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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17:52

대만 프로야구 리그/역사

1. 개요2. 리그의 시작 그리고 인기몰이(1990~1996)3. 승부조작이 판치는 리그(1996~2009)
3.1. 검은 호랑이 사건(1996)3.2. 검은 곰 사건(2005)3.3. 검은 고래 사건(2007)3.4. 블랙 미디어 사건(2008), 검은 코끼리 사건(2009)
4. 승부조작 그후(2010~2011)5. 반등을 노리는 대만 프로야구(2013~)



1. 개요

대만 프로야구 리그의 역사를 다루는 문서.

2. 리그의 시작 그리고 인기몰이(1990~1996)

대만은 한국보다 먼저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을 때 야구를 도입하여 한국과 맞먹는 역사가 있다. 대만에서의 야구는 최고의 스포츠로 인정받았고, 심지어 리틀야구팀이 리틀야구 월드시리즈에서 우승을 차지하고오면 마치 월드컵 우승이라도 한 듯한 분위기를 조성하며 카퍼레이드를 할 정도였다. 대만의 리틀야구는 상당히 강했다. 미국을 제외하고 리틀야구 월드시리즈 최다 우승국가이며 17회 우승을 기록한 바 있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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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대회 우승후 카퍼레이드를 하고 있는 대만 12세 이하 리틀 야구팀

하지만 리틀야구와 학생야구, 대학야구를 중심으로 야구가 엄청난 인기를 끌기는 했지만 이러한 인기에도 체계적인 프로리그는 없었고 세미프로리그(이른바 실업야구)는 있었지만 국대와는 다르게 실업리그는 인기가 저조했다. 그래서 아무리 리틀야구에서 좋은성적을 낸다한들 해당 선수들이 성년이 되어서도 정상급 실력에 걸맞지 않은 봉급과 인기때문에 제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거나 일본으로 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대만야구의 저변을 키우려면 프로야구가 있어야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게 수면위가 떠오른건 1987년이었다. 1987년 12월 31일에 직업봉구연맹준비위원회를 설립, 1989년 10월 23일에 중화직업봉구대연맹이 설립 되었다.

1990년에는 대망의 첫시즌이 시작되었다. 싼상 타이거스, 웨이취안 드래곤스, 퉁이 라이온즈, 슝디 엘리펀츠의 4개팀으로 꾸려진 초대 대만 프로야구는 이후 1993년 스바오 이글스, 쥔구어 베어스가 합류하면서 6개팀이 되었고 1997년에 허신 웨일즈가 합류하며 7개팀으로 꾸려졌다..하지만 승부조작이 다 말아먹었어요.

여하튼 대만야구는 상황이 극적으로 개선되어 실업리그만 있었던 시절보다 야구선수의 처우나 대우가 극적으로 오르는 효과를 누렸으며 대만 프로야구의 경기당 평균관중수는 5,000명을 넘어섰으며 누적관중수는 1991년부터 1996년까지 100만 관중시대를 열었다.

이와는 별도로 1997년 대만직업봉구대연맹(TML)이 출범, 4개 구단이 더 있는 양대 리그 시스템이었다.[3]

3. 승부조작이 판치는 리그(1996~2009)

3.1. 검은 호랑이 사건(1996)

사실 검은 독수리 사건에 묻혀있었지만 대만프로야구의 첫번째 승부조작은 1996년 6월에 일어났다. 싼상 타이거즈는 1995년 10월 14일 경기에서 선발투수가 고의사구를 의도적으로 남발하며 팀을 패배로 몰아갔는데 이 경기가 조작임이 들통난 것이다. 이 사건은 1996년 싼상 타이거즈와 웨이취안 드래곤즈와의 경기에서 싼상 타이거즈 후원회 회장이 대자보로 사람들에게 알렸고 이 사건의 여파로 모토지 타쿠와 감독과 스티븐 커리, 케빈 대톨라등 외국인 선수 4명 그리고 14명의 선수가 구속 및 기소가 되었다. 그리고 대만 검찰이 이 사건을 조사하던 도중 조금더 깊이 파고들자 본격적으로 승부조작 사건의 실체가 드러났다. 그것이 바로 검은 독수리 사건이었다.

