무정왕에게 군대를 요청하기도 했지만 진서무정왕은 거절하고 반란을 진압했다. 진서무정왕은 몽골 서부를 영지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중앙 황실에게 충성하고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서부 반란 세력과 결탁할 위험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따라서 원나라의 입장에서는 덕녕공주를 원나라에서 가장 동쪽 봉토인 고려의 세자빈으로 보내는 걸로 이 통혼을 이용한 것이었다. 진서무정왕이 중앙 조정과 직접 통혼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 하지만, 몽골은 족내혼(族內婚)을 포기하지 않은 고려와 달리 전통적으로 족외혼(族外婚)을 했기 때문에 아무리 황금씨족인 보르지긴 오복 키야트씨라도 그걸 무시하고 직접 통혼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즉 덕녕공주의 진서무정왕부는 황제와의 혈연이 멀었고, 세조 쿠빌라이 칸의 서녀 제국대장공주나 제2대 황제 계승에서 밀려난 원 성종 테무르 칸의 형 카말라의 딸이자 훗날 제6대 진종으로 즉위하는 이순테무르의 누나인 계국대장공주에 미치지는 못하더라도 그렇게 격이 떨어지는 집안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덕녕공주 집안의 위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아버지인 진서무정왕 초베르가 운남 회복 이후 얼마 안 가 죽었기 때문이다. 1331년 1월
"운남 대책을 조정에 건의하고 얼마 안 가 졸하였다."
는 기록을 보아, 덕녕공주가 고려에 온 1330년 7월로부터 1년도 채 안 되었던 때로 보인다. 진서무정왕의 봉토를 이어받은 남자 형제는 1335년 반란을 토벌하다가 전사했고, '서평왕'(西平王)으로 봉해진 형제는 다음해 그 아들이 서평왕의 인(印)을 받았다는 것으로 보아 얼마 안 가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덕녕공주는 결혼한 지 5~6년 만에 집안의 기반인 아버지와 형제들을 모두 잃어버린 셈이었으며, 이는 덕녕공주의 고려에서의 권세가 충렬왕의 왕비 제국대장공주나 충선왕의 왕비 계국대장공주보다 적은 상황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충혜왕과는 13년 동안 부부로 지냈다. 덕녕공주는 충목왕과 장녕공주 등 1남 1녀를 보았고, 이들 사이가 좋았는지 나빴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가 없다. 덕녕공주는 남편의 바람기 때문에 투기가 심했던 제국대장공주 복국장공주, 이를 빌미로 남편 충선왕을 폐위까지 시켜버린 계국대장공주와 달리 다른 고려인 왕비들과 별다른 트러블이 나오지 않는다. 고려인 비빈들의 간택이 공주의 허락을 받고 이루어졌다는 언급은 없으니, 친정이 일찍 몰락해서 별 힘을 못 쓴 탓에 무시당했다고 보는 것이 더 맞을 듯하다.