3.1.1. 검은 독수리 사건(1997)

97년 일부 선수들의 주도하에 대만판 블랙삭스 스캔들이라 할 만한 검은 독수리 사건이라는 승부조작 사건이 일어나 파문을 일으키게 되었고 이 파문이 끝난 뒤 검은 독수리 사건에 크게 연관되어 있었던 팀인 스바오 이글스가 해체되었다.[4] 1996년에는 136만 관중을 유치했지만 1997년에는 절반수준인 68만명, 평균관중수도 반으로 감소한 2,041명에 불과 한등 리그 운영에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되었다.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스폰서가 중소기업 중심인 CPBL은 운영에 어려움을 겪을 수 밖에 없었고, 1999년에는 싼상 타이거스와 웨이취안 드래건스가 해체되면서 운영에 어려움을 겪게 되지만 대만직업봉구대연맹(台灣職業棒球大聯盟, Taiwan Major League, TML)이 2팀으로 줄어들면서 연맹끼리 통합하게 되었다. TML 소속이었던 띠이진깡 팀과 타이양 팀이 CPBL에 합류하면서 우여곡절끝에 6개의 야구팀을 맞추고 현재의 CPBL이 완성되게 되었다. 그리고 2004년 아테네 올림픽과 2006년 아시안 게임에서 대만이 좋은 성적을 내면서 다시금 봄을 맞나 싶었는데....

3.2. 검은 곰 사건(2005)

2005년 대만 프로야구 리그에 치명타를 꽂아넣는 검은 곰 사건(黑米事件)이 터지게 되며, 이 프로야구 승부조작으로 돌이킬 수 없는 몰락의 길을 걷고 만다.

싱농 불스가 초반 승승장구를 하며 우승을 할수 있던 상황에서 갑작스레 연패를 겪게 되자 수차례 승부조작때문에 의구심이 강해진 팬들의 반응은 "또 승부조작 아니냐?" 였고, 싱농 불스의 연패덕에 하위권 팀이었던 청타이가 우승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런데 시즌후 갑작스레 싱농팀의 코치 2명이 자진 사퇴를했고, 외국인 투수였던 레닌 피코타[5]도 황급히 계약을 파기하고 대만을 떠났다. 그러자 검찰에서 조사를 들어갔고 2005년 7월 26일, 라뉴 베어스의 선수가 경기중에 경찰에 체포된 것을 시작으로 22명의 관계자가 검찰에 소환되었는데 이중 9명이 라뉴 베어스 소속이기 때문에 "블랙 베어스 사건"이라고 불렀다.의외로 싱농불스는 승부조작이 아니었다. 그냥 정정당당하게 못했을뿐

3.3. 검은 고래 사건(2007)

2007년, 대만의 거물 정치인이 개입된 승부조작이 발각되자 중신 웨일스의 팀 주장인 쩡한저우(曾韓州)를 비롯한 5명을 불러들여 조사를 벌였고 결국 2명이 검찰 수사결과 승부조작에 연루되었음이 밝혀졌다.

이렇게 사건이 커지자 대만프로야구계는 발칵 뒤집혔는데 자체 정화작업을 해야한다는 목소리를 냈고 이를 위해 여러가지 대책을 내놓았으나 또다시 승부조작이 벌어졌다. 이 사건으로 13명의 선수가 옷을 벗었고 이중 11명이 중신 웨일스 소속이기에 블랙 웨일스 사건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3.4. 블랙 미디어 사건(2008), 검은 코끼리 사건(2009)

2008년에 크게 승부조작 사건이 또다시 터지면서 직접 관련이 있던 디미디어 티렉스는 시즌 도중 완전해산, 거기에 특별히 제명은 당하지 않았지만 애초에 인기가 없었던데다가 디미디어 티렉스의 상대 베팅팀으로 간접적으로 휘말렸던데다가 전 해에 승부조작 사건을 저질러서 이미지가 급속도로 나빠진 중신 웨일스도 시즌이 끝나고 해체를 선언하면서 4개 구단으로 축소되고 만다.