충혜왕은 덕녕공주 이후에 희비 윤씨, 화비 홍씨, 은천옹주 임씨와 차례로 혼인했다. 그런데도 충혜왕은 관료의 아내를 비롯하여 자신의 서모인 부왕 충숙왕의 3비 경화공주와 충숙왕의 후궁 수비 권씨까지 강간했다. 특히 1339년 8월의 경화공주 강간 사건은 심왕파인 조적의 반란이 발생하는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덕녕공주가 이를 가지고 불쾌히 여겼거나 따진 적은 없다. 경화공주가 충혜왕의 폐행(측근)인 정천기를 정동행성에 감금하자, 덕녕공주는 그를 석방시켜 궁궐 내에 숨겨주었다. 이는 덕녕공주의 친정이 일찍 사라진 탓에 원나라에서도 별 힘을 쓰지 못한지라[3] 하다못해 '고려국 왕비'라는 자기 자리라도 지키기 위해 남편을 감싸는 게 자신에게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 자기 아들 충목왕이 아직 어리기 때문에 사적인 감정은 억눌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 시기 덕녕공주는 별다른 권세없이 무척 조용히 지냈다. 하지만 충혜왕이 폐위되고 어린 아들 충목왕이 즉위하자, 충목왕의 친모이자 원나라의 왕녀였던 덕녕공주가 부각되기 시작했다. 충혜왕 폐위 당시 충목왕은 원나라에 머물고 있었는데, 환관 고용보에게 안겨 들어간 그에게 혜종 토곤테무르 칸이
"부모 중 누구를 배우겠느냐?"
고 묻자 충목왕은
"어머니를 배우겠습니다."
라고 답하였고, 이에 황제는 충목왕이 고려 국왕 자리를 물려받는 걸 허가했다. 원나라에서도 '어리기는 하지만 원나라 공주가 낳은 아들이 왕위를 물려받는 게 낫다'고 여긴 것으로 보인다. 충혜왕이 폐위된 11월부터 충목왕이 즉위한 다음해 2월까지 고려 국왕 자리는 비어 있었다. 충혜왕의 소환을 담당한 도치는 고용보에게 명령을 내려 국사를 맡아보게 하였으며, 기철과 홍빈에게 정동행성의 일을 임시 주관하게 하였다.

이 사람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자가 고용보였는데, 그는 원나라에 들어가 황제를 만나는 자리에 배석하였다. 고용보는 황제의 총애를 받아 권세를 휘둘러 친왕(親王)과 승상이라도 절을 올릴 정도였다고 한다. 원나라 어사대에서 이처럼 탄핵한 내용이 과장된 면이 없지는 않겠지만, 원나라에서 중요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고용보가 탄핵을 받아 금강산에 유배를 왔을 때도 충목왕은 그와 원나라 조정을 위해 연회를 베풀었다. 따라서 고용보에 대한 충목왕의 후대는 그를 통해 원나라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덕녕공주의 뜻이 있었을 것이다. 고용보는 기황후와 긴밀했다고 하지만 확신하기는 어렵고, 고용보가 강해진 뒤 기씨가 현직에서 멀어져 톡토와 기씨 일파가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고 벨케부카-태평-고용보가 정국을 주도하는 등 사이가 나빠진 것으로 보인다. 고용보는 훗날 조일신의 난에 휘말려 도주한 후 출가한 척 승려로 위장해 해인사에 숨어 지내다가 발각되어 공민왕에 의해 목숨을 잃었는데, 세간에는 " 공민왕의 형 충혜왕 폐위에 고용보가 도왔기 때문"이라고 했다.

홍빈은 처음에는 조적의 난에 협조했지만, 심문을 받을 때는 오히려 충혜왕을 옹호해 1등 공신에 책봉된 특이한 전력의 인물이었다. 도치가 정동행성의 일을 임시 담당케 했음에도 불구하고 병을 핑계로 일을 돌보지 않았으므로 정국에 주요한 변수는 아니었다. 기철도 이 시기에는 별 행적이 없는데, 기황후 고용보의 관계 때문으로 보인다.

이런 정국 속에서 덕녕공주가 정계의 핵심으로 자리잡은 것 같다. 충목왕을 책봉하기 위해 원나라에서 사신이 파견되었는데, 이들을 위한 연회에서 덕녕공주가 남면(南面)하고 왕은 서면(西面)했다. 왕이 아닌 덕녕공주가 남면했다는 것은 덕녕공주가 수렴청정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덕녕공주는 실질적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국정을 행사했다.

권력 행사의 매개는 다름아닌 충혜왕 이래의 측근 세력으로, 측근 세력과 결탁해 정계의 주도권을 장악했다는 점은 정방 혁파와 복치(復置) 과정에서 드러난다. 정방은 폐단이 심해 이제현의 상소로 충목왕 즉위년 12월에 사라졌지만 1개월 만에 다시 설치되었다. 이들 세력은 신예, 전숙몽, 강윤충 등이었고, 이들은 충목왕 대에 인사권을 남용하였다.