당시 디미디어에서 승부조작으로 수사를 받은 선수 및 코치로는 옌즈중(顏志中)[6], 천젠푸(陳建輔)[7], 라이쥔난(賴俊男)[8], 판중샤오(潘忠孝)[9], 정위량(鄭余亮)[10], 후런웨이(胡仁偉)[11], 호세 레온, 천위안자(陳元甲)[12], 천커판(陳克帆)[13], 셰자셴(謝佳賢)[14], 가오웨이(高瑋)[15], 코리 베일리, 윌리 레브론, 나폴레옹 칼자도, 레오빌도 파르가스, 저우쓰치(周思齊)[16], 궈밍런(郭銘仁)[17] 등 22명이 있었다고 한다. 보면 알겠지만 외국인 선수들까지도 가담했다(…). 이렇게 조사받은 선수 중 셰쟈셴, 저우쓰치, 궈밍런, 가오웨이 4명만 생존했고[18] 나머지는 전원 영구제명을 당했다. 용병 다섯 명의 경우 전원 승부조작 가담이 퐉인되었으나 네 명이 수사 전에 미국으로 런했고(…)[19] 유일하게 코리 베일리는 승부조작으로 얻은 돈을 전부 자진납부하고 불기소 처분을 받은 후 야구계에서 은퇴했다. 다만 이 선수들 모두 절대악 취급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게, 유일하게 살아남은 저우쓰치가 은퇴를 앞두고 낸 자서전에 나온 바에 따르면 '한 쪽에는 돈, 한 쪽에는 총'이라고 할 정도로 삼합회 사람들이 승부조작에 가담하지 않으면 담궈버리겠다는 협박까지 저질렀다고 한다. 애초에 구단 관계자, 코치진, 스태프, 용병 통역사 등등에 삼합회 사람이 모두 있었다고 하니 디미디어 팀에 있던 게 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수준. 문제의 저우쓰치도 승부조작은 협박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단호히 거부했으나 조작세력이 팀 운영에도 개입하는 바람에 당시 1군 스타플레이어였음에도 불구하고 강제로 벤치 스타트를 하는 날이 있었다고 한다.

2개 팀이 해체하면서 졸지에 많은 선수들이 웨이버 공시 처리돼 FA시장에 나왔는데, 이 선수들의 이적을 모두 받아들이기에는 구단의 수가 턱없이 부족했다. 당연히 남은 4개 구단도 이들을 다 받아줄 수가 없어서 18명만[20] 다른 팀으로 가고 나머지는 모두 실업자로 전락했다. 그 실업자 선수들이 모두 어디로 갔겠는가? 안 봐도 블루레이다.[21][22]

1997년에 벌어진 검은 독수리 사건이 일어난 뒤 대만 총통까지 나서서 반드시 승부조작을 뿌리뽑겠다고 하면서 이미지 쇄신을 위해 아시아 시리즈의 부활이나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의 유치등을 외쳤지만 그 뒤로 줄어들지 않는 것[23]이 가장 큰 문제. 두 팀이 작살난 2008년 시즌의 교훈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음해인 2009년 시즌 중반에 대만프로야구의 명문팀인 슝디 엘리펀츠 라뉴 베어스가 승부조작에 연루된 블랙 엘리펀츠 사건(黑象事件)까지 발생. 그대로 리그 신용은 나락으로 추락하게 된다.

이렇게 불명예스럽게 팀이 줄어들게 되니 자연스럽게 리그에 파행이 오는건 당연지사. CPBL의 리그진행이 전기팀 우승팀/후기팀 우승팀/통합 우승팀 중 승률이 높은 1팀[24]이 먼저 올라가고 나머지 두팀이 플레이오프를 치르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 CPBL의 특성상 4팀으로 줄어들었기 때문에 그 중 3팀이 올라가는건 말그대로 억지로 리그화해서 그냥 한팀 떨어트리는거라 대전표나 흥행 게임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말 그대로 좆망상태로 바뀌게 되었다. 이 때문에 4팀으로 바뀐뒤에는 마치 초창기의 KBO 리그처럼 전기리그/후기리그 우승팀이 타이완시리즈에 진출하는 방식을 띄게 되며, 통합 성적에서 우위를 가지는 팀이 4경기를 가져가는 형식으로 바뀌었다. 물론 전/후기 같은팀이 우승하게 되면 나머지 두 팀이 플레이오프를 치르긴 하는데 전후기 우승팀이 1승을 안고 가기 때문에 플옵에서 진출한 팀이 매우 불리하다.

여튼 이미지와 기타 여러가지 문제로 2009년 아시아 시리즈에 참가하지 못하면서 결국 아시아 시리즈는 파토나게 되고 NPB땜빵용이지만 돈이 잘벌리는 한일 클럽 챔피언쉽이 만들어진 계기가 된다.

4. 승부조작 그후(2010~2011)

승부조작과 같은 악재덕분에 팀은 팀대로 해산되고 신뢰도는 신뢰도대로 떨어진 프로야구의 인기는 당연히 떨어졌다. 시청률 자료에서 명색이 프로리그인데 시청률아무리 잘나와야 0.5%인 것은 이미 신용을 잃을대로 잃었다는 소리.[25] 감이 안오는 사람들을 위한 비례설명을 하자면 대한민국 케이블방송에서 중계하는 프로야구 페넌트레이스 시청률이 보통 1~3% 정도는 나오며, 지상파에서 포스트시즌이나 한국시리즈등을 중계하면 보통 7~8%, 잘 나오면 10% 초중반 까지 시청률을 기록하는것 과는 완전히 대조적. 관중수는 이전 리즈시절과 달리 반토막이 나버렸고, 총 관중수 100만시대는 그야말로 옛날일이 되어 버렸다. 2008년에는 리그 평균관중수 1922명이라는 경이적인 수치를 기록하기도 했다. 평균관중수 6800명을 찍었던 1992년 프로야구에 비하면 절반 이하로 떨어진 셈.

승부조작으로 리그가 파토가 나자 특급 유망주들은 싹이 보이면 전부 미국이나 일본으로 수출 유학하는 경우가 많아졌고[26][27] 위에 설명한 뫼비우스의 띠덕분에 CPBL은 앞으로의 미래조차 안 보인다는게 문제다. 그냥 답이 없다. 당장에 일본프로야구만 놓고 보더라도 1군 로스터에 대만 출신이 한 팀에 한 둘 씩은 있는 상황이다. 한 술 더 뜬다면 저런 막장스런 대만프로야구 분위기 때문에 지금은 거의 일본프로야구의 팜이 돼버린 듯한 인상이다. 한 때는 대만에서 일본프로야구 정규시즌 3연전 경기를 치렀을 정도로 시장성도 좋다. 2002년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오릭스 블루웨이브와의 홈경기 3연전을 타이베이 톈무 야구장에서 치른 바 있다. 그러나 대만 시장이 워낙 작아서 이후 경기 편성이 없는 상태이긴 하다. 스포츠채널에서는 양다이강이 진출한 니혼햄 경기 중심으로 많은 경기들이 중계되고 있다.
또한 대만에서 먼저 데려온 외국인 선수들은 대만리그에서 특급활약을 펼치면서 반대로 아시아 시리즈나 클럽 챔피언쉽등을 통해 타국에 눈도장찍어놓고 다른나라로 이적하기[28] 루트를 타는 쇼케이스용으로 활용되고 있다.

5. 반등을 노리는 대만 프로야구(2013~)

하지만 2013년 WBC에서 그간 한국과 일본에 밀려 물먹어야 했던 대만이 사상 최초로 2라운드에 진출하면서 서서히 희망이 생기고 있는 중. 2012시즌까지 평균관중수가 1000~2000명에 불과했었지만[29] 2013년 기준으로 6800명이 넘는 평균관중수를 기록하며 4배 이상 늘었고, 2016년 9월 기준으로 평균관중수 6000명 초반대를 유지하면서 예전의 명성을 회복하고 있다. 대만야구협회인 중화봉구대연맹에서도 기회를 살리기 위해 마케팅 및 미디어를 활용한 홍보에 열을 올리는 중. 이러한 인기 회복과 더불어 제5구단 창단 이야기도 나오고 2017년에는 6개 구단 체제로 갈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언제 또 승부조작으로 말아먹을지 모른다.