하지만 충혜왕의 폐행이 모두 덕녕공주의 측근이 되지는 않았는데, 전숙몽은 덕녕공주의 비위를 거슬러 동래로 유배되었다. 당시 전숙몽의 관직은 대언(代言)이었는데 이 때 정방제조가 재상, 대언으로 이루어졌고 충혜왕 폐행 세력과 덕녕공주 결탁으로 이루어진 것을 고려할 때, 덕녕공주가 원하는 인사를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배제된 것으로 보인다.

충목왕 대에 덕녕공주의 최측근으로 두드러진 자들은 신예, 강윤충[4], 배전이었다. 신예는 충혜왕 원나라 조정에 붙들려 있을 때 자기 매부 고용보와 짜고 군사를 매복시켜 궁궐 외곽을 수비한 이력이 있는 사람으로 자신도 원나라 관직을 가지고 황제의 명을 받들어 금강산에 오는 등 양국을 왕래하며 위세를 떨치던 사람이었다. 강윤충은 충숙왕(제27대)을 섬겨 호군이 되었으며, 조적의 난 때 왕을 호위해 1등 공신에 봉해진 충혜왕의 폐행이었다. 배전 역시 충혜왕의 폐행으로 조적의 난을 진압한 노고로 1등 공신에 봉해진 인물이었다.

배전은 강윤충과 더불어 출입하면서 총애를 받았다. 강윤충은 인당 등이 원사 자격으로 온 고용보에게 숙청을 건의하는 일이 있었지만, 강윤충이 고용보의 어머니에게 뇌물을 바쳐 모면하였다. 충목왕 대에는 정치도감으로 여러 개혁을 했지만, 이 개혁이 실패한 이유 중에 하나가 정방이었고, 정방의 인사를 장악한 자들이 덕녕공주의 측근이었다. 김륜과 이제현이 올린 상소에서는
"강윤충이 정방제조가 되어 개혁을 그르쳤다."
고 비판했다. 사람들은 "전민과 관련된 폐정 개혁보다 인사권 남용을 먼저 바로잡아야 한다"고 여겼지만, 덕녕공주는 출신 때문인지 측근 정치를 버리지 않았다. 이제현은 충목왕과 충정왕 대에는 별 활약을 못하다가 공민왕 대에 이르러 다시 정계에서 활약을 하게 된다.

1348년 아들 충목왕이 12세의 나이로 승하하자 후사의 선정을 둘러싼 갈등이 발발하게 된다. 충목왕은 충혜왕의 적장자라서 큰 문제가 안 되었으나, 충목왕 사후의 상황은 그때와 달랐다. 후보자는 충혜왕과 희비 윤씨 사이에서 태어난 왕저 충혜왕의 동복 남동생인 강릉대군 왕기(왕전)였다.

덕녕공주는 충목왕이 위독해지자 재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밀직부사 안목의 집에 옮겨 거주하면서 모든 사무를 처리하고 왕이 승하하자마자 기철, 남편 충혜왕과 공민왕의 어머니인 덕비 홍씨(德妃 洪氏)로 하여금 정동행성의 일을 주관하게 했다. 수렴청정의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고자 했던 것이다. 기철 기황후 세력과의 연대로 고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원 황실에서 기황후의 정치력이 약해지고 있었다는 지적이 있어 속단하기에는 이르다. 하지만 덕비 홍씨와 기철에게 주관하라고 해 놓고서도 정사는 자기가 처리한 것으로 보아, 이는 그냥 형식적인 절차로 보인다.

덕비 홍씨는 이제현 원나라에 보내 새 왕을 간택할 것을 요청하는 표문을 올렸다. 충목왕의 후사 간택을 요청하는 표문에서 왕기(왕전)를 왕저보다 앞서 거론하고, 왕저의 어린 나이를 표출시키면서까지 민망(民望)을 따라달라고 한 것, 권준, 이곡, 윤택 등이 "왕기를 왕으로 세워달라"고 요청한 것을 보아, 당시 고려는 왕저보다는 강릉대군 왕기(왕전)를 더 고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원 혜종은 충목왕 사후 2개월 뒤 다음해 2월, 왕저를 원나라에 오게 한 뒤 5월에 왕위 계승을 확정했다.

사신(史臣)은 충정왕의 즉위 과정에 대해
"강릉군은 국민의 인심을 얻고 원의 원조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윤씨가 붕당을 만들어 탐욕을 함부로 하여 화근을 만들었다."
고 비판했다. 이를 보아 충목왕의 승하 이후 충정왕 즉위 때까지 고려의 정치 세력은 양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덕녕공주는 강릉대군 왕기(왕전)보다 어린 왕저가 즉위하는 것이 자신의 권력에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충정왕 즉위 과정에서 생모 희비 윤씨 세력과 덕녕공주가 손을 잡았을 수도 있다. 희비는 고려인이고, 덕녕공주는 충목왕 시대 이래 권력의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희비 윤씨 입장에서는 자기 아들을 즉위시키기 위해서는 덕녕공주와 손잡는 것이 합리적이었다. 덕녕공주도, 자신이 원나라의 공주이기는 하나 정치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명분인 충목왕이 죽은 상황에서 권세를 누리기 위해서는 희비 윤씨와 손잡아야 했다.

왕저를 추대한 세력은 노책과 최유 같은 부원배, 손수경, 이군해와 같은 충혜왕 폐행, 왕저의 외척 민사평, 윤시우 등이었다. 덕녕공주가 왕저를 지지한 것은 손수경과 이군해가 왕저를 받들고 원나라에 간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대간의 반대를 무릅쓰고 원나라에 갔으므로 추대의 중추적 존재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손수경, 이군해는 충혜왕의 폐행이지만 덕녕공주와 그리 밀착된 관계는 아니었다. 손수경은 충혜왕이 복위를 위해 뇌물을 줘서 원나라로 보낼 정도로 신임했고, 충혜왕의 수감 당시 같이 감옥에 갇혀 국문을 당하기까지 해, 1등 시종 공신에 책봉된 측근이었다. 다만 충혜왕 폐위 이후 충목왕 즉위가 확정되지 않은 시기에 손수경이 원나라에 가서 뇌물을 바친 것으로 보아 충목왕 즉위에 어느 정도 도와준 것 같다. 충목왕 이후에도 고위 관직을 역임하고 있었으므로 강윤충만큼 밀착되지는 않아도 서로 우호적인 편이기는 했던 것 같다.

이군해는 충숙왕 복위 후 충혜왕의 폐행이라는 이유로 해도로 유배를 갔다가 충혜왕의 복위로 복귀한 인물이다. 충목왕이 즉위한 뒤 정방제조를 맡기도 했으며 충목왕이 병이 났을 때 덕녕공주가 이군해에게
"천마산에서 수륙회를 베풀고 기도를 드리라."
고 한 것으로 보아 충분히 가까운 사이였다고 볼 수 있다.

충정왕 시대 초에는 덕녕공주의 정치적 위상이 전대에 버금갈 정도였다. 충정왕이 즉위한 뒤 국사를 전담한 사람은 이군해였으며, 희비 윤씨 계열 인물인 민사평과 더불어 정방제조였다. 이어 내려진 대대적인 인사 이동에서도 손수경과 이군해는 관삼사사와 도첨의찬성사의 요직에 임명되었다. 수상인 첨의정승은 노책이었고, 민사평을 비롯한 희비 윤씨 세력도 주요 관직에 포진하여 상응하는 영향력을 발휘했지만, 이미 몇 년 간 섭정을 했던 만큼 덕녕공주의 정치적인 권세는 더 우위였을 것으로 보인다.