탑코 팔콘스와 메이푸 자이언츠의 합류가 사실상 무산되었으며, 2018년 호주리그 캠 베일 총재가 호주리그 선수들로 구성된 호주인 구단을 제 5구단으로서 참여시키는 제안서를 제출한 상태이나 일단 2019년 참여는 무산되었다. 그러나 초창기 최고 명문팀이었다가 해체한 웨이취안 드래곤스가 재창단을 선언하고 2021년 대만 프로야구 리그 참가가 확정되었다.

고졸 선수들이 드래프트에 참가할 수 있게 되고, 기존의 복귀 해외파 선수들이 리그의 중심을 잡아 주면서 선수 풀은 서서히 넓어지고 있다. 백투백 MVP 왕보룽, 2017년 1픽 랴오진후이 등이 20대 초반부터 리그를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그동안 고인물이던 CPBL에 새 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있다. 투수 쪽에서도 고교 시절 "세 작은 사자"로 불리던 장천옌, 천윈원 이라든가, 선발 투수로 정착한 천후 같은 젊은 선수들이 증가하고 있다.

2019 시즌에는 라미고가 3년 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왕보룽이 일본으로 진출한 가운데 타격 쪽에서는 린 리(라미고, 103경기 445타석 타율 0.389 OPS 1.077) 라는 새로운 슈퍼루키가 등장했다. 투수쪽에서는 마이크 로리가 압도적인 가운데 (WAR 4.99 투수 2위가 3.86) 대만 선발투수로는 97년생 천스펑(Chen Shih-Peng) 만이 체면치레. 17~18시즌의 새로 등장한 선수들 말고 새로운 얼굴들의 대두가 특징적이다. 불펜에서는 메이저 출신 리전창 등이 활약.

2020년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의 영향 속에서 방역 모범국으로 인정받은 대만은 전세계의 야구 리그 중 가장 빠르게 개막했다. 관중경기도 가장 빠르게 시작되었는데 메이저리그는 시즌내내 무관중으로 진행되었고 한국야구는 관중입장이 허용된 후 대유행으로 무관중으로 전환되는 일도 있었으며 일본야구는 방역실패에도 한국보다 더 많은 관중입장 허용으로 비판을 받았다. 작년의 에이스 린 리를 필두로 쑤즈제, 린안커 등 젊은 20대 중반 강타자들이 대거 등장하여 왕보룽의 뒤를 잇고 있다. 한편, 투수진에서는 리살베르토 보니야를 필두로 KBO 출신 외인 선수들이 대거 진출한 상태이다. 그 와중에 대부분의 외인투수를 제치고 ERA 1위를 달리는 것은 만 24세의 신진급 투수 황원셰로 대만프로야구의 새로운 기대주가 등장했다. 대만 국내 선수 중에서는 불펜 투수 천윈원이 독보적이다.

2022년 4월 27일 CPBL은 가오슝과 핑둥을 연고로 하는 타이강 호크스의 리그 가입을 최종 승인하면서 제6구단 창단을 공식화하였다. 타이강 이글스는 2022년 신인드래프트부터 참가하며 2023년을 2군 리그에서 보낸 후 2024년부터 CPBL 1군리그에 참가할 예정이다. 만약 계획대로 진행된다면 2008년 이후 14년만에 6구단 체제로 돌아오는 것이다.

2023년 기준 평균관중은 6천 명 정도인데 라쿠텐과 중신이 7000명 안팎이며 푸방과 퉁이는 4000~5000명 정도를 오간다.