원나라 조정이 충정왕에게 국왕인을 전달하고, 베푼 연회에서 덕녕공주가 남면하고 왕이 동면한 사실은, 여전히 과거의 지위를 유지했음을 보여준다. 또 요왕(潦王)이 충정왕과 덕녕공주에게 사신을 보내 향응을 베푼 것으로 보아, 국내외적으로 덕녕공주의 위세를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 이 때 정방제조 김광재가 반발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인사권을 장악해 정국을 주도하려고 했던 것 같다. 충정왕 2년 9월 김광재의 건의가 받아들여져 정방이 사라지게 된다.

덕녕공주의 섭정이 전조와 다른 점은, 충정왕 측근 세력과 권력을 나누어 가졌다는 점이다. 충정왕 초에 권력을 농단한 주 인물은 윤시우와 배전으로 배전은 충목왕 대에 덕녕공주의 측근으로 권세를 가졌고, 충정왕 대에도 변함없이 정계의 핵심이었다. 윤시우는 충정왕 측근에서 강대한 권력을 행사해 '이왕'(伊王)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윤시우는 충정왕의 곁에서, 배전은 덕녕공주의 궁중에서 각각 세력의 중추를 맡고 있었다.

한편 충정왕 말년부터 공민왕이 즉위하기까지 고려와 원나라에서는 계승을 둘러싼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공민왕은 1349년 가을 노국대장공주 보르지긴 부다시리와 혼인하여 왕권을 항한 새로운 준비를 했다. 공민왕은 부왕인 충숙왕 시절부터 원나라에 머물며 훗날을 도모한 것이다. 결국 덕녕공주는 1350년 정통 관료들의 반발과 정치적 위상 하락에, 살아있던 친정은 오래 전에 없어졌고, 딸인 장녕공주도 원나라 노왕(魯王)에게 시집간 상황에서, 더 이상 권력을 행사할 의욕이 사라졌는지 원나라로 돌아간다.

하지만 덕녕공주는 1354년에 다시 고려로 귀국했다. 덕녕공주 체류 당시 원나라는 매우 큰 혼란에 빠져 있었는데, 황하의 범람으로 인한 수재, 기근, 전염병의 유행으로 민심은 매우 흉흉했으며 대규모 화폐 발행으로 인한 극 인플레이션 현상, 한족 반란군인 홍건적의 대봉기로 각지에서 농민 반란이 발발하고 있었다. 이 해에는 원나라의 승상인 톡토가 채하중을 통해 홍건적 토벌 지원을 요구할 정도였으며, 고려는 이를 받아들여 유탁 등이 수천 명의 병사를 이끌고 가서 공을 세우기도 할 정도였다. 이런 상황이니, 그냥 고려에서 여생을 사는 게 더 안정적이고 나을 것이라고 여긴 듯하다.

공민왕은 즉위하자마자 덕녕공주의 세력들부터 없앴으며, 이미 즉위한 지 3년이 지난 상황에서 자리를 잘 잡은지라 덕녕공주의 영향력도 소멸한 상태였으므로 형수의 귀국을 받아들였다. 귀국한 뒤 공민왕은 덕녕공주를 잘 모셨고 삼전(三殿)과 동등하게 받들었다고 하지만, 이미 이 시기에 가서 덕녕공주의 정치적 영향력이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 초기 공민왕은 원나라를 자기 쪽에서 배제하기 전에는 가급적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자 원나라 공주의 귀국을 받아들인 것일 수도 있다.

한편 덕녕공주의 귀국과 관련된 노왕(魯王)의 행보도 두드러지는데, 귀국한 2월 바로 전달인 정월에 노왕은 사신(使臣)에게 연회 비용으로 저폐 150정을 보냈다. 이 노왕은 덕녕공주의 딸인 장녕공주/장녕옹주의 사위였다고 하지만 당시 장녕공주는 사위를 보기에는 젊은 나이였고,[5] 남편과 사위가 똑같은 작위를 사용하는 것도 의문이다. 현대 중국의 '여서'(女壻)에는 사위 외에 남편이라는 뜻도 있기 때문에 남편인 노왕을 칭하는 말일 수도 있지만, 장녕공주가 실절(失節, 절개를 잃음)이라 비난받은 기록이 있기에 장녕공주가 처음 노왕과 결혼한 뒤 위 사료에 나오는 노왕의 아버지에게 재가했을 수도 있다.