2024시즌에는 관중수가 28.2%나 증가한 평균 7692명이다. 특히 중신이 10243명으로 작년대비 49%가 증가해 만 명을 돌파했으며 타이강, 웨이취안, 푸방이 7000명대, 라쿠텐과 퉁이가 6000명대를 기록했다.[30]

2024년 동아시아 3국 프로 야구 리그 중 최초로 피치 클락을 도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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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국은 여러 학교 팀이나 지역 팀으로 나누어져서 미국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아서 기록만 보면 대만이 최다 우승국이다. 대만이 마지막 우승을 거둔 1996년까지만 해도 그 미국팀들은 20번이 넘게 우승했고 2017년까지 35번 우승으로 대만을 압도적으로 앞서고 있다. 다만 80년대만 해도 그럭저럭 위세가 있던 야구 월드컵에선 준우승을 딱 1번 해봤다. 한국은 1982년 야구 월드컵을 우승해 아시아 유일 우승 기록(일본도 준우승을 1번 했다.)을 가지고 있으나 야구월드컵 최강이자 최다 우승국인 쿠바가 불참해서 우승할 수 있었다.한국은 이 대회 결승에서 4번 쿠바를 만나 모조리 졌다. [2] 1970년대 연재된 박수동 화백의 야구명랑만화 번데기 야구단을 보면 이때의 분위기를 얼추 알 수 있다. 시대상때문에 대만이 아닌 자유중국으로 나온다. [3] 두 연맹은 서로 경쟁관계였으며 양 리그간의 교류는 없었다. [4] 검은 독수리 사건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스바오 이글스가 가장 큰 타격을 입었기 때문이다. [5] 대만으로 오기 전 한화 이글스의 외국인 선수로도 뛰었다. [6] 승부조작이 확인되어 영구제명. 다만 법원에서는 항소 끝에 무죄판결을 받았다. 은퇴 후에는 잠시 리틀야구 지도자를 했으나 곧 그만둔 듯. [7] 승부조작이 확인되어 영구제명. 은퇴 후에는 미용사로 전직하였다. 또한 미용 직업학교 선생도 한다. [8] 승부조작이 확인되어 영구제명. 제명 이후 근황이 안 나와있다. 삼합회일지도 [9] 승부조작이 확인되어 영구제명. 이후 리틀야구 코치 기록이 있다. [10] 승부조작이 확인되어 영구제명되었다. 이후 잠시 다른 직장도 다니다가 리틀야구 감독으로 복귀하여 10년 넘게 리틀야구 감독을 하고 있다. [11] 승부조작이 확인되어 영구제명되었다. 이후 사기범죄 가담 등으로 완전히 매장되었다. [12] 승부조작이 확인되어 영구제명되었다. 이후 유명 셰프의 주방에 들어가서 요리를 배워 현재는 화롄현에서 요리사로 일하고 있다. [13] 승부조작이 확인되어 영구제명. 현재는 헬스 트레이너로 일하고 있다. [14] 승부조작 혐의 없음. 이후 특별 드래프트로 싱농 불스로 갔으나 1년만에 2009년 검은 코끼리 사건에 연루되어 방출당했다(…). 승부조작은 하지 않고 조작세력에게 접대를 받기만 했다.(이 점은 조작세력에게 식사대접을 받았으나 음식만 먹고 승부조작은 단호히 거부한 장성우와 비슷하다. 하지만 장성우와 다르게 방출당한 것을 보면 아예 아무 죄도 없었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불명예은퇴 후에도 꾸준히 리틀야구 및 실업야구 코치는 계속 역임하는 중. [15] 승부조작 혐의 없음. 그러나 새 팀을 구하지 못하고 실업야구로 가서 2013년까지 뛰고 은퇴했다. 현재는 실업팀에서 코치를 하는 중. [16] 참고인으로 조사를 받았다. 이후 특별 드래프트로 슝디 엘리펀츠에 입단한 후 40대가 되도록 현역을 유지하며 노익장을 과시하다 2024년 당해를 끝으로 은퇴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당시 승부조작에 엮였던 선수를 포함한 청타이-디미디어 출신 선수들 중 최후의 현역 선수. [17] 참고인으로 조사를 받았다. 이후 새 팀을 구하지 못하고 실업야구로 가서 2020년까지 뛰고 은퇴했다. [18] 애초에 저우쓰치와 궈밍런의 경우는 참고인으로 조사를 받았다. [19] 이들은 멕시칸 리그와 중남미 윈터리그에서 현역을 연장했고 호세 레온의 경우에는 승부조작범임에도 불구하고 은퇴 후 꾸준히 마이너리그팀 코치, 감독을 역임하고 있다. 2024년 현재도 호세 레온은 신시내티 레즈 산하 싱글 A 팀의 타격코치로 일한다. [20] 두 팀의 해체 이후 해체된 팀 선수들을 대상으로 특별 드래프트를 진행했다. 특히 퉁이는 달랑 두 명 데려갔고, 둘 중 하나는 1년만에 방출, 다른하나는 연봉협상이 결렬되어 스프링캠프 중 퇴단하여 실업팀으로 갔다(…). [21] 물론 100%가 조폭으로 전락한 것은 아니다. 실업팀으로 간 선수도 있고, 다른 떳떳한 진로를 택한 선수도 있다. [22] 당장 승부조작에 가담한 선수 중에서도 조폭으로 안 빠지고 양지에서 살고 있는 사람도 있다. 천커판이나 천위엔지아처럼. [23] 줄어들지 않을 수 밖에 없다. 앞서 말했듯이 대부분 승부조작은 대만의 마피아들이 연루되어있어 거의 조직적으로 행해여지기 때문. 위에 설명한대로 97년은 물론이요 05년도에도 사건이 하나 터진데다가 08년도까지 터지니 이건 거의 연례행사 수준...장제스가 독재, 강압통치로 조카며느리를 처형하고 부패인사들을 태평양에 던져가면서까지(실제로는 부풀려졌다는게 정설이지만 부패척결에 힘쓴 것은 사실이다.) 대만의 부패를 뿌리뽑으면서도 정작 이들만은 정리하지 못했다. [24] 만약 전/후기 같은 팀이 우승할 경우 통합 2, 3위팀이 플레이오프를 치르게 된다. 쉽게 말하면 80년대 한국 프로야구의 룰과 비슷하다고 보면 쉽다. [25] 다만 대만 방송은 1990년대 말에 워낙에 무분별하게 채널이 늘어나는 바람에 아무리 인기 프로그램이라도 시청률이 잘나와봐야 5-6%대고, 지상파에서 방영하는 프로그램의 시청률이 아무리 황금시간대라도 1%도 안 나오는 경우도 부지기수라는 상황은 감안해야 한다. 사실 그걸 감안해도 낮기는 하지만(...) [26] 천웨이인 역시 주니치 드래곤스와 계약 [27] 장즈셴(40인 로스터까지 들었으나 콜업 실패), 가오궈후이(트리플A조차 밟지도 못함), 린저슈엔(메이저리그에서 딱 9경기 뛰고 방출.앞의 둘보단 낫네) 등 메이저리그를 도전하다가 폭망하고 20대 중후반의 나이로 뒤늦게 대만으로 오는 경우도 많다. 문제는 이런 선수들도 CPBL에 노망주로 돌아와서 폭격하고 있다(...) [28] 대표적으로 라뉴 베어스 소속이었던 케니 레이번은 2006 아시아 시리즈에서 삼성을 상대로 국내 스카우터들의 눈에 띄어 2007~2008시즌 SK 와이번스로 이적해 국내 리그에서 뛰었던 것, 2010년 슝디 앨리펀츠 소속이었던 짐 메그레인 역시 챔피언쉽 리그를 통해 SK 스카우터에 눈에 띄어 2011 시즌에 SK 와이번스로 이적한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29] 이게 얼마나 심각한 거냐면 마이너리그 트리플 A 평균 관중이 5000명, 더블 A 평균 관중이 3000명, 싱글 A 평균 관중이 2000명, 일본 독립 리그 평균 관중이 1500명 정도다(...) 즉 한 나라의 1군 프로야구 리그가 싱글 A나 독립리그 수준의 관중수를 보여준다는 것(...). [30] KBO 기준 2024시즌 기준 NC, 키움, KT가 1만명 이상이니 한국 비인기팀보다 대만 인기팀이 관중동원력이 떨어지는 정도이다.