아울러 덕녕공주가 귀국한 2월 공민왕의 연경궁까지 가서 원나라 사신에게 연회를 베푼 사실도 어느 정도 관련된 것 같지만, 확실한 연관은 알기 어렵다. 《고려사》에는 이 시기 공민왕이 원나라 조정과 함께 국가 원로 및 고위 관리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는데, 이 비용은 원 혜종이 보내 준 저폐로 충당했다. 제34대 공양왕 원년에 고려에서 노왕의 초상을 위문하러 갔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노왕은 공민왕에게 저폐를 보낸 노왕으로 보인다.

장녕공주는 1368년에 명 태조 홍무제 주원장 원나라의 수도 대도(현재의 베이징)를 함락하여 원나라 황실이 몽골로 도망가는 와중에 실종되었다가, 1370년에 고려로 돌아왔다. 공민왕은 절개를 잃었다고 비판받은 장녕공주를 찾아 어머니 덕녕공주와 함께 지내도록 했다. 이후 1367년 덕녕공주는 원나라로부터 '정순숙의공주'(貞順淑儀公主)로 다시 책봉되었으며, 우왕 원년에 일생을 마감하였다. 능묘는 경릉(頃陵)이다.

3. 평가

덕녕공주의 섭정은 성리학이 자리잡히기 이전 고려와 전통적 몽골 사회의 관습에서 어느 정도 기인하는 측면이 있다. 한국에서는 일찍부터 모권제(母權制)와 유사한 제도가 있었다. 남녀차별이 일찍부터 강했던 중국에서도 성(姓)이 본래 모계 씨족사회에서 기원한 것이라 타 문화권과 달리 혼후에도 성씨가 안 바뀌었으며, 한국도 조선 초기까지 사위, 외손자 재산 상속 및 집안 상속 개념이 남아있어서 지금도 성이 안 바뀌는 제도가 있다. 일본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는 혼후에도 본래 성을 그대로 유지했다.

귀족-평민 집안의 대를 잇는 데서 족내혼(族內婚)이 허락되었고 적자 상속만을 인정하는 대신[6] 딸이 있으면 데릴사위에게 물려주고 부녀(婦女, 며느리)의 지위가 낮지 않았으며, 신라시대에도 일본처럼 부계계승 원칙이기는 했지만 선덕여왕, 진덕여왕, 진성여왕이 즉위하기도 했다.

13세기 몽골 사회도 며느리가 가정이나 저치에서 결정을 내릴 수 있었고, 원나라 황제의 즉위를 보면 칸을 선발하는 쿠릴타이에서 후비와 공주가 제왕(諸王), 부마와 함게 나란히 참가하거나 원나라의 역사에서 모후 섭정의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대표적으로 원 인종의 어머니 다기) 즉 원나라 출신 공주가 어린 아들이나 의붓아들이 즉위하자 정사에 관여한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덕녕공주는 수렴청정을 하면서 아들인 충목왕을 도와 여러가지 업적을 남겼고, 충목왕 역시 12세로 요절할 때까지 신진사대부를 등용하고, 권문세족들을 견제하는 등 미완의 명군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직무를 잘 수행했다. 시동생 공민왕이 즉위한 후 고려가 반원정책을 펼치게 되지만, 덕녕공주는 섭정으로서 비교적 개념찬 행보를 보였기 때문에[7] 몽골인이지만 공민왕에게 우대를 받았다고 할 수 있다.

1375년 승하했다. 묘호는 경릉(頃陵)이며, 1377( 우왕 3)년에 남편 충혜왕의 진전(眞殿)에 부묘(祔廟)되었다. 1390년 태묘(太廟)로 옮겨 합사하였다.
대체로 고려에 시집 온 원나라 공주들은 남편보다 더 먼저 죽어 단명한 편이었는데, 덕녕공주는 이례적으로 남편 충혜왕보다 31년이나 더 살다 죽었다. 생년이 기록되어 있지 않아 사망 당시 자세한 나이는 알 수 없으나 대략 60세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덕녕공주를 빼면 고려에 시집 온 몽골 공주들은 모두 40세를 못 넘기고 죽었다.

4. 대중매체에서

파일:덕녕공주.png

[1] 1314년생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근거가 없다. [2] 어머니가 2비인 의비 예수진(야속진)인데 '공주' 칭호가 없는 것으로 보아 황금씨족의 일원이 아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3] 원나라에서는 이 사건을 가지고 충혜왕에게 뭐라고 한 적이 없다. [4] 후일 조선 최초의 왕비가 되는 신덕왕후 강씨의 숙부. [5] 덕녕공주가 1330년에 결혼한 데다 충목왕의 여동생이기 때문에, 최대한으로 올려 잡아도 20대 초반이다. [6] 고려시대는 조선시대와 달리 국왕을 제외하면 일부일처제였고 의 존재조차 인정하지 않아서 비공식 서얼은 있어도 본질적으로 정부(情婦)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였다. 그게 원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7] 어디까지나 '비교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기황후의 세력을 등에 업은 기씨 일가 등 부원배가 날뛰는 막장 시대였기 때문에, 덕녕공주가 개혁 성향의 신하들을 앞세워 도모한 정치개혁은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또한 덕녕공주 스스로도 배전과 강윤충과 같은 간신배들을 비롯한 측근 세력의 부정부패를 눈 감아주기도 했으며 충목왕 사후에 대표적인 부원배 중 한 명인 기철에게 정동행성의 관리를 맡기기도 했다. 어느 정도 개혁을 하기는 했으나 권력욕 역시 제법 강했던 인물이라고 평할 수 있을 듯. [8] 다만 일단은 섭정을 맡은 고려의 대비로서 올바른 정치를 하려는 모습을 보이기는 하나 무조건 고려의 편이라기보다는 고려에 대해 복잡미묘한 감정을 품은 것처럼 묘사된다. 새로운 왕비이자 손아랫동서인 노국대장공주에게 '고려는 내 남편과 내 아들이 묻힌 땅이다.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나' 라고 우호적인 감정을 드러내는가 하면 '고려인들은 우리에게 겉으로만 친절하고 복종할 뿐 사실은 우리가 원나라 공주라서 미워한다' 라고 냉정하게 말하기도 했다. [9] 이 장면에서 기황후의 태도도 미묘하게 묘사되는데, 일단은 고려를 계속 자기 영향권에 두려는 정치적 술수로 덕녕공주를 스파이로 이용하고자 고려로 보냈다. 하지만 그전에 덕녕공주가 아들을 잃고 원나라에 돌아와 인사차 들리자 "아들 잃은 어미를 내쫒아버리는 게 고려의 풍습인가?"라고 일갈하는가 하면 "곤란한 점이 있으면 나에게 말하라"라고 하는 등 동정적인 반응도 보였다. 자기 스스로가 공녀로 원나라에 끌려와서 산전수전 겪으며 황후가 되어 조국인 고려에 대해 그리움과 증오심이라는 상반된 감정을 품고 있기에, 두 나라 사이에서 애매한 처지가 된 덕녕공주를 보며 동병상련을 느낀 듯하다. [10] 이에 공민왕은 "진작 몽골로 돌아가야 하지 않느냐?"며 쏘아 붙이는 동시에 "대비를 보면 원나라에서 볼모 생활을 한 것이 떠올라서 대비의 기침 소리도 듣기 싫다"라고 화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